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

우보미

<마션>의 리더십 넘치는 화성 탐사대 대장에서 <크림슨 피크>의 아름답지만 섬뜩한 고딕 악녀까지, 제시카 차스테인이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완전한 변신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보면 그녀는 또다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운과 샌들은 Atelier Versace 제품.

가운과 샌들은 Atelier Versace 제품.

“사람들이 본드걸이 되고 싶으냐고 물어요. 난 대답하죠. ‘아니오, 전혀. 난 악당이 되고 싶은데요.’” 여름이 끝나가던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제시카 차스테인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문 앞 계단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피부색과 거의 비슷한 톤의 엷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었고 아찔하게 높 은 샌들을 신었다. 어깨 길이의 붉은 머리는 잔머리 없이 깔끔하게 올려 묶었다. 샌들 사이로 보이는 쨍한 파 란색 페디큐어만 아니었다면 19세기 회화 속에서 걸어 나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 이유는 주로 부유한 상류사회 인물의 초상화를 그렸던 지적이고 매력적인 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전시를 보 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1800년대 후반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고전적인 미모의 차스테인은 아마 이 화가가 사 랑해 마지않는 모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 또한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에 등장한 여배우나 무용수, 예술 가처럼 섬세하고 드라마틱하면서 어딘가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녀는 비슷한 스타일의 캐릭터를 연 기하며 자신만의 확고한 이미지를 각인시켜온 여배우들과는 달랐다. 사실 차스테인이 스크린에 자주 등장하 기 시작한 건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채로운 인물을 연기하며 오래 활동한 배우 같은 인상을 전한다. 〈헬 프〉에서는 60년대 남부의 화사하고 섹시한 여인으로 분해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는 오사마 빈 라덴을 집요하게 쫓는 CIA 요원으로 변신해 다시 아카데미 후보에 이름을 올렸으며, 〈모스트 바이어런트>에서는 야심 차고 매혹적인 아내로 등장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에서 영웅적인 면모 의 화성탐사대 대장 역을 맡았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 독의 음산한 고딕 호러 로맨스 영화 <크림슨 피크>에 서는 차갑고 고혹적인 귀족 여인 루실 샤프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계단에 서 있는 제시카 차스테인 을 보면서 그녀 커리어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었던 순 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011년 테렌스 맬릭 감독 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 으면서 주목받은 순간이다. 그녀는 몇 년 전에 이 영화 를 촬영했지만 그렇게 임팩트 있는 데뷔를 할 거라고 는 예상치 못했다. “개봉까지 아주 오래 기다렸죠.” 나 는 그녀에게 팔레 드 시네마 극장까지 레드 카펫을 걸 어갈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지만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명한 노란색 시폰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함께 연기 한 브래드 피트와 숀 펜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어요!” 차스테인은 나와 같이 미 술관으로 올라가면서 말했다. “그 선배들이 붙잡아주 지 않았다면 중간에 픽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시사회 사진을 지금 보면 마냥 즐거워 보이지만 그것 또한 연 기였죠. 머릿속에서는 이 생각밖에 안 났죠. 나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잖아.” 그녀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극 적으로 변했는지 지금도 실감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 다. “칸에서 배우로서의 제 인생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죠. 오랜 무명 시절을 지나 결국 거기까지 간 거예 요. 그리고 제 삶이 바뀌었죠.”

2011년에 차스테인은 무려 일곱 편의 영화에 출연했 다.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그녀의 연기 폭이 얼마나 넓은지 일깨워주었으며, 그다음부터는 말 그대로 ‘유비쿼터스’한 배우가 되었다. “제가 사람들 을 좀 헷갈리게 하나 봐요. 이런 말 종종 들어요. ‘진짜 제시카는 누구죠?’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배우로서 제가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관객들이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어요.” 우리는 미 술관에서 길을 잘못 들어 근육질의 남자 누드 조각상 이 가득한 조각 갤러리에 들어섰다. 차스테인은 로댕 조각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자 배우에겐 그 런 말을 하지 않거든요. 그들의 실제 모습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잖아요. 제 목표 중 하나가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악당 역을 맡는 거예요. 사람들이 저에 게 본드 걸이 되고 싶지는 않은지 물어요. 전 대답하 죠. ‘아니, 전혀요. 전 악당이 되고 싶은데요. 그 제의가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죠.” 차스테인은 맨해튼에 집이 있고 얼마 전 영국에서 크 리스 헴스워스, 샤를리즈 테론과 함께 (<스노우 화이 트 앤 헌츠맨>의 프리퀄인) <헌츠맨 :윈터스 워>를 찍 고 돌아왔다. “샤를리즈 테론 옆에 있으니까 저는 완전 스머프가 된 거 있죠.” 키가 특별히 크지는 않은 차스 테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조금 헤매다 사전트 전 시회의 입구를 찾았다. “그 영화에서 저는 여전사예요. 우리가 보게 될 이 명화 속 여성들과는 좀 다르죠? 아 닌가? 어쩌면 이들도 그 시대의 전사였을지도 모르겠 네요.”

드레스는 Givenchy Haute Couture by Riccardo Tisci, 둥근 귀고리와 묵주 목걸이는 David Yurman 제품.

드레스는 Givenchy Haute Couture by Riccardo Tisci, 둥근 귀고리와 묵주 목걸이는 David Yurman 제품.

전시가 시작되는 첫 공간에서 차스테인은 붉은색의 긴 실내복을 입고 까만 턱수염을 기른, 선이 굵은 미남의 초상화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닥터 포지> 란 작품이었다. 사무엘 장 포지는 현대 부인과 의학을 발전시킨 의사로 사전트의 그림에서 명민하면서도 유 혹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포지는 불멸의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를 비롯해 유명한 여인들과 스캔들을 일으 킨 당대의 인기남이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 신의 성적인 경험을 털어놓거나 성적인 실험을 하는 ‘리그 오브 로즈’라는 살롱을 이끌기도 했다. “와, 이 눈 좀 보세요. 잔 루카가 왜 여기에 있지?” 4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잔 루카 파시 데 프레포술로를 말하는 것이다. 파시 데 프레포술로는 몽클레르에서 일하고 있으며 둘은 패션계에서 일하다 만났다. “한마디로 신 사죠.” 차스테인은 단어를 신중히 선택하려 노력했는 데 워낙 자기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기도 하 다. “그런 면이 저한테는 참 중요해요. 잔은 전통적인 이탈리아 가정에서 자랐거든요. 그런데 그 가족과 친 지를 통틀어서 이혼한 부부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 요!” 하지만 차스테인은 다분히 보헤미안적인 분위기 에서 성장했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살았고 엄마는 싱글맘이자 채식 요리사였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영 감이 된 분은 할머니예요.” 차스테인은 전에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다. “할머니가 저를 극장에 데려갔고 연기하 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셨죠. 저에 대한 믿음이 흔들 린 적이 없어요.” 할머니는 여전히 그녀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2012년 오스카 상 시상식의 파트너이기도 했다.

차스테인은 닥터 포지 그림을 한 번 더 바라보았고 우 리는 다음 방으로 옮겨 사전트의 귀족 친구의 아내 프 레데릭 베르나르 부인의 초상화를 만났다. “어머나? 에이미 애덤스를 닮았네요.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우 리는 조금 서성이다가 맥베스 부인 의상을 입은 빅토 리아 시대 최고의 영국 배우 엘렌 테리의 초상화를 감 상했다. 이국적인 미모의 스페인 플라멩코 무용수였 던 카르멘치타 그림도 있었다. 레이스와 은실로 장식 된 노란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올린,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했다. 눈을 감 고 입을 약간 벌린 메조 소프라노 조지 바텐 부인의 그 림 앞에서 차스테인이 말했다. “저건 분명 황홀감에 빠 진 얼굴인데요? 옷을 벗고 있지 않아도 굉장히 도발적 이고 섹시해요.”

1999년 차스테인은 서부를 떠나 뉴욕으로 와서 줄리 어드 스쿨 연기학교에 입학했다. 그때의 과제 중 하나 가 메트로폴리탄에 가서 그림을 하나 고른 다음에 그 사람을 상상하여 연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사전 트 그림 속 여인을 골랐어도 근사했을 것 같아요.” 차 스테인이 말했다. “어쩌면 이 중 몇 명은 이미 연기해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시선이 드디어 피에르 고트로 부인에게 고정되었다. 사전트의 대표작이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1883년 작 <마담 X>다. 높은 콧 대와 나른하고도 오만한 시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차스테인은 이 여인의 목이 깊게 파인 블랙 드레스와 대담한 자세를 관찰하며 크림슨 피크의 캐릭터 루실을 떠올렸다. “거만한 태도는 아주 비슷해요.” 차스테인은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마담이 입은 옷이 훨씬 더 섹시해요. 루실은 과장되고 기하학 적인 의상을 좋아하죠. 이 초상화에서 타이트한 드레 스의 힘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네요,”

차스테인은 고트로 부인의 피부를 유심히 살펴보았 다. “몸에도 화장을 했군요. 자세히 보면 흰색 파우더 밑에 동맥이 비쳐요.” 벽에는 이 작품의 초기 버전이 붙어 있었다. 큰 그림에서는 석고처럼 희고 단단한 어 깨를 두 개의 금색 끈이 감싸고 있지만 초기 버전에서 는 한쪽 어깨 끈이 흘러 내리고 있다. 마치 숨겨둔 애인 을 기다리는 것처럼. “마담 X가 처음 파리에서 전시되 었을 때 혹평과 조롱에 혐오까지 받았어요.” 차스테인 은 너무도 충격적이라는 듯이 말했다. “사전트도 어쩔 수 없이 어깨 끈을 다시 그렸어요. 악평을 견딜 수 없었 던 거죠.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며 살던 프랑스를 떠났 고 화가로서 큰 위기를 맞아요.” 그녀는 이 그림을 다 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 말했다. “하지 만 저는 어깨 끈이 흘러내린 이 그림이 더 좋아요. 이 하나만으로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암시하잖아요. 그 녀가 되어 저 삶을 산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심장이 두 근거려요. 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오면 누 구나 보고 싶지 않겠어요?”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STEVEN KLEIN
모델
제시카 차스테인
Lynn Hirschberg
스타일
Edward Enninful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