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리메이크할 때는 변화한 시대에 걸맞은 설정의 업데이트가 필수다. 익히 알려진 명장면들을 2016년에 다시 촬영한다면 그 디테일들이 어떻게 달라질까? 더블유가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예상해봤다.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사랑을 피하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금세 미묘한 호감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좀 더 흐르면 관객들은 뜻밖의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둘은 한때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실연의 상처를 견디다 못해 기억 삭제 클리닉에서 로맨스의 추억을 지운 상태다. 첫 만남은 첫 만남이 아니었고, 백지 상태에서 재회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전에 했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한다. 두 사람이 페이스북 이용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2004년도 원작에서는
곁눈질을 하며 클레멘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조엘.클레멘타인이 불쑥 다가와 말을 건다.
클레멘타인 어디까지 가세요?
조엘 록빌센터요.
클레멘타인 말도 안 돼. 저도요.
조엘 진짜요?
클레멘타인 정말 기막힌 우연이죠? 그런데… 혹시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조엘 (어리둥절한 표정)
클레멘타인 반스앤노블에 온 적 있죠?
조엘 그럼요.
클레멘타인 거기서였네요. 5년째 일하고 있거든요.
조엘 봤다면 기억이 났을 텐데요.
클레멘타인 머리 때문이에요. 색을 자주 바꾸니까요.
2016년에 리메이크를 하면
조엘이 스마트폰 카메라로 클레멘타인을 몰래 찍는다.
클레멘타인 사진 내놔요. 경찰 부르기 전에.
조엘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페이스북을 보고 있었는데….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페이스북 아이콘을 클릭하는 조엘.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표정이 굳는다.
클레멘타인 그런데… 혹시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페이스북이 ‘2년 전 오늘’ 업로드된 이미지를 알려주고 있다. 눈앞에 있는 여자와 조엘 자신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폭설로 고립된 호텔에는 유령들이 떠돈다. 광기에 감염된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러닝타임 내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특히 수수께끼 같던 ‘레드럼(REDRUM)’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는 살갗 밑에서부터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1980년도 원작에서는
화장대에서 립스틱을 집어든 대니. 방문 앞으로 가더니 ‘REDRUM’이라는 단어를 적는다. 그리고 웬디가 자고 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가며 외친다.
대니 레드럼! 레드럼!
웬디 (잠에서 깨어나 대니를 발견하고) 대니, 그만둬! 웬디, 아이를 끌어안다가 거울에 비친 방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좌우가 뒤집힌 상 안에는 ‘MURDER(살인)’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2016년에 리메이크를 하면
대니가 방문 앞에서 셀피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스마트폰을 뒤적이던 웬디가 그 사진을 확인한다. 배경에는 좌우로 뒤집힌 글자가 적혀 있다. 해시태그는 #MURDER다.
웬디 (인스타그램에 덧글을 입력한다) ‘@dannyboy 대니, 그만둬!’
<비포 선라이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로맨스 삼부작은 세월과 더불어 꾸준히 성숙해온 드문 시리즈다. 그 시작인 <비포 선라이즈>는 제시와 셀린이 비엔나에서 함께 보낸 하루를 좇는다. 빠르게 가까워진 둘은 6개월 뒤 같은 도시에서 재회할 약속을 한다. 이후의 전개는 9년 뒤의 속편인 <비포 선셋>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둘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제시와 셀린의 첫 만남이 2016년이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도.
1995년도 원작에서는
기차역에서 이별을 앞둔 제시와 셀린. 서로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셀린 5년 뒤쯤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건 어때?
제시 좋아. 그런데 5년? 너무 긴 시간이잖아!
셀린 끔찍하지! 무슨 사회학 실험 같아. 그럼 1년은?
제시 6개월은 어때?
셀린 6개월? 그때쯤이면 이곳은 무지 추울 거야.
제시 무슨 상관이야. 만나서 다른 곳에 가도 돼.
셀린 그때까지 통화는 서로 하지 말자.
제시 그래, 그런 건 너무 우울하지.
2016년에 리메이크를 하면
셀린 다시 만날 때까지 통화는 하지 말자.
제시 그래, 그러면 구질구질해질 거야.
셀린은 기차에 오르고 제시는 역을 빠져나와 버스에 탄다. 무료해진 제시가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알 수도 있는 사람’ 목록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셀린에게 냉큼 친구 신청을 한다. 잠시 후, 페이스북 메시지가 도착한다.
셀린 ‘연락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제시 ‘통화를 안 하기로 했지. 내키지 않으면 친구 신청은 무시하지 그랬어? :-/’
셀린 ‘그럴 수는 없었어.’
한동안 둘은 서로의 모든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고, 덧글도 꼬박꼬박 교환한다.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다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초반의 흥분과 애틋함은 점점 시들해진다. 셀린은 제시의 허세에 질려간다. 제시는 셀린이 과하게 진지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는 줄어들다가, 결국 끊겨버린다. 6개월이 지났지만 둘 다 비엔나에는 가지 않는다. 물론 9년 후에도 속편은 없다. 온라인에서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버렸다.
-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조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