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그램을 새롭게 각색하는 루이 비통의 프로젝트 ‘아이콘과 아이콘 재해석자(The Icon and the Iconoclasts)’에서 칼 라거펠트는 놀랍게도 권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공개했다.
The ICON and the ICONOCLASTS : Karl Lagerfeld
날려버려, 칼 라거펠트
루이 비통에 합류해 브랜드의 역사를 새롭게 써가고 있는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지난달 더블유 코리아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루이 비통에서 색다른 접근을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코드, 로고, 아이콘의 세상이다. 최근 패션에서는 로고의 중요성이 그다지 강조되진 않지만, 루이 비통의 익숙한 로고, 특히 모노그램과 다미에 캔버스가 오히려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제 스키에르의 뜻은 L과 V와 원이 모두 떨어져 상징적으로 연결된 귀고리를 비롯해 손에 말아 쥘 수 있는 말랑말랑한 클러치와 0.01% 축소 버전 하드 클러치에 이르기까지 모노그램의 다양한 재해석으로 드러났다.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루이 비통의 부회장인 델핀 아르노의 모노그램 프로젝트는 각 분야 최고의 비범하고 재능 있는 인물의 손을 빌리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선정된 인물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 산업디자이너 마크 뉴슨, 현대미술가 신디 셔먼,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인 크리스찬 루부탱, 레이 가와쿠보, 칼 라거펠트 등 총 6명. 루이 비통은 창의적인 아이콘 재해석자(Iconoclasts)들에게 각각 가방, 혹은 여행용 가방을 제작하도록 의뢰했고, 이들은 모노그램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고 대담하게 자신의 정체성이 녹아든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의 존재가 패션, 그 자체인 ‘황제’ 칼 라거펠트는 권투에서 영감을 얻어 총 5종의 가방을 제작했다. 다른 참여자들이 한두 점의 결과물을 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가짓수다. “사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접근했는데 이를 본 루이 비통 측에서 아이디어 모두를 구체화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 그렇다면 왜 권투였을까? “내 주변에서도 남녀 구분 없이 권투를 시작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권투 애호가를 위해 아주 고급스러운 스타일의 권투용품을 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펀칭 백이 들어가는 크기의 트렁크는 스타일리시한 권투 애호가가 여행을 갈 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만들었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크기의 가방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복싱장에 다니면서 쓸 수 있는 특별한 모노그램 가방을 원했기 때문에 권투 글러브를 넣어 다니면 좋을 만한 가방도 제작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유치하게 느껴질 만큼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칼 라거펠트는 사람들이 이 트렁크를 드레싱 룸에 넣어두고 옷장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했다고 한다. 이 패셔너블한 상상은 트렁크에서 펀칭 백을 꺼낸 다음 특수 제작된 금속 스탠드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는 장면과 트렁크 안에 선반을 설치하면 순식간에 멋진 옷장으로 변신하는 장면으로 구체화되었다. 트렁크를 옮길 때는 밑에 설치 가능한 이동용 바퀴를 이용해 손쉽게 집 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실제로 이 트렁크와 거대한 펀칭 백을 쓸 수 있겠느냐고? 그런 건 라거 펠트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커다란 테디 베어를 안고 자며 자신의 애완 고양이 슈페트와 노는 라거펠트는 이번 모노그램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두고 ‘키덜트족을 위한 거대한 장난감’이라고 표현했으니 말이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에 칼 라거펠트가 참여한다고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마 슈페트와 연관된 제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라거펠트는 루이 비통이 이미 슈페트를 위한 캐리어를 선보였고,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더는 관련 작업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슈페트를 주제로 한 별도의 프로젝트는 이미 상당수 진행 중인데, 이 중 올해 안에 책이 두 권 출간될 계획이고, 메이크업 라인도 준비하고 있다.
패션계의 협업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이 작업을 모두 해당 디자이너들이 직접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 양이 방대하다. 자신의 브랜드까지 총 3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사진도 찍고, 크고 작은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칼 라거펠트가 혹시라도 이번 모노그램 재해석 프로젝트에 발만 걸치고 이름만 빌려준 것이 아닐지 순수하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 전하는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디자이너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조차 항상 디자인을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그다지 휴식을 즐기는 편도 아니다(그는 하루에 4 시간 정도 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튜디오에 가면 스케치를 대신해줄 만한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즐비하지만, 나는 모든 스케치를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번 루이 비통 프로젝트에서도 늘 그렇듯,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두 손과 펜을 사용해 스케치를 직접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더없이 친숙하고 유쾌한 몸의 현상이다.”
칼 라거펠트는 루이 비통과의 프로젝트를 두고 ‘재미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있어 패션은 흥미를 자극해서 기꺼이 뛰어들게 되는 그 무언가다.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의, 권투의 펀칭 백을 닮은 이 가방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섯 작가의 결과물은 각자의 방식대로 흥미롭지만, 칼 라거펠트의 결과물 에는 즉물적으로 대상을 바라본 후 최고의 것을 쉽게 도출하는 그만의 ‘시원시원한’ 패션 해법이 유독 생생하게 살아 펄떡거리며 타자의 시선을 유혹한다. 그리하여 모노그램은 루이 비통의 시그너처에서 온 패션계의 아이콘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라거펠트뿐이다.
[칼 라거펠트의 크리에이티브 스토리 영상 바로 보기]
- 에디터
- 패션 디렉터 / 최유경
- 포토그래퍼
- COLIN DODGESON
- 모델
- 사스키아 데 브라우(Saskia de Brauw@DNA)
- 크리에이티브 디렉션
- Robert Lussier, Mia Forsgren
- 스타일리스트
- Carine Roitf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