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는 참아야 한다. 노리는 공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휘둘러야 한다. 물론 헛스윙을 할 수도 있다. 빗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안타를 칠 수 있다. 민우혁은 참았다. 그리고 지금 1루에서 2루로 뛰고 있다.
본래 야구선수였다고 했다. 운동을 하다 뮤지컬 배우가 됐다는 게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다. 동료들이 거울 보면서 스윙 연습을 하는데 나는 H.O.T나 젝스키스 춤을 따라 하고 있었다.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보다는 앨범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러니까 민우혁에게는 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끼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도 컸다. 그라운드는 무대 같았고, 큰 환호와 열광을 받고 싶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시절 거의 2년간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겪게 됐고, 한 프로구단의 제안으로 제주도에서 재활 훈련을 하던 중 발목 인대가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깁스를 한 채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영등포에서 월세 15만원짜리 고시원방을 잡고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될까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서성이던 민우혁은 모델 학원 오디션 공고를 발견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너무 뚱뚱해서라고 했다. 두 달 동안 이를 악물고 살을 뺐다. 108kg에서 35kg을 줄였다. 결국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리고 우연히 노래할 기회를 잡았다. 2003년 방영한 드라마 <요조숙녀>의 OST에 참여했다.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나 긴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무명 시절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하기 싫었다. ‘차라리 야구를 할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러다 문득 친한 친구 어머니가 연극배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부탁했다. 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아침마다 찾아가 연기를 배웠다. 물론 그때에도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인생이란 뒤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내다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 과거를 아는 분들은 뮤지컬을 하려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배운 거라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시절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민우혁의 어제는 지나갔다. 그는 지금 무대에 올라 내일을 본다. 진짜 청사진이다.
올해에만 <레미제라블> <위키드> 무대에 섰고, <아이다>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봉황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결승전에 올라가는 기분이랄까(웃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자꾸 상을 차려주는 느낌이다.
물론 길 가다 동전 줍듯이 얻은 기회는 아님을 안다. 대작 뮤지컬에 연이어 출연하는 만큼 오디션의 치열함도 더욱 크게 느낀 한 해가 아니었을까?
소위 A급이라 꼽히는, 대극장 뮤지컬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위압감을 느낀다. 그런데 최종 오디션 명단에서 내 이름이 그런 이름과 함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어느 프로구단 테스트를 보러 갔는데 류현진이랑 같이 서 있는 느낌?(웃음) 그래서 마음을 많이 비웠다. 목표는 단 하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자. 캐스팅이 안 돼도 다음에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때 민우혁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고, 그러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캐스팅됐다.
그러니까!(웃음) <아이다> 오디션은 <레미제라블> 공연할 때 진행됐는데 사실 그때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일주일간 공연을 못했다. 심지어 성대결절까지 온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아이다> 2차 오디션까지 겹쳤다. 그래서 결국 오디션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했는데, 감독님이 감안하고 보시겠다며 걸을 수만 있으면 오라는 거다. 그래서 일단 병원부터 갔다. 성대결절이라도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해서. 그리고 다음 날 목발을 짚고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3차 오디션에선 깁스를 풀었다. 절뚝거리더라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보고 오리지널 연출자인 키이스 배튼이 엄지를 척 들더라(웃음).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이집트 장군인데 상당히 남성적인 캐릭터다.
그래서 강인한 장군 역을 맡기엔 얼굴이 너무 선하고 어려 보인다는 지적도 받았다. 심지어 라다메스가 열여섯 살이라 해서 최대한 어려 보이면 좋을 것 같아 앞머리도 내리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3차 오디션 현장에 갔다가 그게 독이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오디션이 몇 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 바로 미용실을 찾아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새로 사 입었다. 그랬더니 키이스 배튼이 다시 엄지를 척. 덕분에 자신감이 확 올라와서 인대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오디션에 열중했다. 그래서 캐스팅된 게 아닐까 싶다.
라다메스 역에 더블 캐스팅된 김우형은 2010년에 공연한 <아이다>에서도 라다메스를 연기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비교될 텐데 긴장되지 않나?
사실 오늘도 우형이 형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하루 종일 감탄하다 왔다. 원래 열정이 과해서 빡세게 연습하는 편인데 우형이 형은 더한다. 마치 처음 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 와중에 나를 잘 챙겨준다. 보통 더블 캐스팅되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정말 나한테 다 퍼준다. 덕분에 든든하다. 몸은 힘들지만 너무 행복하다. 우형이 형을 보면서 저런 선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위키드>에서 연기한 피에로와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삼각관계에 빠져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캐릭터마다 감정을 느끼는 원인이 다르니까 피에로의 감정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심지어 내 관점에서의 감정도 최대한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 다가가면 <위키드>의 피에로나 <아이다>의 라다메스나 비슷해 보일 것 같아서 라다메스가 왜 아이다를 사랑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피에로는 요즘 말로 ‘금수저’라 방탕하고 사치스럽지만 내면에는 공허함이 가득한 인물이다.
피에로가 지독하게 외로운 캐릭터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에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방탕한 생활로 감추는데 엘파바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 드러낸다. 그래서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는 게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솔직히 금수저 물고 태어난 왕자인 피에로가 초록색 마녀인 엘파바를 사랑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본을 열심히 봤는데 피에로 입장에선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러다 엘파바를 보기 시작하면서 피에로의 감정이 보였다. 왜냐면 나도 어렸을 때 피에로처럼 외로운 감정을 위장하며 살았으니까. 그런 외로움을 이해하니 피에로를 연기하는 게 수월해졌다.
본인은 어떤 외로움을 감춰온 건가?
10년 동안 야구를 하면서 감정을 위장하는 데 익숙해졌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니까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는데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천연덕스럽게 잘 숨겼다. 본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길들여지니까 누구에게도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속 얘기를 털어놓으며 울어본 기억도 없고. 그런데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공연할 때 처음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경험을 했다.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는 실화 바탕의 야구 뮤지컬이라 소재 면에서 익숙했을 것 같은데, 감정이 폭발했다는 의미는 뭘까?
전 국민이 다 아는 이승엽과 함께 청소년 대표팀에서 함께 뛴 김건덕이라는 선수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인데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신에서 도저히 못 울겠더라.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울어야 하는데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첫 공연 때 완전히 몰입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 신 진행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사실 그때 너무 행복했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고, 이런 감정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게 느껴져서.
선수 시절 포지션이?
투수였다.
투수는 경기를 책임지는 포지션이다. 무대에 서면 비슷한 책임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 같다.
맞다. 그리고 배우는 인내심이 필요한 직업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좇으면 눈앞에 좋은 배역이 없을 때 무너지기 쉽다. 꾸준히 어떤 역할이라도 열심히 해야 기회가 찾아오는 거 같다. 운동을 한 덕분에 기본적인 인내심을 배운 것 같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TV나 영화에서도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종종 피력했다.
무대에서의 연기가 좋고 관객들로부터 전해지는 리액션이 좋아서 공연을 좋아하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이 늘면서 TV 드라마나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이젠 노래보다는 연기에 더 관심이 많아졌나 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간혹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이 떨어져도 그 노래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한다. 결국 좋은 배우가 되려면 노래 실력만으로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피아노를 쳐가면서 노래 연습을 했는데 지금은 가사를 한 번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올해 11월부터 내년 3월까지 <아이다> 무대에 서야 한다. 긴 시간 동안 무대에 오르려면 자기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텐데.
공연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생활 자체가 없다. 공연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고, 쉴 때에는 말도 줄인다. 예전에 주인공은 무대에서 절대 ‘삑사리’ 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때는 우스갯소리처럼 여겼지만 이젠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비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입장에서 삑사리를 듣고 몰입이 깨져서 티켓값을 아깝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한다.
실투 한 번에 홈런을 맞을 수 있으니까.
맞다. 바로 그거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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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YU KYUNG YOON
- 글
- 민용준(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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