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트를 읽어드립니다, 친절하게.
1. 그래도 역시 꽃무늬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꽃무늬가 빠지는 날이 과연 올까? 매 시즌 반복되는 꽃무늬는 패션 속 클리셰지만 그 방식은 항상 새롭기 때문에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번 시즌 역시 디자이너의 꽃 사랑은 다채로운 방식으로 나타났다. 흐릿하고 부서질 듯한 꽃의 연약함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까르벵, 날염 효과를 활용해 꽃을 파괴적으로 표현한 로다테. 이들에게선 꽃을 아름다운 존재로 보지 않고,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봤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 밖에도 꽃을 패브릭 화폭에 담아 수채화처럼 표현한 랑방, 화려하고 자극적인 색감의 꽃 프린트에 주얼 장식같이 화려한 프린트를 더해 플라워 맥시멀리즘을 창조한 로베르토 카발리와 매튜 윌리엄슨도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이번 시즌 플라워 프린트의 전반적인 특징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조금은 자극적이고, 파괴적이었지만 꽃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했다.
2.내셔널 지오그래픽
가을, 겨울 시즌이라 그런지 프린트 소재를 자연에서 찾은 디자이너들은 고요한 수묵화 같은 프린트를 제안했다. 스산한 나무 프린트를 옷에 담은 마르니는 회색 숲의 프린트 드레스를 여우털 케이프와 매치해 프린트와 스타일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을 주었고, 이런 식의 입체적 스타일링 덕분에 프린트 분위기가 극대화되었다. 과감한 형태와 구조적 실루엣을 도화지로 삼은 마리 카트란주 역시 수묵화처럼 채색된 겨울 나무 프린트를 옷에 담았는데, 그녀는 프린트를 가지고 우울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자연과 더불어 동물, 곤충 따위를 사랑스럽게, 또는 웅장하게 표현한 디자이너의 등장도 괄목할 만한 점이다. 우아한 실루엣과 고급스러운 소재에 재치를 더한 랑방의 풍뎅이 프린트는 자칫 혐오감이 들 수도 있지만, 식상한 프린트가 난무하는 요즘 패션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호랑이, 곰 같은 동물을 형상화한 프린트를 성숙하고 우아하게 소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홀리 풀턴 역시 이번 시즌 눈여겨봐야 할 동물 프린트 플레이 중 하나.
3. 신흥 프린트
이번 시즌 급부상한 핵심 프린트 세 가지는 바로 레트로, 하트, 카무플라주 무늬다. 밀라노 패션의 진중함과 재기 발랄함이 깃든 아퀼라노 리몬디와 전통과 트렌드를 기가 막히게 버무리는 버버리 프로섬은 이번 시즌 아동복에나 등장할 법한 하트 무늬를 극도로 시크하게 둔갑시켰는데, 그들처럼 무뚝뚝한 자세로 하트 무늬를 소화하려면? 장식이 최대한 배제된 아이템과 매치하고, 러플이나 레이스같이 로맨틱한 아이템을 배제하면 간단하다. 한편 레트로 프린트를 차용한 마크 제이콥스와 수노의 선택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70년대 빈티지 무드를 과감하게 표현한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와 아프리카 전통 문양에서 영감 받아 독특한 프린트를 만든 수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가 실루엣을 소박하게 복고적으로 풀었다면, 수노는 야구점퍼, 지퍼 장식, 페플럼이 가미된 지극히 현대적인 것들에 레트로 요소를 섞었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카무플라주 프린트로 이번 시즌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디자이너는 바로 미래적인 소재와 스포티한 요소로 카무플라주 프린트를 접목한 마이클 코어스와 카무플라주 프린트를 트위드, 깃털 소재의 아이템과 믹스해 제3세계 스타일링을 제안한 크리스토퍼 케인이다. 이 둘을 보면 같은 프린트로 얼마나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4. 명작 극장
예술가의 작품이나 신화 속의 인물을 통째로 프린트화시키는 게 몇 시즌째 꾸준히 유행하고 있다. 지난 시즌과 달라진 게 있다면 장르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프린트로 만든 카스텔 바작의 의상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비극적이지만 낭만적인 순간을 그대로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앤디 워홀의 일러스트를 드레스 곳곳에 배치한 디올, 시칠리아 섬의 문화유산을 몇 시즌째 담고 있는 돌체&가바나는 새삼 다양한 문화가 패션의 영감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이번 시즌 프린트의 영역 확대에 가장 크게 공헌한 브랜드는 뭐니 뭐니 해도 만화영화 주인공 밤비와 감각적인 사진을 콜라주한 지방시가 아닐까? 이 귀여운 밤비 프린트 스웨트 셔츠가 국내에 바잉된다면 솔드아웃되는 건 시간문제일 듯. 또한 신화 속에서 초자연적 힘을 상징하는 이블 아이를 프린트로 승화시킨 겐조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다채롭게 변형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무시무시한 눈을 모아 스트라이프 프린트를 만들거나 이국적인 무늬와 섞어 또 다른 프린트를 만든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정도. 더불어 그들이 선보인 프린트 스타일링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처럼 과장된 프린트일수록 과감하게 입으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한편 2년 만에 컴백한 언더커버의 만화적 컬렉션도 영역 확장에 한몫했다. 그의 괴짜 성향을 보여주는 장기 프린트는 런웨이에 토끼 가면을 쓰고 나타난 모델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자칫 혐오스러울 수 있는 장기라는 요소를 재치 있게 풀어낸 컬렉션 안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자신이 조금 과한 프린트를 선택했다고 느껴졌을 때 스스로 그것의 수위를 낮춰줄 무언가를 찾으면 좋다는 것. 가령 순박한 인형이나, 언더커버의 토끼 가면처럼 말이다.
- 에디터
- 김신(Kim Shin)
- 아트 디자이너
- 표기식
- 기타
- KIM WESTON ARNOLD, JASON LLOYD-EV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