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이라는 문을 통해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패션의 환상과 실재, 그로테스크한 잔혹함과 로맨틱의 미학이 장중하게 펼쳐지는 이곳, 알렉산더 매퀸의 세계가 열렸다. 런던 V&A 뮤지엄에서 열린 <Alexander McQueen: Savage Beauty> 전시는 매퀸의 전무후무한 위대함을 재조명했다. 그리고 그의 숨결과 정신이 오롯이 배어 있는 오브제를 통해 우리에게 의문을 품게 했다. 그는 혹시 살아 있는가. 자신의 머리와 가슴과 손을 대변하는 전시를 뒤에서 면밀히 조정하면서 말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완벽할 만큼 견고하게 쌓아 올린 창의적이고도 놀라운 패션 세계를 선사하며, 우리 곁에 여전히.
어린 시절, 자주 기대감에 들뜨곤 하는 내게 엄마는 이야기하셨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살아오며 그 의미를 차츰 깨닫게 되었지만 정말, 이 번만큼은 예외였다. <Savage Beauty>의 리오프닝 소식을 들은 후 1년 넘게 고대해온 내게 런던 V&A 에서 열린 알렉산더 매퀸의 회고전은 상상 이상의 황홀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건 지난 3월 12일 프레스 프리뷰에 참석한 세계 각지에서 온 프레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전시 기획에 참여한 이들과 촬영을 하느라 분주했고, 또 누군가는 전시를 총괄한 큐레이터 클레어 윌콕스와의 대담을 통해 전시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총 10개 주제로 구분된 전시실을 눈과 귀와 가슴으로 꼼꼼하게 탐색하는 내내 난 경탄을 멈출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매퀸의 세계는 패션 피조물을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었다. 방대한 아카이브엔 놀랍도록 아름다운, 기괴하고 잔혹한 동시에 로맨틱한 패션 유산이 그 자체로 하나 의 예술품처럼 자리했다. 매퀸 시절의 드라마틱한 쇼를 감상할 수 있는 스크린과 장엄한 인스톨레이션 방식 역시 훌 륭했지만 중간중간 내 발길을 사로잡은 건 그가 남긴 메시지였다. 특히 ‘Savage Mind’ 전시관의 벽에 적힌 문구는 그 가 충격적일 정도로 전위적이고 탐미적인 패션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고 싶었는지를 알려주었다. “규 칙은 그것을 깨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단, 전통은 존중하되 기존의 관습을 전복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리고 2015년, 다시 한번 매퀸의 이름을 통해 결코 가볍지 않은 패션의 판타지와 유혹적인 창의성 에 경의를 표하게 된 건 이 시대의 소명이 아닐까. 8월 2일까지 V&A에서 선보일 매퀸의 창조물은 단순히 패션이 입 고 즐기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와의 소통이 될 수 있음을, 여느 슬로건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생각 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음을 되새긴다. 그리고 하이패션이 실용주의의
V&A 뮤지엄 큐레이터, 클레어 윌콕스(Claire Wilcox)와의 인터뷰
이번 전시는 방대한 규모와 콘셉트가 분명한 전시실의 구성,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터져 나 오는 알렉산더 매퀸의 창조물 등 모든 점에서 경이로운 전시였다. 지난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펼쳐진 첫 회고전에서 나아가 런던에서 다시 열린 이번 전시가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V&A의 디렉터인 마틴 로스와 나는 매퀸의 조국인 영국 에서 그의 회고전을 다시 여는 것이 꿈이었다. 알다시피 이 전시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오브 아트에서 시작되 었다. 우리는 우선 V&A의 규모에 걸맞은 전시로 다시 구 성해야 했다. 특히 V&A만의 목소리를 더하기 위해 매퀸 의 커리어에 있어서 이전 전시와는 다른 요소를 이끌어내 고자 애썼다. V&A 뮤지엄은 2013년 9월부터 이 전시 준 비에 착수했다. V&A의 모든 전시는 신중한 리서치를 통 해 유일무이한 특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전시물을 통해 그 특성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은 물론이고. 케이티 그랜 드 등 자신의 알렉산더 매퀸 소장품을 대여해준 여러 인 물과 대화를 나누고, 매퀸의 아카이브를 치밀하게 연구했 다. 또한 이번 전시를 통해 출간된 책을 위해 28명의 컨 트리뷰터들로부터 에세이를 받는 등 2년 동안 꾸준히, 밀 도 있게 전시를 준비했다.
V&A 뮤지엄이라는 전시 공간을 통해 좀 더 특별하게 구 성하고자 했던 요소는 무엇이었나?
V&A의 전시 규모는 압도적이다. 우리는 이 공간에 걸맞 은 전시를 위해 뉴욕 전시와 달리 총 66개에 달하는 의 상과 액세서리를 추가했다. 이 오브제들은 갤러리의 일반 전시실보다 천고가 두 배나 높은 특별 전시관인 ‘The Cabinet of Curiosities’에 주로 진열되었다. 총 120여 개의 액세서리와 쇼피스 의상이 한 공간 안에 전시됐으 며, 매퀸의 캣워크 쇼 영상을 살펴볼 수 있는 27개의 스 크린도 설치했다. 그리고 초입에 위치해 관객들이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전시관을 ‘London’이라고 이름 붙였 다. 이 섹션은 매퀸의 초기 작업에 집중해 그가 유명해지 기 전, 특유의 드라마틱한 쇼를 위해 값비싼 소재에 투자 할 자금이 없던 시절의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컨트리뷰터와의 협업이 돋보인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큐레이터인 앤드루 볼튼을 비롯해 V&A 전시를 리디자인한 컨설턴트 프로듀서 애너 화이팅 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샘 갱스버리, 프로덕션 디자이너 조지프 버넷 등의 이름을 컨트리뷰터 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과의 협업 과정은 어땠나?
지난 시절 매퀸의 쇼를 예를 들자면 그가 표현하는 세계 를 눈앞에 그려내기 위해 프로덕션 디자이너, 스타일리스 트, 음악과 조명 감독 등이 모두 힘을 더해 매퀸의 비전이 담긴 쇼를 캣워크 위에 실재하도록 했다고 믿는다. 전시 팀은 특히 생전의 매퀸과 함께 1996년 이후 쇼 작업을 책임진 갱스버리&와이팅 프로덕션의 샘 갱스버리와 애 너 화이팅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또 매퀸의 주요 협력자였던 프로덕션 디자이너 조지프 버넷과 시노 그래피 디렉터 사이먼 케니, 스타일리스트 케이티 그랜드 를 비롯해 오리지널 전시의 큐레이터이자 이번 전시의 컨 설턴트 큐레이터로서 도움을 준 앤드루 볼튼에게도 고마 움을 전한다. V&A팀은 이번 전시 첫 준비 단계부터 매퀸 의 든든한 협력자들과 함께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했으며, 결과적으로 매퀸 스스로 규정한 놀랍도록 높은 기준에 이 번 전시 역시 부합할 수 있었다. 특히 매퀸의 스펙터클한 캣워크 쇼 장면을 구현하면서 전시를 통해 알렉산더 매퀸 의 창의적 비전에 값진 헌사를 바칠 수 있어 뿌듯하다.
6. 1997년 촬영한 알렉산더 매퀸의 포트레이트. 그의 전위적이고 거침없는 성향을 잘 보여준다. 7. 오리엔탈 무드의 자수 의상을 다각도로 감상할 수 있는 ‘Romantic Exoticismʼ 전시관. 8. 매퀸 특유의 고딕 미학을 담은 룩으로 구성된 ‘Romantic Gothicʼ 전시관. 9. 2006 F/W 시즌 ‘The Widows of Cullodenʼ 컬렉션을 통해 선보인 섬세한 튤과 레이스 장식 드레스. 사슴의 뿔을 형상화한 드라마틱한 헤드피스로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다채롭고 개성이 뚜렷한 10개의 섹션이 눈길을 끈다. 첫 관문인 ‘London’부터 ‘Savage Mind’, ‘Romantic Gothic’, ‘Romantic Primitivism’, ‘Romantic Nationalism’, ‘The Cabinet of Curiosities’, ‘Pepper’s Ghost’, ‘Romantic Exoticism’, 그리고 ‘Romantic Naturalism’을 거쳐 마지막으로 ‘Plato’s Atlantis’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 방대한 전시 대상 중 에서도 꼭 살펴봐야 할 요소가 있다면?
알렉산더 매퀸은 패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과 소통 한 불후의 아티스트였다. 그가 초기 컬렉션에서 선보인 아이코닉한 범스터(Bumster) 팬츠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엉덩이 골이 보일 정도의 극적인 로웨이스트 팬츠로 당시 사고의 틀을 깨는 전위적인 디자인을 보여줬다. 이를 통 해 아마 당신은 ‘Savage Mind’에 대해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더불어 유리와 깃털, 라피아와 나무 등 다채로운 소 재를 활용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표현은 모든 전시관의 각 작품마다 아티스트로서 그의 엄격하면서도 거침없는 미학을 보여준다.
1999 S/S 시즌, 샬롬 할로와 함께한 퍼포먼스로 유명 한 스프레이 페인트 드레스가 중앙에 배치된 ‘Cabinet of Curiosities’ 전시실이야말로 큰 감동과 열정을 안겨 준 공간이었다. 아이디어 및 구성 과정은 어땠나.
전시의 심장부와도 같은 이 전시실은 영국의 유명한 모자 디자이너 필립 트레이시나 주얼리 디자이너 숀 린 등과의 협업을 통해 드러난 매퀸 컬렉션의 다양성을 조망하는 공 간이다. 그리고 이 섹션은 유리 공예가, 메탈 작업자, 치 과보철사, 가죽 공예가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과 작업 하며 자신의 광범위한 패션 비전을 구현한 그의 정신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Cabinet of Curiosities’ 전시실 곳곳에서 모니터를 통해 쇼 영상이 상영되었는데, 패션쇼 자체가 강렬한 메 시지를 지닌 하나의 퍼포먼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퀸 이 창조한 쇼를 다시 한번 조망한 의도는 무엇이었나?
매퀸의 쇼는 항상 긴박감이 넘쳤고, 맹렬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관점이 그대로 투영되곤 했다. 사실 매 쇼마다 그의 목표는 관객의 강렬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기 존 관습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쇼는 그의 창의성을 집약해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이다. 그가 생전에 선보인 수많은 아방가르드한 인스톨레 이션은 퍼포먼스 아트와 매우 닮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갱스버리&와이팅 듀오 등 매퀸의 신뢰를 얻은 팀과 함께 매퀸의 쇼 영상을 위한 스크린을 설치해 그의 캣워크 쇼 와 유사하게 그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조성하고자 했다.
매퀸의 유명한 쇼 장면 중 하나인 케이트 모스가 유령처 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고스트 영상은 이번 전시장에도 특 별하게 재현되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암흑 속에서 나타나 작은 불빛으로 사라지는 케이트 모스의 영상을 본 후, 사람들이 ‘Amazing’이라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재현 을 위해 어떤 작업 과정이 필요했는지 궁금하다.
스펙터클한 케이트 모스의 유령 퍼포먼스는 2006 F/W 시즌 ‘The Widows of Culloden’ 컬렉션의 기념비적 피 날레였다. 19세기에 영국의 한 발명가인 헨리 더크가 고 안한 플로팅 홀로그램 기술, 즉 페퍼의 유령이라고 알려 진 3차원 홀로그램 영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매퀸은 케이트 모스를 마치 환영처럼 보이도록 스펙트럼 형태로 쇼장에 투시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통해 매퀸 쇼를 구 성한 팀이 당시의 창의적인 시도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궁극적으로 전시를 접하는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관객이 전시장을 나서며 왜 매퀸이 그의 세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디자이너인지 깨닫는 경험이 되길 바 란다.
- 에디터
- 박연경
- 런던 통신원
- 표지영(Regina Pyo)
- COURTESY
- V&A MUSEUM LONDON, ALEXANDER MCQUEEN, FIRSTVIEW, LAUREN GREENFIELD INSTIT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