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무덥던 지난 금요일 밤,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올해로 4주년이 된 CFDK(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는 디자이너 송지오를 새로운 수장으로 맞이하며 디자이너 패션산업 발전기금 마련을 위한 ‘CFDK Night’를 개최했다. 올해 디자이너 인생 30주년을 맞은 송지오 신임 회장을 만나 한국 패션의 현재와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물었다.
<W Korea>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한국패션디자이너 연합회(CFDK) 3대 회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 우선 더블유 독자들을 위해 CFDK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송지오 고맙다. 현재 한국에는 여러 패션 디자이너 그룹이 있는데, 사실 과거에는 각 협회 간의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서울패션위크를 주최하는 서울시에서 하나로 통합해달라고 요청해왔고, 4년 전에 통합 그룹 사단법인으로 CFDK가 탄생하게 됐다. 현재 회원은 340여 명에 달한다. 미국의 CFDA가 420명 정도임과 비교하면 한국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웃음).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사실 2개월 전까지만 해도 난 CFDK의 회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서울 컬렉션을 진행해왔고 말이다. 그러던 중 1년 전부터 협회장을 맡아달라는 여러 사람의 요청을 받았다. 계속 사양하다가 20~30대 젊은 디자이너들의 응원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패션산업이 너무나 어렵기에 무일푼에 끝도 안 보이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의 과거를 보는 듯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게 수락의 이유였다. 물론 회원도 아니었던 사람이 무슨 회장이냐는 식의 비판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사실 협회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친구들은 협회나 선배들이 든든한 둥지를 만들어 서포트해주길 원했고, 협회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혁신적으로 새롭게 출범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하게 됐다.
협회를 이끌며 가장 주안점을 둘 부분은 무엇인가.
분명한 목표를 세웠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We are the K-Fashion’. 식상하지만 잊고 있는 것을 일깨우고 싶었다. 디자이너들이 무너지면 ‘K-패션’도 없기에, 우리 스스로 사명감과 프라이드를 갖기 위해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국내 패션산업의 환경은 창의성보다는 비즈니스 위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매 시즌 뉴 룩을 위해서 온 힘을 쏟고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크리에이터’니까.
한국 패션산업을 위해 신진 디자이너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도울 수 있을까.
우선, 신진 디자이너들이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열악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정말 몇 되지 않기에. 최근 몇 년 동안 문화관광부에서 젊은 디자이너를 뽑아 해외 페어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자금을 주는 지원 사업도 벌이지만, 정작 중요한 건 한국에서 먼저 우리 방식의 컬렉션과 페어를 완성도 있게 잘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 중인 게 있는데, 내년 3월부터는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춘 혁신적인 행사를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서울 컬렉션을 보면 젊은 층을 타킷으로 한 스트리트 패션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 이런 현상이 한국 패션을 정체시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는데, 이 역시 열악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오는 문제가 아닐까.
정확한 지적이다. 무엇보다 이럴 수밖에 없는 시장의 현실이 문제인데, 젊고 캐주얼하게만 포커스를 맞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해외에서 온 관계자들이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느낄 순 있지만 그 퀄리티를 생각해봐라. 지난 몇십 년을 쿠튀르부터 여러 빅 하우스의 쇼를 봐오던 프레스와 바이어 등 패션 전문가들이 봤을 때, 한국 패션이 이렇게 단편적으로 보이는 것은 좋은 흐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 컬렉션이 겨우 40여 개의 쇼 정도로 이뤄지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훨씬 많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디자이너들은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젊은 디자이너들이 모여 종종 “이런 건 안 팔리니까 티셔츠나 후드나 만들자”라는 대화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특히 창작 열의가 충만한 젊은 시절에 기량을 쌓아놓아야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 가장 강렬할 때 크리에이티브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그걸 바로 컬렉션에서 보여줘야 하는 거다. 그렇다고 팔리건 안 팔리건 무조건 창의적인 걸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티셔츠를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크리에이티브해야 하니까 옛날 디올 드레스처럼 만들어라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다만 길게 봤을 때 한국 패션산업이 그렇게 머문다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디자이너 브랜드라는 퀄리티를 보일 수 있도록 균형은 유지해야 한다. 창의성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균형을 맞추고, 다시 투자해서 새로운 걸 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면 결국 그 뜻이 전달될 거라고 생각한다.
협회를 이끌어가는 이사진이 곽현주, 김규식, 김수진, 명유석, 송승렬, 신재희, 장광효, 홍은주 같은 다양한 연령대의 디자이너로 구성된 것이 흥미롭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이사 회의를 진행하는데 굉장히 재밌다. 젊은 이사들이 대거 기용된 이유는 그 나잇대 회원들이 많기에 그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서다. 일례로 명유석, 김수진, 신재희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발언을 많이 하는데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
조금 전 패션을 한국의 중요한 문화산업이라고 정의했다. 국내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이 계속 활발해지고 있는데, 일찍이 해외에 진출한 디자이너 선배로서 어떻게 바라보나?
요즘은 지구의 모든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서울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한 러시아와 스웨덴의 브랜드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좁은 한국 시장에서 브랜드는 계속 포화 상태가 되다 보니 아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디자이너들은 도태된다. 그래서 더더욱 해외로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시장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국가와 기업에서 인정해야 한다. 단순한 지원금이 아닌, 대기업에서 한국 디자이너 산업 육성을 위해 시장을 만들어주고 구매해줘야 하는 것이다. 서울 컬렉션 후에 산업으로 통하는 그다음 연결 고리가 없기에 정부 차원에서 산업의 규모와 형태를 조성해야 한다.
30년 가까이 디자이너로 활동해오며 영감과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하다.
최근 신선한 영감을 받는 것이 생겼다. 나는 원래 1800년대를 좋아해서 보통 영화나 책을 보다가 쇼 콘셉트를 잡고는 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동안 보지 않던 TV를 보게 됐다. 처음엔 골프 채널만 보다가 채널을 돌리며 예전에는 관심이 별로 없던 채널도 보게 됐다. 어느새 하루에 수십 개를 보고 있더라.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라고 물으면 “100개의 채널에서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웃음).
마지막으로 신진 디자이너들과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한마디 건넨다면?
사명감, 소신, 용기를 잃지 말고 크리에이티브한 활동을 계속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한국 디자이너들을 지켜보고 응원해주었으면 좋겠다.
- 에디터
- 정환욱
- 포토그래퍼
- JOE YOUNG SOO
- PHOTOS
- COURTESY OF CF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