슈퍼모델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는 어떻게 LVMH 그룹의 앙투안 아르노와 만나 그들만의 모던 패밀리를 만들었을까? 그녀가 그 내밀한 이야기와 더 높고 넓은 세상을 향해 펼치는 자신의 꿈을 들려준다.
“아름다운 혼돈이에요.” 거실 창 너머로 에펠탑의 빛이 흐릿하게 보이는 아파트에 들어서며, 나탈리아 보디아노바(Natalia Vodianova)가 말했다. 유아용 그랜드 피아노는 형형색색의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 원목 퍼즐, 플레이모빌 성, 흔들 목마, 아이들이 종알거리며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장난감 전화기와 여기저기 쌓인 책 더미가 거실을 채웠다. 나탈리아의 6년 차 파트너이자 그녀의 가장 어린아이들 두 명의 아빠인 앙투안 아르노(Antoine Arnault)는 이 중 아무것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닥과 테이블엔 베스트셀러는 아닌 듯한 마케팅 서적과 <메이즈 러너> 같은 대중 소설이 나란히 놓여 있는가 하면, 옥션 하우스 카탈로그와 각종 아트 북이 쌓여 있기도 했다. 책 표지에 묻어 있는 우유 자국만 개의치 않는다면 이대로 작은 책방 하나를 차려도 충분할 것이다. 장난감과 책이 차지하지 않은 자리에는 양동이만한 크기의 씨흐 트루동 캔들과 휴가 때마다 찍은 가족 사진 액자가, 화병들에는 양귀비와 분홍 장미가 꽂혀 있다. 몇몇 눈에 띄는 유명한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슈퍼모델과 럭셔리 거물 LVMH 그룹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의 아들이 사는 집인 줄 몰랐을 것이다.
나탈리아와 아르노는 5년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왔다. 당시엔 나탈리아의 전 남편 저스틴 포트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들이 있었다. 그 후, 두 아이가 더 태어났다. 아홉 살 빅터가 피아노 건반을 딩동거리며 움직이는 동안, 나탈리아는 거의 저글링을 하듯이 한 살짜리 로만을 열여섯 살 큰아들 루카스에게 넘겼다. 세 살인 곱슬머리 막심은 참을성 많은 열한 살 누나 네바의 길고 흰 금발 머리카락 속에 폭 파묻혀 안겨 있었다. 위층으로 가면, 로만의 방문 옆에 아이들의 키를 표시해둔 볼펜 자국이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탈리아와 아르노, 이들의 친한 친구인 모델 칼리 크로스, 그리고 아르노의 첫 번째 부인의 키를 표시해둔 흔적까지. “우리에겐 공간이 더 필요해요. 하지만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떠나기가 쉽지 않아요.” 나탈리아가 말했다.
차분하게 잘생긴 외모, 굵직한 목소리, 게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까지 갖춘 아르노는 나탈리아와 만나기 시작한 2011년엔 아이가 없었다. 그즈음 나탈리아는 전남편 과 이혼을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첫 데이트 때부터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죠. 그녀는 데이트 전 우리 첫 만남을 기억도 못하지만.” 그는 2008년 루이 비통 캠페인 촬영으로 그들이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캠페인에 참여한 모델은 나탈리아와 에바 헤르지고바, 안젤라 린드발, 클라우디아 시퍼, 나오미 캠벨, 스테파니 세이무어 등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바로 제 입이 벌어졌던 걸 기억해요. 나탈리아는 아름답기도 아름답지만,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지니고 있거든요. 주변에 특별한 아우라가 흐르죠.” 그 이후 몇 년 동안 우연히 마주치거나 루이 비통의 만찬에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의적이었고, 마침내 아르노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나탈리아가 남편과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읽어냈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그러나 나탈리아는 아르노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만나자고 청하는 걸 몇 달간 들어주지 않고 그를 기다리게 했다. 매체의 억측과 파파라치 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탈리아가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는 좀 우스꽝스러웠어요. 둘 다 너무 수줍음을 탔거든요. 난 캐주얼한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그를 본다면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될 줄 알긴 알았는데, 그는 나에게 키스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거예요! 난 누가 날 좋아할지 아닐지 걱정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연약했고, 내가 상처 받을 것 같기도 했죠. ‘그래, 이 사람은 그냥 나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걸 수도 있잖아?’ 하면서 내 자신에게도 허세를 부렸어요.”
나탈리아가 그에게 빠진 건 생제르맹에서 가진 두 번째 데이트 때였다. 그들은 각자가 여름휴가를 위해 이비사에서 빌릴 집이 고작 10분 거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탈리아는 이혼 후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소개시킨 적이 없었고, 아르노와도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가족이 있는 휴가지로 그를 초대했다.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나탈리아의 어머니와 조부모님, 아이들을 돌봐주는 커플까지 있었죠. 커플 중의 여성이 공황 발작을 일으켜 앰뷸런스를 부르는 일도 벌어졌어요. 전 제가 무엇에 발을 들인 건지 깨달았죠. 그다음부터 거의 매주 그녀가 살고 있는 영국으로 갔어요. 어느 날 그녀에게 말했죠. 파리로 와달라고, 같이 살고 싶다고. 나탈리아는 이랬어요. ‘우리가 같이 살게 된다면 저 혼자만이 아닌 건 알고 있죠?’ 그 후 나탈리아는 생각하는 시간을 거친 뒤, 우루과이에 살고 있는 전 남편과 협상을 좀 했어요. 그렇게 함께 살게 됐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아르노의 말에 나탈리아는 주저했지만, 마음을 바꾸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엔 나를 위한 것보다 그를 위해서 마음먹은 부분이 더 컸을 거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남자를 사랑한다면 가능한 한 많이 그를 재생산해내고 싶어지잖아요?” 2년 뒤 막심이, 또 2년 뒤 로만이 태어났다. “짧은 시간 동안 제로에서 다섯 아이가 생겼죠. 그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일 겁니다. 저는 우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이들까지 갖게 됐어요. 좀 이기적일 수 있지만, 큰 아이들이 어린 아기들을 잘 돌봐준답니다!” 새 가족을 꾸릴 즈음 남성복 라벨 벨루티의 최고경영자였던 아르노는 막심이 태어나기 6개월 전에 이탈리아 캐시미어 브랜드 로로 피아나의 회장직을 맡게 됐다.
패션계에 오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님펫’(성적 매력이 있는 소녀)과도 같아서 다소 불편하기까지 했던 열일곱 살의 보디아노바와 서른다섯의 여인이 된 그녀를 연결시키기 힘들어한다. 하지만 지금도 보디아노바는 여전히 처음 등장하던 그때처럼 소녀와 여인 사이의 불확실한 공간에 머물곤 한다. 사진가 패트릭 드마셸리에가 이번 화보 촬영을 위해 나탈리아와 그녀의 아이들을 줄 세울 때, 그녀는 자녀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권위적인 명령조로 말했다. 러시아어로 말이다. 단 몇 초가 흐른 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언제 그랬냐는 듯 카메라에 맑은 시선을 맞추고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탈리아가 숨기지도 미화하지도 않는, 잘 알려진 그녀의 성장 배경을 떠올리면 사진 속 그녀가 불러일으키는 흐트러진 순수함에서 더욱 눈을 뗄 수 없다. 홀로 된 엄마 밑에서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동생 옥산나와 함께 자란 그녀는 열한 살 때부터 엄마를 따라 길거리에서 과일을 팔았다. 얼음장같이 찬 물에서 ‘북극곰 수영’을 즐기곤 하는 은퇴한 공장 노동자였던 할머니는 그녀에게 안정감과 위안을 준 사람이다. 나탈리아에게 스타일 감각을 물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할머니는 1940년대 식 쪽진 머리를 하고서 매일 아침마다 레드 립스틱을 발랐다고. “모델이 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길거리에서 살고 있을 거예요.” 나탈리아가 모델로 스카우트됐을 때 나이는 열일곱 살. 파리로 간 그녀는 아주 가파르게 솟아 올라 ‘슈퍼노바’란 별명을 얻었다.
나탈리아는 열아홉에 이미 캣워크와 잡지 표지를 장식했고,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루카스를 낳았다. 전 남편 역시 막대한 부동산을 지닌 가문의 거물이었기에 패션계 사람들은 그녀가 은퇴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세인의 의문이 잠잠해진 건 나탈리아가 출산 6주 뒤 입생로랑 쇼의 오프닝을 맡으면서부터. “제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19세에 아이를 갖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든든한 가정에서 자라난 서구의 여자아이들 대부분은 이런 말을 들어봤겠죠. ‘넌 정말로 소중한 존재란다, 그 남자에 대해 확신이 드니?’ 아무도 저에게 제가 그런 맥락으로 소중하다고 말해준 적이 없어요. 전 그저 사랑이 가장 소중했어요. 적어도 저한텐 그게 완전히 타당한 것이었고요… 제가 제 딸도 저처럼 똑같이 하기를 원할까요? 절대 아니에요, 이제는.” 지금의 그 모든 직업적 성취와 개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전 절대 제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아요. 항상 최악을 위해 대비한다구요!”
나탈리아의 직계 가족은 그녀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주진 못했어도 목적 의식을 심어준 게 분명하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지금도 그녀의 유명한 직업 윤리는 여전히 보존되고 있다. 1년에 한 달 정도를 캘빈 클라인과 겔랑의 일에 할당하고, 그 외에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4시 전까지 ‘네이키드 하트’ 재단의 파리 지사에서 보내는 것. 나탈리아가 2004년부터 추진한 이 재단은 러시아와 런던에도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에서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낡은 청바지와 루이 비통 컴뱃 부츠 차림으로 일한다. 여전히 아름다움에 대해 조언해주는 그녀의 할머니가 허락하지 않을 법한 룩이다.
네이키드 하트는 2004년, 체첸 반군이 한 초등학교 학생들을 인질로 잡은 사건 이후 탄생했다. 그 일은 나탈리아가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러시아의 낙후된 지역에 장애 아동을 위한 놀이터를 건설하고자 했다. 러시아에선 사회 제도와 지원이 심각하게 미미하기 때문에 많은 부모가 자폐증, 다운증후군, 뇌성마비인 아이들을 국영 고아원에 위탁해 버리곤 한다. “저희 엄마는 옥산나를 가족의 품에서 키워 주셨죠. 그건 이례적인 경우예요. 덕분에 전 동생과 같은 아이를 양육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목격할 수 있었어요.” 최근까지 네이키드 하트는 러시아, 영국, 그리고 페루에 놀이터 177개를 건설했고, 2017년 동안 최소 17개 놀이터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곳곳에 놀이터를 지었어요. 더 큰 도전을 원했죠.”
재단에서는 전문가 집단을 모집했고, 2011년 장애 가족 지원 센터를 세웠다. 다음 단계로는 자폐 아동의 조기 치료에 중점을 둔 교육자 훈련 모바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러시아 내 10개 학교와 24개 유치원에서 활발히 사용 중이다. 2012년부터 네이키드 하트 재단은 비슷한 목적을 가진 비영리단체에 기부하기 시작했고, 2015년 나탈리아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이 참가하는 스페셜 올림픽 위원장이 됐다.
그녀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문화를 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다. 러시아 팝스타 디마 빌란이 뮤직비디오 출연을 부탁했을 때도 나탈리아는 한 가지 조건하에 일을 수락했다. 그녀가 직접 각본을 쓰는 것. ‘Ne Molci’, 번역하면 ‘침묵하지 마라’의 뜻인 이 곡의 뮤직비디오 내용은 다운증후군이 있는 딸을 가진 여성이 사랑을 찾는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유튜브에서 7백만 뷰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요즘엔 소규모 기부를 가능하게 하는 앱인 엘비(Elbi) 론칭에 열정을 쏟고 있다. 이 앱을 사용하면 사용자들이 콘텐츠를 공유하면서, 한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용자가 있을 때마다 링크된 자선 단체에 최대 1 달러를 기부할 수 있는 식이다. “우리는 기부를 쉬운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공항에 앉아서도 할 수 있는, 더 따질 것도 없이 바로 할 수 있는 일로 말이에요.” 국제적인 박애주의 콘퍼런스에도 참여하는 그녀는 최근 이 분야 일을 지원해줄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대주교 데즈먼드 투투와 모델 엘르 맥퍼슨 등을 고객으로 둔 에이전시다. 그녀는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싶고, 이런 전문 에이전시와 함께 간다면 보다 풍부한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향후 우리는 런웨이나 잡지에서 활약하는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대신 헤드셋을 끼고 국제 무대를 오가는 그녀를 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 향하는 관심을 멈출 수가 있을까?
-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PATRICK DEMARCHELIER
- 글
- Alexandra Marshall
- 스타일리스트
- Jenke Ahmed Tailly
- 헤어
- Teddy Charles(@the Wall Group)
- 메이크업
- Aaron de Mey(@ArtPart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