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 운하, 가면, 성당, 카사노바, 비엔날레, 그리고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이 단어들을 조합하면 딱 한 곳, 베니스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 디젤의 첫 컬렉션을 준비하던 패션계의 괴짜, 니콜라 포미체티 역시 이 마법 같은 도시에 매혹되었다.
인천을 출발해 파리 샤를 드골 공항까지 비행한 후, 유럽의 수십 개 소도시로 향하는 승객들 사이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렸다. 척추를 따라 전해지는 낮고 묵직한 여독을 느끼며 건조한 기내가 앗아간 수분을 보충하려 에코백 안을 뒤적일 때, 검은색 초대장이 먼저 손에 잡혔다. 앞면에는 베니스, 뒷면에는 디젤이라는 흰색 타이포가 프린트된 이 카드 한 장이 15시간을 들여 이탈리아까지 날아가는 유일한 이유다.
거의 같은 시각에, 똑같은 검정 초대장을 손에 든 수백 명의 패션 피플이 속속 베니스에 집결했다. 브랜드 역사는35년이나 되지만, 컬렉션은 한 번도 따로 발표한 적 없는 디젤의 첫 컬렉션이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것(뉴욕 패션위크 스케줄에 올라 있는 디젤 블랙 골드는 디젤의 컬렉션 라인으로 범주가 다르다)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정보가 없었다. 티에리 뮈글러를 떠나 디젤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합류한 지 1년이 된 니콜라 포미체티가 발표하는 첫 컬렉션의 배경은 도대체 왜 베니스여야만 했을까? 유명 패션지의 에디터이자 레이디 가가를 비롯한 할리우드 팝 아이콘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을 알린, 체제 전복적이며 스트리트 하위문화에 뿌리를 둔 패션계의 대표적인 괴짜 디자이너인 그는 베니스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을까? 이벤트가 열리기 전, 반나절의 베니스 투어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시작은 베니스 여행의 관문인 산마르코 성당.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극찬한 산마르코 광장은 산마르코 베포레토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랜드 마크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두 개의 기둥 꼭대기에는 베니스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 데오도로의 상이 있는데(예상 실마리 하나, 사자와 날개 모티프), 정교하게 배치된 대리석 광장 바닥과 산마르코 대성당의 넓이, 그리고 기둥의 높이가 자아내는 웅장한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2명의 베니스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훔쳐온 성자 마르코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세워진 성당으로, 가로 세로 길이가 동일한 십자가 형태며(예상 실마리 둘, 십자가와 성당 등 고딕 스타일), 내부에는 총 5개의 돔이 있다. 이 성당은 크게 보면 비잔틴 양식이지만 이슬람 문화와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다양한 양식이 추가되고 혼합되어 독특한 형태를 띤다. 특히 베니스 공국과 수로를 통해 교역을 해온 동방의 영향을 받아 금색 바탕 장식과 모자이크 기술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예상 실마리 셋, 금색 메탈 장식과 모자이크, 혹은 패치워크 장식). 광장을 떠나 좁은 수로와 다리로 연결된 길거리에 눈을 돌리면 세계적인 관광 명소답게 기념품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광경을 볼 수 있다. 티셔츠나 모자 같은 일반적인 기념품보다 쇼윈도 너머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건 바로 화려한 베니스식 가면들이다. 서민들이 가면을 쓰고 귀족 놀이를 하며 기분을 달래는 것에서 시작한 중세 베니스의 풍습(예상 실마리 넷, 가면 코스튬, 그리고 익명성에서 보장되는 은밀한 퇴폐미)은 결국 귀족에게까지 퍼져 신분을 숨기기 위해 1년 내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 유행이 되었고, 재의 수요일 전 10일간 열리는 현재의 베네치아 가면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만 둘러 보아도 컬렉션과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려 있었다. 과연 니콜라 포미체티의 시선을 매료시키고도 남을 법한 요소들이었다.
산마르코 베포레토 선착장에서 수상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지나, 컬렉션이 열리는 부둣가에 도착했다. 바다와 부두의 경계를 따라 타오르는 붉은 화염은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가는 밤의 하늘을 어지럽게 흔들어 기묘한 분위기를 발산했다. 거대한 창고 중 하나를 꾸며놓은 쇼장은 원형 스태디움 스타일이어서 마치 야구장의 관객처럼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그리고 이내 전면의 스크린에 밖에서 본 것과 같은 붉은 화염과 실루엣만 보이는 남성 댄서의 모습이 투영되면서 쇼의 시작을 알렸다. 화면 속에서 화염에 둘러싸인 댄서들은 뛰고, 구르고, 넘어지며 근육과 몸의 선을 통해 최상급의 표현을 자아냈다. 이 영상은 니콜라 포미체티와 오랜 협력 관계를 지닌 패션 사진과 디지털 영상 예술가인 닉 나이트가 제작을 맡고, 안무가 겸 전 영국 로열 발레단의 발레리노, 이반 푸트로프가 안무 총지휘를 맡아 출연한 작품이다. 충격적인 영상 인트로가 지나가자 총세 파트로 이루어진 캣워크가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정식 컬렉션이 열리기에 앞서, 티저 형식으로 공개되었던 디젤 리부트(Reboot) 캠페인처럼, 세계적인 톱모델보다는 개성 강한 일반인에 가까운 모델들의 라인업이 돋보이는 가운데 가장 먼저 다양한 검정과 빨강으로 이루어진 가죽 소재 위주의 파트가 나왔다. 로큰롤 스타일의 스키니 데님 팬츠와 스터드가 박힌 레이스업 부티, 베니스의 상징인 사자상이 버클에 장식된 벨트도 눈에 띄었다. 두 번째 파트는 디젤 하우스를 이루는 근간인 데님에 대한 헌사로, 다양한 가공법을 동원한 데님 피스들이 포미체티 특유의 스키니한 실루엣에 담겨 등장했다. 거의 모든 룩이 데님 온 데님, 즉 ‘청청 코디’로 구성되었음에도 지루한 느낌이 없었다. 마지막 파트로 소개된 아이콘은 밀리터리-유틸리티 파트로 스트리트 스타일과 접목된 유틸리티 룩이 대거 등장했다. 시어링과 패딩이 더해진 카키색 사파리와 알록달록한 그라피티 장식 시리즈, 오버사이즈에서 스키니, 배기에서 슬라우치에 이르는 온갖 스트리트웨어의 실루엣이 몽땅 쏟아져 나왔다. 총 80여 벌에 달하는 쇼가 끝나자 잠시 무대 뒤로 사라졌던 모델들은 일제히 파란색과 빨간색 모피 폼폼이 붙은 복면 마스크를 쓰고 드라마틱한 피날레 무대를 선보였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적으로, 그리고 포미체티와 디젤 식으로 근사하게 재해석된 브랜드의 미래형 모습이자, 베니스라는 도시에 대한 헌사였던 셈. 애초부터 ‘베니스 컬렉션’이라는 점을 부각시켰지만 실제 공개된 컬렉션은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거대한 코즈모폴리턴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데님이라는 만국 공통의 아이템이 갖는 영원불멸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미국, 영국의 밤 문화가 골고루 스며들었으며, 포미체티가 자극을 받고 성장했음이 분명한 일본식 하위문화 레퍼런스도 분명히 섞여 있었다.
쇼가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순간, 관객들을 베니스의 밤으로 더욱 취하게 이끈 열정적인 무대가 이어졌다. 바로 포미체티가 스타일 디렉팅을 맡게 된 팝 아티스트 브룩 캔디(Brooke Candy, 차세대 레이디 가가라고 불리는 가수다)가 디젤의 가죽 브라와 쇼츠를 입고 무대에 올라 최신 싱글 ‘오퓰런스(Opulence)’를 라이브로 열창했던 것. 다리를 벌리고 야릇한 포즈를 취하며, 가운뎃손가락쯤은 아무렇지 않게 치켜드는 이 발칙하고 당당한 어린 여가수의 모습은 정말 미치도록 저속하고, 또 끝내주게 죽여줬다. 이 협업에 대해 포미체티는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과의 협업은 내가 디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디젤은 패션보다는 창조성 자체에 가치를 두는 편이라 아주 마음에 든다. 브룩 캔디는 현재의 팝 문화에 가장 흥미롭게 등장한 인물이고, 내가 지지하는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영상을 협업한 닉 나이트와 안무가 이반 푸트로프 역시 혁신적이며 도전을 즐긴다. 그야말로 디젤의 정신이 인격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며 협업의 이유를 설명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한 도시에서, 그 장소에서 영감의 원천이 비롯된 단 하나의 컬렉션을 관람하는 것은 굉장히 기묘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중세의 영광을 현재까지 부여잡고 있는, 어찌 보면 낡은 유산 외에는 남은 것이 없는 이곳을, 패션계의 전위성을 대변하는 젊은 디렉터가 일일이 해부하고 체득해 창조한 결과물을 목격하는 게 좀처럼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이제 디젤의 도시 컬렉션은 패션계의 상징적인 이벤트로 많은 사람에게 회자될 것이 분명하다. 다음 컬렉션은 서울이나 부산은 어떨까? 포미체티에 의해 재해석된 서울의 밤, 궁금하지 않나?
- 에디터
- 패션 디렉터 / 최유경
- 기타
- COURTESY OF DIES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