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어린 판타지와 기괴한 외모로 무장한 독특한 캐릭터가 패션계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 기묘한 현상은 이 시대의 마지막 패션천재, 존 갈리아노의 귀환으로 촉발된 일이다.
놈코어라는 이름을 단, 김 빠진 콜라처럼 밍밍하고 심심한 옷들이 창궐하는 패션이 지리멸렬해질 무렵, 그가 돌아왔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수장으로 귀환한 존 갈리아노의 광기 어린 천재성이 번뜩이는, 아름답고도 기괴한 옷들은 그의 불명예스러운 퇴출처럼 서서히 사라져 간 패션 판타지의 전율을 강렬하게 소환했다. 니콜라 포미체티의 말 처럼 그건 ‘패션 오르가슴’이라 할 만했다. 한 달 후 레디투웨어 쇼에서 그는 더욱 놀라운 쇼를 펼쳤다. 스펙터클한 무대 장치 없이 옷과 캐릭터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 메종의 모델들은 갈리아노의 영원한 뮤즈인 루이자 카사티 후작부인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는데,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였던 그녀는 풍성한 모피 코트 안엔 아무것도 입지 않았으며,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끈을 단 애완동물인 치타와 함께 거리를 거닌, 벨 에포크 시대의 스타일 아이콘이었다. 마녀 같기도 하고 때론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이는 모델들은 잰걸음으로 걸어 나왔고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채 꼽추 연기를 한 모델은 파리 패션위크 최대의 신 스틸러로 떠올랐을 정도! 미처 신발 끈도 채우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구두와 주황색 고무 장갑, 보석을 박은 수영모 그리고 미치광이처럼 색색의 화장품을 눈과 입술에 칠한 메이크업 역시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든 신의 한 수였다. 이 모든 풍경은 마치 한없이 가볍고 잔인한 세상에 대한 광기 어린 분노를 담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런웨이로 옮긴 듯했다. 폭발하듯 분출된 갈리아노의 상상력과 자아를 대변하는 듯한 패션 괴짜들의 행진은 3년이라는 그의 공백을 무색하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갈리아노는 단 한 번도 평범한 적이 없었다. 입으로 자신의 미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순간 까지도. 그의 쇼는 관능적 낭만과 판타지가 넘실거렸고, 쇼장엔 언제나 그의 선구자적 재능을 찬양하거나 혹은 염탐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컴백을 앞두고 메종 마르지엘라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포스팅된 ‘새 시대가 시작 된다’는 의미심장한 멘트처럼 왕이 귀환한 패션계에 변화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만화책에나 등장할 법한 프로포션을 가진 깡마른 남자들에게 스키니 팬츠를 입혀 전 세계를 점령한 디올 옴므 시절의 에디 슬리먼, 스트리트 쿠튀르 룩으로 어깨를 하늘 높이 치솟게 한 발맹의 크리스토퍼 데카르넹, 여자들의 로망을 실현시켜준 셀린의 피비 파일로의 등장처럼 존 갈리아노는 지금 패션계의 대세를 전복시킬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 생전 아슬아슬할 만큼 돈키호테적이고 놀랄 만큼 재능이 넘친다고 평가받은 알렉산더 매퀸의 회고전도 마침 런던의 V&A 뮤지엄으로 자리를 옮겨와 패션 판타지에 대한 이슈를 재점화시키고 있다. 갈리아노의 귀환은 파격적이고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인 쇼(예를 들면, 레고로 모델의 얼굴을 뒤덮은 아기&샘이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우스꽝 스러운 비율의 옷을 선보이는 베트멩 등)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면서 이번 시즌 패션 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2015 F/W 시즌 런웨이에서 한층 흥미롭고 독특한 캐릭터들이 무대를 장악한 것을 보면 그렇지 않나! 옷을 만들며 처음으로 반짝이는 시퀸을 사용했다는 릭 오웬스는 모델들의 얼굴을 금박지와 은박지로 덮어버리는 파격적인 행보 (모델들의 성기 노출을 감행시키며 SNS를 뒤집어놓은 남성복 쇼보다는 덜 충격적이 지만!)를 이어갔고,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FKA 트위그스를 연상시키는 보헤미안 촐라걸 갱을 탄생시켰는가 하면 세련된 동시대 여성들의 전형을 보여주는 루이비통 쇼에는 하라주쿠에서 날아온 듯한 분홍색 머리의 모델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또, 성을 알 수 없는 중립 지대의 옷을 만들며 LVMH의 왕자로 등극한 남자, 조너선 앤더슨과 평행선을 그리는 구찌의 신성,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창조한 너드(Nerd) 역시 패션계의 매력적인 캐릭터로 떠올랐다. 이처럼 길들여지지 않거나 다른 색깔을 지닌 사 람들, 때론 기괴하고 엉뚱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고,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과 사랑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이번 시즌 패션 판타지가 선사하는 패션 테라피가 아닐지!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정진아
- COURTESY
- INDIGITAL, GETTY IMAGES / MULTIB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