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1950년대 레이디가 부활한 캣워크를 바라보며 ‘클래식’이란 글자를 가슴에 아로새긴 에디터들. 클래식 하나에 우아함과 열정, 그리고 영원한 스타일을 떠올리는 그들이 저마다 클래식이 빚은 꿈을 이야기했다.
영화 속 결정적 순간
얼마 전, 뒤늦게 영화 <하녀>를 봤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내 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바로 전도연이 입은 화이트 셔츠였다. 단정한 칼라, 둥그렇게 내려와 가냘픈 몸을 강조하는 어깨선, 그리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소재감. 그야말로 클래식한 드림 셔츠, 그 자체였다. <하녀>는 내게 화이트 셔츠에 대한 로망을 키운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영화가 된 셈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랑에 빠진 스파이>의 마를렌 디트리히의 시가렛팬츠와 얇은 가죽 벨트는 지금 당장 클로에의 런웨이에 올린다 해도 기립박수를 받을 만한 룩이다. 고급스러운 스웨트 셔츠의 아름다움은 <캔디드>의 제인 폰다를 통해 배웠고(뾰족한 펌프스 역시 마찬가지), 글렌 체크 셔츠와 짧은 팬츠로 근사한 리조트 룩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린맨션>의 오드리 헵번을 통해 알았다. 진주 목걸이가 ‘목’에 걸려 있으면 더없이 정숙하지만, 허벅지 즈음에 느슨히 걸쳐져 있으면 페로몬 대폭발이라는 것을 알려준 로미 슈나이더의 <중요한 건 사랑한다는거야>, 구닥다리 퍼코트의 캐주얼한 쓰임새를 보여준 귀네스 팰트로의 <로열 탄넨바움>, 빈티지풍의 롱드레스와 플랫슈즈의 청순한 조합이 압권이었던 위노나 라이더의 <리얼리티 바이츠>, 잠시 가라앉았던 스쿨걸 룩 로망에 다시 불을 지핀 캐리 멀리건의 <언에듀케이션>, 이브닝 룩의 완성은 주얼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한 줄리 앤 무어의 <싱글맨>…. 이 영화들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단언할 수 있는것은 30년쯤 흘러 다시 본다 해도, 여전히 이 아이템들은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나이와 관계없이 입고 싶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클래식’이다. -에디터 박연경-
클래식을 입는 브랜드
“이번 시즌의 트렌드는 클래식이다”라는 말은 어쩐지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하다. 클래식은 계절이 채 바뀌기도 전에 덧없이 사라지는 트렌드와는 비교 불가의 존재가 아닌가. 어리석게도 한참의 외유 끝에다시 찾은 클래식은 ‘새로움’이 주는 일회성 자극에 지친 우리를 조강지처마냥 넉넉히 감싸안는다. 어쩐지 요즘은 부쩍 수십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브랜드의 히스토리 북을 들추는 일이 잦아졌다.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는 관용구가 이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내겐 2010 F/W 광고보다 시간의 때가 묻은 사진이 훨씬 세련되고 아름답다. 광고 비주얼이 쇼핑의 욕망을 자극한다면 브랜드북은 패션의 영감을 일깨운다. 일례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전시된 샤넬의 아카이브 피스를 담은 책, 은 지극히 동시대적이다. 진주 목걸이, 바로크 양식 주얼리, 카멜리아, 트위드 수트 수십 년간 여자들의 로망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영원불멸의 클래식 아이템들. 북은 또 어떤가. 지난30년을 집대성한 이 책의 절정은 1978년 이래 미우치아 프라다가 선보여온 스커트를 식물도감처럼 아름답게 보여준 페이지. 또한 북은 1920년대 테니스 선수의 세련된 룩을 통해 럭스 스포티브룩의 정수를 보여주며, 북은 지극히 미국적인 아이콘을 통해 아메리카니즘을 은유적으로 역설한다. 또한 상류층 대가족의 일상을 담아낸 토즈의 북, 발렌티노가 남긴 전설적인 레드 드레스의 변천사를 읊은 북 역시 영감의 보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책. 어쩐지 나는 이 책들을 통해 유행의 거센 견제 속에서도 살아남은 영광의 얼굴들을 본 기분이다. 유통기한이 없는 오리지널의 힘. 그것이 바로 클래식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에디터 송선민-
길 위의 클래식
‘스트리트 패션’이 하이패션의 반대선상에 선, 거리 문화의 일부로 인식되던‘시절’도 벌써 옛날 일이다. 처음엔 궁금해서, 그러곤 팁을 얻으려고, 결국 영감을 얻는 도구로 활용하게 되어버린, 스트리트 패션 블로거들 덕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겨 찾는 건, 아무래도 1세대 블로거인 사토리얼리스트의 스콧 슈먼과 그의 여자친구 가랑스 도레. 특유의 취향과 시선이 마음에 들어서인데, 옷장 앞에서 왠지 고민스러운 아침에도 유용하지만, 무엇보다‘지금’을 살아가는 진짜 여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단정한 하이웨이스트 스커트 위에 오프 숄더 톱을 입고 밀리터리 재킷을 걸친 소녀의 맨해튼식 태도, 살구색 실크 블라우스와 사파리 쇼츠를 매치하고 프린트 스카프를 터번처럼 두른 이탤리언의 익살, 단정한 미니 사각 숄더백을 들고 손가락엔 그로테스크하고도 예술적인 반지를 매치하는 방식까지, 이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서‘진짜’는 스타일링보다 이 여자들 자체라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진다. 소녀들이 에르메스 스카프를 각자의 방식대로 스타일링한 비주얼이 담긴 에르메스‘젬 몽 까레’의 비주얼 역시 비슷하다. 이 사진들 속엔 기존의 것, 새로운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 무엇이든 상관없는 사람들, 남의 인생에 기웃대거나, 누군가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줄 아는 사람들, 비틀어 입은 줄로만 알았더니 바로 이것이 클래식을 입는 방법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들이 있다. -에디터 최서연-
영원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다
너무나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클래식 아이콘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30대가 되어서다. 패션 트렌드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변치 않는 무언가를 지닌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갑지다는 것을. 그래서 여기 지루한 클래식 스타일이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클래식 스타일로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기의 여인들을 모았다. 지금 그녀가 거리를 활보한다 해도 더 이상 쿨할 수 없는, 과감하면서도 클래식한 비앙카 재거, 극도로 세련된 모던한 여성상을 보여줬던 로렌 바콜-그녀가 디올 컬렉션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땐 정말 근사했다-, 우아하면서도 글래머러스한 스타일의 아름다운 로미 슈나이더, 심플하면서도 귀족적인 클래식을 보여준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 화려하고 글래머러스하지만 늘 우아했던 다이애나 비, 간결한 니트와 스커트만으로도 빛나 보였던 진 슈림턴,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지적이고 세련된 샬롯 램플링, 흑인 가수로서는 드물게 우아한 클래식을 선보였던 다이애나 로스까지. 또 지면상 사진을 실을 수 없어 안타까운 우아하면서도 요정 같은 오드리 헵번, 미니멀 시크를 보여준 캐롤라인 비셋 케네디, 레이스 풀 스커트 수트도 여성스럽고 고아하게 연출한 그레이스 켈리, 너무 앞서가는 여자였던 마를렌 디트리히, 깡마른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미니 드레스도 자신있게 입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의 제인 버킨까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지닌 그녀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스타일이자 패션이며 삶이다. -에디터 김석원-
감성과 열정의 클래식 뮤즈
클래식 하면 프랑스 여자들이 떠오른다. 특히 프랑스의 지성과 열정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와 예술가들은 클래식 룩을 지적으로 소화해낸 또 하나의 스타일 뮤즈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화이트 셔츠를 입었을 때 발현되는 ‘지성미’는 레이스 원피스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레오퍼드 퍼 코트에 진주 목걸이를 한 사강이 코코 샤넬보다 더 매혹적이며, 사브리나 팬츠에 플랫슈즈를 신은 사강은 오드리 헵번보다 더 파우더리한 감성을 풍긴다. 오버사이즈 코트를 입었을 때, 체크 셔츠에 니트 스웨터를 레이어드하고 플랫슈즈를 신은 채 바닥에 철썩 앉아 있을때 그녀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클래식의 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랑스의 행동하는 지성인 시몬드 보부아르는 자주적이고 강인하지만, 동시에 여자만의 아름다움을 지킬 줄 아는 여성이었다. 화려한주얼리에 클래식한 사각 백을 든 그녀의 모습은 권위 있는 우아함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나. 한편 오늘날 퍼포먼스의 장이 되어버린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 애쓰는 여느 가수들과는 달리, 에디트 피아프는 무대 위에 자신으로서 오롯이 존재했다. 그다지 큰 키도 훌륭한 몸매도 아니지만 그녀는 늘 몸매가 드러나며 실루엣이 강조된 클래식한 원피스를 선호했고, 목소리에 밴 아련하고 짙은 향수만으로도 그녀는 관능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고 보면 단순하고 기본적인,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간 여자들에 의해 수도 없이 선택되고 사랑받았기에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아이템들이야말로 내적인 멋을 지닌 여자들에 의해 진짜 그 가치를 찾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클래식한 아이템을 멋스럽게 소화하는 방법 역시 다름 아닌 각자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에디터 박연경-
빈티지 광고에서 엿본 클래식
50년대를 주제로 화보 촬영 시안을 찾다 타셴의 <20세기 패션(20th Century Fashion)>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이번 시즌 룩들이1940~50년대의 광고 비주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긴 하다. 이번 시즌 클래식 트렌드를 대표하는 마크 제이콥스가 50년대 여인을 표현했다고 했으니까. 이것이 바로 그 참고 문헌이지 않을까. 컬러어필리어트 사 광고 비주얼의 허수아비를 보라. 칼라의 크기와 주머니의 위치, 코트의 실루엣과 길이까지, 그가 이 책을 보고 이번 시즌 컬렉션을 만든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빼다 박았다. 여기에 퍼 트리밍이나 체인, 스팽글 장식의 토트백을 매치하여 도시적인 느낌을 가미하는 것으로 50년대 리얼빈티지룩에서 벗어난 정도. 브라운 슈즈 광고 비주얼의 소녀는 루이 비통의 여자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정확히 꼬집어 제시카 밀러가 입은 니트 톱과 체크 풀 스커트 룩 말이다. 대신 니트 톱을 몸에 딱 피트되도록하여 실루엣을 더 살리고 칼라를 퍼로 장식해 세련되게 풀어낸 것 정도가 디자이너의 몫이었을 정도로 고전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댄 리버 워시 코튼 사에서 선보인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광고비주얼에서는 앞코가 뾰족한 여자들의 슈즈에 시선이 멈춘다. 이는 프라다가 선보인 여성스러운 리본장식 슈즈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 광고 비주얼들은 정확히 1950년과 1951년에 제작된 것이니, 이처럼 아카이브에 충실한 컬렉션도 없지 않을까. 이처럼 클래식이란 말은‘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을 증명하는 단어이자 할머니의 옷장을 보는 듯하여 반갑고 이를 통해 현재를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지닌 불멸의 주제다. -에디터 김한슬-
- 에디터
- 박연경
- 포토그래퍼
- 서원기, GETTY IMAGE/MULTIBITS, COURTESY OF HERMES, SATORIALIST, GARANCEDORE,
- 기타
- photo: COURTESY OF LIFE, 20TH CENTURY FASHOIN, TOMMY HILFIGER, LACOSTE, CHANEL, TOD’S, VALENTINO, PR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