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시

배그림

금속성의 굉음을 내는 듯한 모터사이클 페인팅은 에런 영을 뉴욕 미술계의 록스타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폭력적인 이미지 아래서 건네는 의미심장하고 시적인 질문이야말로 이 아티스트의 진짜 목소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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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쯤 에런 영을 만난 적이 있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첫 한국 개인전을 위해 그가 서울을 찾았을 때다. 준비가 마무리되지 않은 오프닝 하루 전의 전시장은 꽤나 어수선했다.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몇몇 작품이 곳곳에 엉거주춤하게 놓여 있었다. 인터뷰이가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하릴없이 둘러봤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설치 전 잠시 벽에 기대어 세워둔 한 점을 내가 가방, 혹은 옷자락으로 건드렸던 모양이다.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바리케이드에 도금을 해서 완성한 금속 조각이었다. 육중한 쇳덩어리가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의 소음은 과연 엄청났다. 하지만 내 심장이 쪼개지는 소리가 그보다도 컸을 거다. 당황해서 사과를 중얼거리는 내게 에런 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보다시피 이 바리케이드는 진작부터 망가진 상태니까요.” 지난가을, 뉴저지에서 재회한 아티스트에게 나는 수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는지부터 물었다. 에런 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이 눈만 껌벅거렸다.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괜히 들춘 것 같지 않아요? 하하.” 그러고는 드물긴 하지만 가끔 비슷한 사고가 발생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라우션버그의 일화를 떠올립니다. 한번은 갤러리로 운송하던 중에 작품이 손상됐나 봐요. 온갖 오브제를 붙이고 붓질을 더해 완성한 컴바인 회화였습니다. 작가의 반응은 ‘그 우연도 이미 작업의 일부가 됐다’는 거였죠.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에요.” 추상표현주의의 전통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론을 찾은 로버트 라우션버그는 에런 영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인터뷰이는 자신의 대표작인 모터사이클 페인팅 역시 그의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금속 패널 위에 타이어 궤적을 새겨 추상적인 이미지를 완성하는 록 콘서트 같은 퍼포먼스는 이 젊은 작가를 뉴욕 아트신의 스타로 만들었다. “라우션버그는 회화를 기존의 방식으로부터 해방시켰어요. 저 역시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탐험하고 싶습니다.” 미술계의 엄숙주의를 과감하게 도발하는 위트는 에런 영의 작업에서 붓이나 물감만큼이나 중요한 도구다. 온통 무채색인 아티스트의 공간은 아틀리에라기보다는 정비소에 가까워 보일 정도였다. 붓과 물감 대신 용접 토치와 자동차 오일을, 캔버스 대신 싸구려 가방과 작업복을 활용한 신작들을 잠시 곁눈질했다. 에런 영의 ‘새로운 시도’들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젝트만 훑어도 남다른 속도와 추진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묻고 싶었던 건 작품에 관한 질문이 아니었다. 일단 그의 인스타그램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작업실 한쪽 벽의 문구는 에런 영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그래피티적 요소들을 연상시켰다.

모터사이클의 바퀴 자국을 활용한 번아웃(Burn-Out) 페인팅의 퍼모먼스 이미지 2007, Greeting Card, Park Avenue Armory, New York Photo | Kai Regan / Courtesy of Art Production Fund

2010년에 열린 국제갤러리 개인전 설치 전경. Photo | Sang Tae Kim

Untitled, 2010 Brass Panel with 24 Karat Gold, Burnt Rubber, Motor Oil, Each Panel : 243.8 x 100.3cm Photo | Sang Tae Kim

작업 중인 작품의 일부.

인스타그램에 동명이인, 그러니까 다른 ‘에런 영’들에 관한 뉴스를 꾸준히 캡처해서 업로드하고 있다. 어떤 목적의 리서치일까?
재미삼아 하는 거다. 인스타그램은 이용자가 자신에 관한 온갖 정보를 쏟아내는 플랫폼이다. 이미지로 가상 공간 안에 각자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한다. 언젠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내 이름을 구글 얼러트 Google Alert)에 입력해두고, 뉴스 메일이 오면 읽어본 뒤 포스팅하기 시작했다. 어떤 에런 영은 와이오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또 다른 에런 영은 뉴욕 업스테이트에서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 특정 이름을 실마리로 내 계정에서 나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을 수집하는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인스타그램이라는 미디어의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나의 작업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나?
막연하게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괜찮은 아이디어를 덧붙일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그 여부는 나보다는 다른 ‘에런 영’들에게 달렸다. 그들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할지가 관건이다.

지난 인터뷰 때 최근 10년간 세상에 소개된 것 가운데 특히 흥미롭게 느껴지는 한 가지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의 답은 유튜브였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관심이 큰 편인가?
나는 아직도 유튜브를 충분히 탐색하지 못한 것 같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제 TV는 거의 보지도 않는다. 새로운 미디어가 기존의 매체를 하이재킹한 느낌이다. 마치 크리스 버든의 초기 작업처럼 말이다. 그는 TV 광고 비용을 지불하고, 연속극과 샴푸 커머셜 사이에 자신의 퍼포먼스 영상을 상영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누군가가 같은 시도를 한다면, 당시와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려울 거다. 요즘은 케이블 채널만도 500개 이상에 달하니까 영향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매체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소셜 미디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아무래도 이미지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보니 트위터보다는 인스타그램이 편하다. 종종 그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뭐랄까, 뜻을 모르는 어휘로 가득 차 있는 사전처럼 느껴진다.

현재 작업 중인 프로젝트들이 스튜디오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설명을 부탁할 수 있을까?
값싼 가방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페인팅을 하고 있다. 물을 뿌려가며 작업을 해서 색상이 번지고 흐려진 상태다. 마치 야외에서 비를 맞은 것처럼 말이다. 뉴스 영상을 보면 유럽 난민 가운데 비슷한 가방을 들고 있는 수가 꽤나 많다. 그래서 내게는 이 오브제가 이주, 혹은 이동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빨래 가방이겠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가 가진 전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전시장의 책상 아래나 한쪽 구석에 누군가가 던져놓은 것처럼 설치하면 어떨까 싶다. 테스트 단계이긴 하지만 브론즈 조각으로도 똑같은 형태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기존에 선보인 블로토치 페인팅도 계속 하는 중이다. 좀 더 컴바인 회화에 가까운 결과물이 될 거다. 모터 오일을 사용하는 작업도 있다.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두고, 여러 차들이 지나가며 얼룩을 떨어뜨리도록 했다. 각기 다른 차종에서 흐른, 여러 종류의 오일 자국이 겹쳐지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완성될 것이다. 9월에 시작했는데, 연말까지 결과물을 두
고 보려고 한다.

스튜디오 풍경이 일반적인 미술가의 아틀리에와는 꽤나 다르다. 빨래 가방과 불에 그을린 옷가지와 각종 공구까지, 오히려 정비공의 공간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럴 거다. 내 경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사람들과 자주 협업을 한다. 모터사이클 라이더, 스케이트보더, 철골 제작자…. 그래서 스튜디오 밖에서의 작업이 많다. 이곳은 그렇게 준비된 재료들을 가져와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정리하는 공간이다.

에런 영의 작업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역시 모터사이클 페인팅이다. 이 시리즈는 여전히 진행 중인가?
계속 이어가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 필요할 것 같다. 게으른 자기 복제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트스쿨 재학 시절에 모터사이클 페인팅을 처음 시작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떠올린 아이디어였나?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두 작품으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그는 트럭 바퀴에 검정 잉크를 칠하고 그 궤적을 종이에 찍어 페인팅을 완성한 적이 있다. 빌럼 데 쿠닝의 소묘화 하나를 지워버린 다음 빈 캔버스를 전시하기도 했다. 페인팅을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의도였다. 라우션버그는 당대의 추상표현주의를 좇는 대신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추구했던 작가다. 새로운 시도는 내게도 무척 중요한 문제다. 예술학교 재학 중 내 작품을 발표할 차례가 됐을 때 모터사이클 페인팅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라이더에게 앞을 볼 수 없을 때까지, 혹은 타이어가 닳아 빠질 때까지 원을 그리며 회전하도록 요구했다. 그렇게 번아웃을 하는 동안, 그 장면을 천장에서 내려다보며 영상으로 기록했다. 드로잉이 진행될수록 비디오 화면에는 연기가 차 올랐다. 즉 작품이 완성되어가는 동시에 지워져버린 셈이다. 라우션버그의 작업을 내 방식대로 재해석하고 싶었다.

책에서(2월호)

에디터
정준화
포토그래퍼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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