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즐기는 자를 이기지는 못한다고 했다. 2위를 했다는 사실까지도 즐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씨잼이 결코 패자가 아닌 것처럼.
“꿈을 향해 절박하게 다가가는 걸 안 좋아해요. 20분 전에 주문한 커피처럼 느긋하게 성공이 나에게 오길 기다리죠.” 씨잼이 뭔가 달라 보인 이유는 그와 대화를 하며 선명해졌다. 심사위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경연에 참여하는 그에게 넘치는 것은 여유, 부족한 건 절실함이었다.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충분히 많기 때문에 댓글은 읽지 않는다는 씨잼이지만 그 주변의 누군가는, 경연이 아니라 공연을 하는 것 같다며 팡팡 터진 댓글들의 불꽃놀이를 분명 전해줬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부터의 친구인 비와이와 배틀을 할 때는 자신이 랩과 라임을 가르친 학생일 뿐이라고 디스했어도, 실은 그의 우승에 분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쇼미더머니> 시즌 3에서 톱 4까지 올라간 자신보다는 언더독이었던 비와이가 우승을 차지하는 결말이 더 근사한 서사를 완성한다며.
“내 졸업 사진 검색해봐 지금/ 일단 웃고 나서 들어봐 I was not different/ 너도 할 수 있어 진짜 이 태도가 lottery” 스스로 평범했고 얼굴 빨개질 흑역사가 많다고 말하지만 씨잼은 과거에 연연해 할 시간에 지금 다르게 사는 방식을 연구한다. 인터뷰 내내 그는 세스 고딘의 <린치핀>이라는 책을 여러 번 인용했다.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에서 유래해 꼭 필요한 중심 인물을 은유하는 린치핀은 그가 속한 레이블 저스트뮤직의 법인 등록명이기도 하다. 기계장치의 고만고만한 부속품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핵심이 되는 방법은, 씨잼이 믿기로는 아마 어떤 재능보다는 커다란 꿈을 자세하게 꾸는 능력, 그리고 어떤 태도 같았다.
<W Korea> 졸업 사진을 검색해보고 웃으라는 가사가 재밌었다. ‘흑역사’를 누군가가 발굴하기 전에 스스로 털어놓고 가벼워지는 태도가 산뜻했다고나 할까.
씨잼 과거에는 연연하지 않는 게 건강한 거 같다. 지금의 내 모습도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 과거는 더 그렇지 않겠나. 요즘은 3일만 지나도 과거로 친다.
음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여자, 부, 명예’라고 했다. <쇼미더머니 5>(이하 <쇼미>) 이후 거기 가까이 다가가고 있나?
그런 것 같다. 이렇게 뻔뻔하게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건 오래전부터다. 5~6년 전 메모장에 혼자 적어보던 미래가 지금 과거의 같다. 그때의 시나리오대로 살면서 이제 더 뻔뻔하고 당당한 꿈을 키우고 있다.
그런 낙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커다란 꿈을 아주 자세히 꾸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어 어릴 때는 할리우드 여배우와 스캔들을 내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꿨는데, 그 여자를 처음 만나는 장소가 어떤 파티인가까지 상세하게 정해놓는 식이다. 실패하는 상황 역시 이미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인정하기 때문에 계속 긍정적일 수 있을 거다. 절실하게 매달리기보다는 성공을 20분 전에 주문한 커피처럼. 당연히 나한테 올 것처럼 기다린다. 어쩌면 키가 작은 내가 나보다 훨씬 키가 큰 여자를 많이 만나 온 비결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지금은 어떤 연애를 하고 있나?
헤어진 지 4개월 정도 됐다. 연애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한번 사귀면 오래 만나는 편이다. 그래서 솔로가 되면 혼자인 시간을 최대한 놔두는 편이다. 외로워서 누구를 빈자리에 채우는 건 싫어한다. 딱히 외롭지도 않고.
음악 하는 사람들은 외로운 시간이 창작에 필요하다는 얘기도 하더라.
모든 경험이 다 필요하긴 할 거다. 연애할 때는 헤어질 때의 감정을 가사로 쓰는 일이 힘들었다. 헤어지니까 자연히 그런 영감이 나오는 것 같다. 이전에는 나쁜 여자한테 당하는 가사를 쓰는 피처링이 들어왔는데 거절했다. 그런 경험이 없어서 못 쓰겠더라.
겪지 않은 일을 상상해서 쓸 수는 없나?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걸 더 좋아하고, 그러려고 한다. 그 사람이 치열하게 겪고 쓴 한 문장 한 문장일수록 카리스마 있게 다가온다. 예술은 개인적인 것, 하지만 핸드폰 안에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김광석 씨 가사는 얼마나 개인적인가. 노래들이 점차 내밀함을 잃은 시기는 대형 기획사에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뮤지션들이 늘어난 순간부터, 그리고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부터인 것 같다. 댓글이 너무 많아지니 창작자들이 솔직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댓글을 전혀 안 보나?
주변 아티스트들한테 평가를 듣고 스스로 곱씹는 부분이 더 크다. 음악 잘하는 형들한테 둘러싸여 살고 있기 때문에 댓글이 아니어도 도움되는 메시지를 줄 사람이 이미 충분히 많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멘탈이 약한 사람들은 댓글을 읽고, 또 상처도 받곤 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우선 나의 행복이다. 모두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기 행동을 결정하면서도 타인의 시선이 기준인 사람이 무척 많다. ‘하고 싶은가, 아닌가’보다 ‘해도 될까 말까’를 신경 쓰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러시아에 “뻔뻔함은 제2의 행복”이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의 이런 태도를 훔치고 싶은 사람들은 훔쳐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책의 구절이나 속담을 인용하는 걸 보면 아포리즘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도움되는 메시지들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아디다스 슈퍼스타 신발을 사면 박스 안에 종이가 있는데 여러 가지 문구가 쓰여 있다. 그게 내 인생 나침반 중의 하나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나는 인정받기 위해 하지 않는다. 나는 라이크 숫자를 위해 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하지 않는다. 나는 슈퍼스타다.” 이런 모든 것은 내가 나한테 허락해 주는 것 같다. 행복도, 내가 멋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스스로에게 허락해줘야 한다. 나는 멋있어 난 섹시해 최고야, 그렇게 허락해줘야 하는 것 같다. 법을 어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며 살고 싶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다듬을 여유가 없다. 일상을 영위하는 일만으로도 고단하니까.
사실 나도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 나가거나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기회가 더 주어진 거겠지. 하루에 6시간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
작년에 음악을 일처럼 생각하면서 내 창의력이 닫혔다. 그때 낸 앨범에게는 미안하다. 할 수 있었던 걸 다 못 해준 것 같아서. 1년 동안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며 말도 안 되는 열등감에 휩싸였다. 랩을 할 때 스킬이나 기술에만 매달리고, 연주는 잘하지만 어떤 감정도 표정도 없었다. 그러다가 느꼈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내가 내 이름을 챔피언 벨트처럼 무겁게 생각하면서 이걸 잃기 싫어서 까불고 있구나. 그때 내가 음식이었으면 냄새났을 거다. 썩어가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어떻게 벗어났나?
우연히 <주먹이 운다>라는 프로에서 근자감 파이터라는 사람을 봤는데, 되게 멋지더라. 행복의 열쇠를 찾았다. 사람이 자신감이 있으려면 근거가 없어야 하는 거였다. 일단 아무 근거 없이 나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거다.
회복하고 나서의 모습이 <쇼미>에서의 당신인가 보다. 초창기부터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는데 예상했나?
나랑 비와이가 둘 다 나가기로 결정한 순간 이미 결승에서 만날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안 된다 해도 화날 것 같진 않았지만.
지난달 더블유와의 인터뷰에서 비와이는 당신이 많이 이끌어줬다고 말했다.
더 이상 서로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뭔가 내가 6개월 정도 형인 느낌이 있다. 내려본다는 뜻이 아니라 성장을 목격하면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는 뜻이다. 리더로서 내 크루가, 내가 이름을 지어준 존재가 이만큼 큰 걸 보니까. 이렇게 자랑스러워서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 나라는 사람이 더 멋있어지는 것 같다. 내가 가까운 누군가를 조금 흔든다면,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을 조금 바꿨다면, 누군가에게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런 게 정말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비와이가 당신에 대해 ‘영혼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한 걸 보면 과연 낭만적이다.
원래 서로 더 오그라드는 사이였다. 같이 편지 읽으면서 울기도 했으니까. 낭만이란 말을 가장 좋아해서 내 좌우명이기도 하고, 뭔가 선택할 때 가장 큰 가치관이 되는 기준이다. 손등에 ‘로맨티스트’라는 타투도 있다. 누군가에게 낭만적인 순간을 선사하는 걸 좋아한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도 그 사람의 일상에서 어떤 포인트가 될 수 있는 말을 건네거나, 괜히 떠오를 만한 질문을 갑자기 던진다든지.
음악을 통해서는 익명의 많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부분이겠다. 낭만적인 순간을 선사한다는 행위 말이다.
그래서 내 음악을 너무 사랑한다. 하지만 가사에서는 더 멍청하게 구는 거 같다. 내가 힙합에 매료된 이유는 똑똑한 척하지 않아서였다. 반항적이고 조금 더 다이렉트하고 거칠어서, 힙합이 좋았다.
표현은 소박해도 거기 담긴 생각은 똑똑할 수 있는 것 같다.
에이셉라키가 ‘인생은 음악, 여자, 그리고 맥주만 있으면 된다’고 노래할 때 그 사람이 맨날 그렇게 산다는 뜻이 아니지 않나. 철학적인 가사를 그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게 진짜 멋있는 거 같다.
<쇼미더머니>를 거친 사람들을 만나 보면, 경연 상황의 압박이 심하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하더라.
시간이 너무 짧아서 갑갑했다. 케이지에 갇혀 뛰는 메뚜기 같았다. 똑같은 높이를 뛰더라도 초원에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그런 느낌이다. 부딪치지 않을 수도 있는 규제와 룰이지만 그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할까.
‘악마의 편집’은 어땠나?
프로그램에 나갈 때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편집도 상관없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다 필요 없으니 무조건 많이 나오게만 해달라고. 여기 악마가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많이 떠들게만 해달라고. 그런데 방송을 보니 비와이가 많이 나왔다(웃음). 비와이 분량만큼 나왔다면 내가 우승했을 거다.
우승하지 못한 게 아쉽나?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비와이가 주인공 같은 느낌으로 올라가는 게 더 바람직해 보였다. 나는 시즌3에서 톱 4까지 올라갔는데 존재감이나 매력이 없었고, 비와이는 시즌 4의 1대1 배틀에서 안타깝게 떨어졌으니까. 끝까지 올라가는 걸 보며 응원하는 맛이 더 나는 캐릭터였다. 비와이가 김두한이라면 나는 시라소니랄까. 가끔 나타나서 발차기 좀 멋있게 하고.
최고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된 당신의 2차 오디션은 정말 그렇게 보였다.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 확신이 있지만 그걸 폭력적으로 드러내진 않을 거다, 이런 마음으로 무대를 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무대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승은 못했지만 여유로운 캐릭터, 재치 있는 느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아쉬움이 없다.
몇 년 후의 목표에 대해서는 어떤 상상을 갖고 있나?
월드와이드가 되고 싶다. 내가 나가고 싶을 때 원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도 여전히 지금 같은 태도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 내가 진짜 좋아하고 존경한 신해철 선생님처럼.
그러고 보니 신해철 씨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요즘은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너무 큰 것 같다. 유튜브에서 가서 이런저런 영상을 지금도 많이 본다.
힙합이 아닌 가요도 듣나?
최근에는 김성재의 ‘말하자면’이 너무 좋다. 김광석에 막 빠져들었을 때는 노래를 아껴서 들었다. 이 노래를 처음 듣는 기분을 하루 만에 다 누리기 싫어서 하루에 세 개씩만. 그분도 굉장한 사람 같다. 음악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는 그런 느낌은 아니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 늘 나를 위해서 살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분명히 대한민국은 많이 억압되어 있는 것 같다. ‘해도 된다’ 정신이 필요하다.
다들 ‘하면 된다’를 이야기하는데 ‘해도 된다’의 정신이라니, 새롭다.
실패해도 되고, 엉뚱한 짓을 해도 되고, 좀 달라도 된다. 자기가 재밌는 것을 하며 즐겁게 살면 누군가에게 나쁜 댓글을 쓰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최근에 1위를 한 ‘퍼즐’이라는 노래에서는 내 스스로를 놈팽이라고 나를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내 페이데이에는 지갑 잃어버릴 때까지 술을 마신다’고. 이런 것이 바로 ‘해도 된다’의 예가 아닐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
머리를 며칠쯤 안 감아도 되는 것처럼? 물론. 대신 나보다 키 큰 사람과 포옹만 안 하면 된다.
- 에디터
- 황선우
- 패션 에디터
- 정환욱
- 포토그래퍼
- YOO YOUNG KYU
- 스타일리스트
- 김욱
- 메이크업
- 박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