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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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에게 현실의 잣대는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몇 시즌간 레디투웨어로부터 시작한 거센 현실론에 부침을 당하던
오트 쿠튀르의 세계가 다시 꿈의 영역으로 회귀하려 한다.
존 갈리아노가 돌아왔고, 장 폴 고티에와 빅터&롤프는 오트 쿠튀르에만 열중할 것을 선언하며 그 시작을 알렸다.
어른들을 위한 환상의 패션 놀이터, 2015년 봄/여름 파리 오트 쿠튀르의 세계로.

CHANEL

아담과 이브는 ‘정원’이라는 공간에서 조물주와의 약속을 깨고 사과를 훔쳤고, 이내 죄책감을 느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인류 최초의 복식이 태어난 이 정원이 칼 라거펠트의 손에 의해 2015년 봄 샤넬의 오트 쿠튀르를 위한 무대로 변신했다. 쇼 당일 아침, 그랑팔레에 들어서자 그 안에 커다랗고 투명한 원형 식물원이 지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리 한 블록까지 통으로 떼어와 패션쇼 무대를 만드는 칼 라거펠트이기에 ‘가짜 정원이라니, 조금은 시시한데!’라고 생각할 무렵, 밥티스타 지아비코니가 CC 로고가 새겨진 물 조리개를 들고 나와 모형 식물에 물을 뿌리기 시작하자 무대 위에서는 마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모형 식물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면서 색색의 커다란 꽃을 피운 것! 모든 것이 자동 모터로 움직이는 이 세트는 사실 6개월 넘게 준비한 것으로, 초현실적이면서도 어딘지 SF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밝은 오렌지, 노랑, 분홍, 파랑 등 역시 비현실적으로 ‘쨍한’ 색상의 옷을 입은 모델들은 한 명 한 명 그 자체로 이 비현실적인 공간의 꽃이 되어주었다. 데이웨어는 크게 재킷을 위한 스토리로 집중되었다. 주로 배꼽을 살짝 드러내는 짧은 재킷에 골반 즈음에 느슨하게 미디스커트를 걸치는 스타일이었는데, 라거펠트는 특히 배꼽 부위를 은밀히 드러내는 스타일이 앞으로 가슴골을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해질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반부의 이브닝 라인으로 넘어갈수록 역시 소재와 장인들의 손맛이 드러나는 작품이 연이어 등장했는데, 그냥 눈으로 보기에는 요즘 길거리에 널린 멋쟁이 아가씨들의 차림새와 거의 비슷해 보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느슨하게 땋은 머리, 튤을 붙인 니트 비니, 굽 낮은 부츠, 판초와 스커트의 레이어링 등은 젊은 세대의 전형적인 스타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라면 누구나(몇몇 액세서리는 프런트로에 앉아 있던 지드래곤 같은 남성 패셔니스타를 포함해) 못 견디게 갖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샤넬 오트 쿠튀르의, 칼 라거펠트의 철옹성 같은 저력이다.

ATELIER VERSACE

마침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 시상식을 앞둔 시점이어서, 아틀리에 베르사체 컬렉션에서는 괜찮은 드레스를 미리 점찍으러 나선 여배우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제시카 차스테인, 에이미 애덤스, 제인 폰다, 케이트 허드슨, 골디 혼 등 쟁쟁한 여배우들의 기가 프런트로를 휩쓴 가운데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오트 쿠튀르’ 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충격적인 의상들로 컬렉션을 시작했다.

즉, 검정 톱과 벨보텀 팬츠로 이루어진 오프닝 룩부터 시작해 10여 벌의 룩이 지나도록 그 흔한 시퀸 장식 하나 없이 단순히 검정, 하양, 파랑, 빨강으로만 구성된 룩이 나온 것.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이번 컬렉션이 여성의 곡선(Curve)에 대한 것이라고 밝히며, 가슴과 목선, 배와 허리의 곡선 커팅을 통해 소재와 살이 빚어내는 묘한 대비에 집중했음을 보여주었다. 단색의 드레스라 할지라도 자세히 뜯어보면 여러 개의 곡선 패널로 섬세하게 바느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상식 시즌 직전의 오트 쿠튀르치고는, 그리고 베르사체에 기대했던 것치고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ARMANI PRIVE

‘프리베’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 뛰어든 이래,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결코 멈추지 않는 창의력으로 무장한 컬렉션을 통해 패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다소 연극적이었던 지난 시즌에 비해 좀 더 입을 만하고, ‘아르마니’의 정수가 잘 보이는 스타일, 즉 남성적인 테일러링과 세련되고 글래머러스한 이브닝드레스 잔치로 회귀한 이번 오트 쿠튀르는 2015 S/S 시즌 레디투웨어에서도 강세를 보이는 주제인 오리엔탈리즘을 탐구했는데, 특히 일본과 대나무, 두 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컬렉션이었다.

초반부에 나온 간결한 카디건 재킷과 팬츠, 혹은 스커트로 이루어진 앙상블은 일본 전통 복식의 오비를 연상케 하는 끈으로 여미는 리본 벨트와, 소바 국수를 닮은 실크의 색, 섬세한 대나무 프린트 등 직접적인 동양적 장치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나무라는 주제는 아르마니의 자랑인 이브닝 가운에서 특히 멋지게 표현되었는데, 대나무 잎처럼 커팅한 투명한 겹겹의 오간자 소재가 모델이 걸을 때마다 흩날리는 드레스 자락은 정숙한 로맨틱함을 표현하기에 딱 알맞았다.

GIAMBATTISTA VALLI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백스테이지의 무드보드에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과 60년대의 록스타 재니스 조플린의 사진을 나란히 붙여놓았다.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지만, 발리는 굉장히 간단한 스타일링을 통해 그 해법을 찾아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코코 샤넬의 유산인 간결하고 짧 은 블랙 재킷을 입고, 튤 스커트 밑에 팬츠를 겹쳐 입음으로 해서 재니스 조플린의 시그너처인 하의 레이어링을 시도한 룩을 들 수 있다.

검정과 흰색의 단순한 조합이 자주 등장한 것 역시 샤넬을 의식한 것이며, 후반부의 파스텔 톤 러플 시리즈는 프린지 머플러를 목에 휘감고 다니던 조플린의 룩을 발리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3D로 재단된 꽃 엠브로이더리를 흩뿌린 드레스나 층층이 쌓인 분홍 드레스(그래미에서 리애나가 입고 등장한!) 등은 쿠튀리에로서의 발리의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VALENTINO

요즘 클래식한 오트 쿠튀르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패션 하우스를 꼽으라면 단연 발렌티노를 들 수 있다. 레디투웨어 역시 오트 쿠튀르에 가까운 기법을 구사하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듀오는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힘든 삶을 살았지만 낙천적이고 로맨틱한 작품을 남긴 샤갈에 대한 오마주로 이번 컬렉션을 풀어갔다. 샤갈의 러시아식 화풍은 발렌티노의 미학과 잘 맞아떨어졌는데, 가죽 꽃이 아플리케된 리넨 드레스나, 섬세한 자수 엠브로이더리가 놓인 피나포레 드레스, 스모크 셔츠 등이 눈에 띄었다. 듀오의 특기인 나풀나풀하고 투명한 드레스들(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한 구절을 프린트한 것도 있었다)도 압권이지만, 오스카 시즌을 앞둔 여배우들은 빨간 울 케이프처럼 묵직하고 눈에 띄는 것을 더 선호할 듯하다.

CHRISTIAN DIOR

지난 시즌 수백만 송이의 서양식 오키드로 쇼장을 휘감아버린 라프 시몬스는 이번에는 미래적인 철골 구조물과 천장을 포함해 모든 공간이 훤히 반사되는 거울 벽, 핑크색 카펫이 깔린 쇼 세트로 관객을 초대했다. 그가 영감을 받은 대상은 바로 혁신적인 음악가, 데이비드 보위다. 보위에 영감을 받은 패션이라고 하면 보통은 전위적인 70년대 스타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시몬스가 착안한 것은 구체적인 패션 스타일이 아니라 보위의 혁명적인 마인드, 그 자체였다.

“보위는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진정한 카멜레온이었다”고 말하며 시몬스는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의 상징인 디올 하우스에 변화를 가져올 것을 시사했다. 첫 번째 룩부터 제대로 놀랄 만한 물건이 튀어나왔다. 시퀸이 장식된 고급스러운 시프트 드레스 위에 투명한 플라스틱 코트를 입고, 비닐 사이하이 부츠로 이루어진 룩에 이어 그래픽 스타일로 정리된 보디수트(70년대), 로맨틱한 풀 스커트 드레스(50년대), 엠브로이더리로 장식한 시프트 드레스(60년대) 등이 섞여 나왔는데, 모든 룩에는 피부처럼 다리에 꼭 맞아떨어지는 다양한 길이의 컬러풀한 비닐 부츠가 매치되어 미래적이고 현대적인 기운을 더했다. 바 재킷은 없었지만 지극히 디올 하우스다운 컬렉션이었다.

SCIAPARELLI

60년간 잠자던 스키아파렐리가 오트 쿠튀르로 부활한 지 1년. 마르코 자니니가 갑작스럽게 하우스를 떠난 직후인 이번 스키아파렐리 오트쿠튀르는 새로운 디자이너 없이 내부 디자인 팀이 맡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디자인 팀은 하우스의 아카이브에 충실하되, ‘가재’ ‘바이올린’ 등 너무 직접적인 레퍼런스는 피하면서 현대적인 방향으로 컬렉션을 끌고 나갔다. 리더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브랜드의 대변인인 파리다 켈파가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컬렉션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장 폴 고티에와 아제딘 알라이아의 모델이자 뮤즈였던 그녀는 무대 디자이너로 사진가 장 폴 구드를 데려오고, 스키아 파렐리의 아카이브에서 거울이라는 요소를 찾아내 제안하는 등 컬렉션의 재건에 큰 역할을했다. 금속 뼈대로 야구모자를 만드는 등 모자 장인 스테판 존스의 창의력 또한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여준 공신이다.

VIKTOR&ROLF

“꽃무늬 드레스, 밀짚모자, 그리고 플립플롭!”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노렌은 이 세 가지 요소만을 가지고 컬렉션을 풀어나갔다. 굉장히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패션계의 창의성을 대표하는 듀오 빅터&롤프는 이를 증폭시키고 변형시키는 방법으로 결과물을 완성했다. 오프닝룩은 보통의 밀짚모자에 베이비돌 스타일의 겉 테두리만으로 꽃을 표현한 드레스였는데, 점점 뒤로 갈수록 마치 컬러링 북에 색을 칠해가듯 드레스 위의 꽃 하나하나에 다채로운 색감이 입혀졌으며, 밀집모자는 점점 그 모양과 부피가 커져나갔다. 클라이맥스 즈음에서는 밀짚모자는 거의 비치파라솔만큼 커졌고, 드레스 위의 꽃들은 모자와 연결되어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 식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빅터&롤프는 앞으로 레디투웨어를 정리하고 오트 쿠튀르에만 전념하기로 발표했다. 빅터&롤프의 타협 없는 창의성이 지속되길 바란다.

MAISON MARGIELA

존 갈리아노가 패션계에 돌아와서 처음 선보이는 메종 마르지엘라(마틴 마르지엘라가 완전히 떠나고 갈리아노가 합류하면서 이제 ‘마틴’이라는 이름을 브랜드 명에서 빼기로 결정했다)의 오트 쿠튀르는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갈리아노!’라는 찬사로 가득한 컬렉션이었다. 그는 해적, 우주비행사, 서커스단원에 이르기까지 상상력 넘치는 캐릭터들을 무대 위로 소환했는데, 이 작품들이 기가 막히게 놀라웠던 이유는 ‘마르지엘라’다운 점이 여실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애니멀 프린트와 붉은 스커트로 매치된 룩들은 마르지엘라이기보다는 ‘스웨거’ 갈리아노의 취향이 더 드러나는 룩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미니멀하고, 좀처럼 보기 힘든 장식을 사용하며, 재활용 소재를 사용한다는 취지의 아티즈널 컬렉션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나갔다. 디올 시절의 맥시멀한 레이디 룩은 더는 볼 수 없겠지만, 갈리아노의 역량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펼쳐지는 것을 목격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JEAN PAUL GAULTIER

지난 시즌, 장 폴 고티에는 38년간 집중했던 레디투웨어에서 손을 떼고 오트 쿠튀르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쿠튀르 쇼는 ‘예스라는 답을 받아내는 61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웨딩드레스에 관한 테마였다. 우아한 웨딩드레스도 있었고, 신랑에게 더 어울릴 법한 강인한 르 스모킹도 있었으며, 오른쪽은 남성복, 왼쪽은 여성복으로 구성된 아수라 백작 같은 룩도 있었다. 물론 고티에의 창의성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쇼 자체가 전체적으로 80년대에 머무른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피날레의 나오미 캠벨조차 쇼를 동시대적으로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에디터
패션 디렉터 / 최유경
포토그래퍼
jason Lloyd-Ev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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