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패션 로맨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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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Alessandro Michele)가 꿈꾸는 새로운 비전은? 섹시한 글램 룩에 대한 환상이 아닌 바로 절충주의의 로맨티시즘이 아닐까. 미켈레가 중국 상하이에 펼쳐놓은 전시회는 그의 동화 속 판타지와 감수성이 고스란히 녹아든, 그야말로 순수한 럭셔리의 진수였다.

상해 민생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No Longer/Not Yet’ 앞에서 포즈를 취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2015년 미켈레의 설치 작품인 ‘Gucci Tian’ 앞에 선 모델

아티스트 나이절 샤프란의 작품을 살펴보는, 구찌의 2016 S/S 컬렉션을 착용한 모델.

아티스트 리 슈루이의 2015년 작 ‘Unit No. 1-5’ 앞에 선 모델의 매끈한 가죽 재킷과 스커트, 시그너처 버클 장식 벨트, 그리고 감미로운 색감의 헤드 스카프가 돋보인다.

미켈레가 추구하는 사랑스러운 너드 룩을 한 눈에 보여주는 모델.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아티스트 헬렌 다우니의 회화 작품 속엔 구찌의 2015 F/W 컬렉션을 입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지난 10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민생미술관 안에 있다. “컨템퍼러리란 무엇인가요?” 특유의 경쾌한 이탤리언 억양으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려는 철학자와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알지 못해요. 누구 아는 사람 있나요?” 로마에서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거나 디자이너 비전을 말하면 서 미켈레는 간간이 추상적인 질문을 툭툭 던진다. 지난해 1월부터 그는 관능과 퇴폐미라는 잔재에 오래 사로잡혀 있던 구찌 하우스에 변혁을 추구해왔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 가 무너진, 자유로운 소년과 소녀로 그려지는 달콤한 꿈같은 비전은 구찌의 행보에 새로운 빛을 비췄다. 파티가 진행 중인 민생미술관의 입체적인 공간 속에도 이 비전은 예외가 아니다. <No Longer/Not Yet>이라는 타이틀의 이번 전시는 케이티 그랜드와 함께 공동 기획한 것이다. “우린 아티스트에게 ‘컨템퍼러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마음껏 표출하게 했어요.” 미켈레가 말한다. “그 어떤 룰도 제시하지 않았죠. 룰은 끝을 만들어내니까요. 난 시작을 좋아합니다.”

그는 직접 디자인한 꽃무늬 슈트(미켈레는 꽃은 남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입었다. 얼핏 겉모습은 39조 달러를 넘나드는 패션 제국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아쉬람 근처를 서성이는 책벌레 괴짜에 더 가깝다. 상하이 전시회에 대한 구상은 지난해 가을 밀라노에서 여성복 컬렉션을 선보인 직후 구체화에 들어갔다. 불과 5일 만에 준비를 마쳐야 했던 남성복 컬렉션 이후 연이어 선보인 여성복 쇼에서 미켈레는 과하지 않은 레트로 무드와 엉뚱한 너드 감수성이 어우러진, 기존의 구찌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었다. 북슬북슬한 퍼로 뒤덮여 데카당스한 침실 슬리퍼로 변모한 시그너처 로퍼, 70년대의 강렬한 색감을 담은 주름 스커트, 엷은 핑크빛 퍼 장식의 메탈릭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톰 포드 이후 오랫동안 잠잠했던 브랜드에 대한 아드레날린을 치솟게 만든 뜨거운 반응은 미켈레가 ‘컨템퍼러리’를 재해석한 결과였다. 또한 쇼의 메시지를 더욱 뚜렷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 건,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과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인용구다. ‘컨템퍼러리는 시의부적절한 것이다(The contemporary is the untimely)’라는 롤랑 바르트의 인용구 역시, 상하이 미술관의 벽면에도 등장한다.

아트는 패션과 마찬가지로, 추상적 개념에 물리적 형태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기이하고 붙잡을 수 없는 덧없는 것이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재탄생한다. 가을 쇼의 에너지를 이어받아 미켈레와 그랜드는 전시회의 주제를 확장시켰고, 구찌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흥미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이에요.” 종종 수장으로서의 냉철한 태도나 시니컬함이 유리하게 해석 되는 패션계에서 미켈레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호기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마치 파티를 열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확인하는 것과도 같았어요.” 미켈레가 디자인한 자카드 코트를 입은 그랜드는 공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전시회가 얼마나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공간은 그냥 창고에 가까웠어요.” 그랜드는 화사한 핑크에서 블랙에 이르기까지, 천장부터 바닥까지 다채로운 컬러로 페인팅된 각 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박물관에는 언론 관계자와 스타일 홍보대사들 그리고 컨템퍼러리의 개념을 쇼룸에 맞게 해석한 아티스트 7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각 전시 공간은 통합된 전체라기보다는 저마다 유쾌하고 자유롭게 도발적인 개념을 펼쳐놓은 느낌이다. 영국의 사진가이자 아티스트 나이절 샤프란(Nigel Shafran)은 미켈레의 가을 우먼스 웨어 컬렉션의 비하인드 장면을 시리즈로 전시해놓았다. 형광 조명 아래서 일하는 재봉사들, 구찌 밀라노 헤드쿼터의 텅 빈 선반을 점검 중인 경비원, 접이식 테이블 위에 마치 죽은 잡초처럼 늘어서 있는 헤어 드라이어와 아이론 코드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패션계의 모퉁이에 가리워져 있던 장면들이 집중 조명되었다. 미켈레 역시, 일상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패션의 근사한 면만을 보기 원하지만, 패션은 수많은 일상적인 작업들로 이뤄지죠.” 그는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이러한 이미지 속에 혁신의 불꽃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구찌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화려해 보이는 모든 것을 분해하거나 파괴해보고 싶었어요.”

전시 공간의 예술은 대부분 패션과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지니고 있진 않다. ‘빛으로 시를 쏘는 작가’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스트립 조명 작품을 천장에 매달아 영국과 중국 사이의 8시간 시차를 형상화한 문구를 전달했고, 레이철 파인스타인(Rachel Feinstein) 은 10살짜리 아들이 휴지통에 구겨 버린 그림을 토대로 조각상을 만들었다. 중국의 멀티 미디어 아티스트 차오 페이(Cao Fei)는 구찌의 퍼플과 화이트, 그린 컬러로 전면 카펫 처리된 룸에 디스토피아 세상을 담았는데, 중앙 부분의 원탁 위에선 닭 조각상이 올라간 룸 바 진공청소기가 이리저리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동한다. 한쪽 벽면에는 개발 중인 시골 풍경을 담은 비디오가 상영되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반상업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쇼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아직은 형성되지 않은(No Longer, Not Yet) 세상’입니다”라고 차오는 설명한다.

상하이 전시회에서 미켈레는 큐레이터 겸 아티스트였다. 그는 미술관의 룸 하나를 개조해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바꾸어놓았다. 밝은 빛이 쏟아지는 고요한 공간, 새로운 구찌 백과 옷을 수놓았던 트로피컬 프린트가 똑같이 벽지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거울로 되어 있고, 룸 뒤편으론 마치 주얼리 박스처럼 또 다른 룸이 연결되어 있다. 문을 열면 풍부한 핑크 페이퍼로 장식된 내부가 드러나는데, 만발한 꽃들에 파묻혀 구찌의 더블 G 로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벽면에 장식된 튜더 왕조의 회화 작품은 미켈레의 로마 아파트에 걸려 있던 것으로, 러플 칼라의 레드 드레스를 입은 인물은 얼핏 보면 여인 같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소년의 모습이다. 이날 아침, 미켈레는 그의 디자인에 적용되었던 뭔가에 대해 힌트를 주었다. “정말 아름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것에 대한 아이디어죠!” 오프닝 파티는 18세의 중국 팝가수 더우징퉁(Leah Dou)의 공연과 그녀를 따르는 군중들로 정점을 이루었다. 미켈레는 그녀의 퍼포먼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구찌 앙상블을 입은 더우징퉁은 허스키한 목소리에 깊은 울림으로 노래를 이끌어간다. “오, 마이 갓. 난 그녀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가 외친다. 내일 아침엔 로마를 거쳐 밀라노와 로스앤젤레스로 향할 예정이지만, 지금만큼은 전시회와 퍼포먼스를 잇는 진정한 컨템퍼러리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를 보세요. 정말 아름다워요. 제 페인팅의 소년과 도 닮지 않았나요!”

에디터
박연경
포토그래퍼
JEFF YIU
David Amsden
스타일링
Patrick Mac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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