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변화를 이끌 문화 트렌드 키워드

권은경, 전여울

What’s Next? 2025년, 우리를 둘러싼 문화적 · 산업적 지형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음악, 공연, 영화, 방송 및 뉴미디어, 미술, 출판, 음식, 여행…. 다양한 분야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고민 중인 27인의 머릿속을 엿봤다. 업의 속성과 흐름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는 ‘꾼’들이 품은 화두야말로, 가까운 미래 우리의 라이프스타일과 밀접한 코드일 것이다.

Music

리얼 가수 VS 가상 가수
몇 년 전부터 뉴스 헤드라인에 오르내리던 가상 인플루언서, 가상 아이돌. 그들이 마침내 K팝계에 거대한 그림자를 몰고 다가오는 중이다. 버추얼 K팝 유튜버 ‘아뽀키’, ‘이세계아이돌’은 강력한 전조였고, 이윽고 2023년 5인조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가 나타났다. 플레이브는 지난해 잠실실내체육관 콘서트를 매진시키더니 최근 미니 3집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빌보드 ‘글로벌 200’ 차트에 진입했다. 웬만한 인간 가수도 밟기 힘든 험로를 사뿐히 지났다. 비웃던 얼굴들에선 조만간 웃음기가 사라질 것이다.

어차피 조그만 화면, 짧은 콘텐츠 안에서 활동하는 요즘 가수들에게 진짜와 가상의 경계는 무의미할 뿐이다. ‘리얼’ 가수와 ‘가상’ 가수의 대결. 누군가에겐 슬픈 전설이 되겠지만, 인간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 컴퓨터가 그저 계산기였던 시절이 있었나. 이 구도 속에서 주인공은 ‘가상인’이 될 것이며, 인간은 철저하게 수동적 ‘소비자’로 패퇴할 것이라는 예감이 스친다.
– 임희윤(대중음악 평론가)

@charli_xcx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진짜’ 서사의 울림
사람의 흔적이 수치와 데이터로만 남은 듯한 2025년, 사람들은 기어코 돌고 돌아 다시 인간의 체온을 찾았다. 최근 수년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빌리 아일리시, 차펠 론, 찰리XCX가 남긴 발자취를 보자. 정서 불안에서 성 정체성, 소모되기 쉬운 여성 팝스타라는 지위. 각자의 진창에서 거침없이 자기 고백을 선언한 이들의 음악에 세상은 화답했다.

K팝계 역시 마찬가지다. 4세대 K팝 지형도 안에서 비로소 바로 보게 된 ‘나’에 대한 자각을 넘어 ‘진짜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에 공감하는 동료들을 차곡차곡 모아가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특히 솔로 작업에서 도드라지는 이 강렬한 ‘에넥도트’의 기운은 최근 제니의 정규 1집 , 이달의 소녀 출신 이브의 EP 등에서 짙게 감지할 수 있다. 원래도 굳이 ‘내 얘기’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모인 언더그라운드는 말할 것도 없다. 개인의 역사가 모두의 역사를 이끄는 풍경이 익숙한 듯 생경하다.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클럽 신이 엿보는 ‘로컬’의 가능성
지금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클럽 신은 팽창 중이다. 해외 DJ들이 가장 선호하는 목적지 중 하나이자, 수많은 클럽이 모인 이태원의 파괴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로컬 신’ 한정, 지금의 지형도가 그리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거의 매주 유명 DJ가 내한하기에, 로컬 DJ만으로 라인업을 꾸릴 경우 해외 ‘빅 네임’이 플레이하는 날과 그 결과의 차이가 크다. 이런 문제의식은 대부분의 클럽과 DJ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최근 많은 클럽이 레지던트 DJ를 선발하고, 이들과 함께 고유한 색깔을 만들며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한편 대표적으로 ‘화이트 루나’, ‘정션 포레스트’, ‘삼보 레코즈’ 등 로컬 레이블들 역시 활발히 신보를 발매하며 신에 활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자생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서브컬처의 영원한 숙제이자 궁극의 목표를 향한 과도기인 한편, 새로운 가능성이 엿보이는 요즘이다.
– 유지성(프리랜스 에디터, DJ)

Stage

@seouljazzfestival

페스티벌의 선택과 집중
팬데믹 이후 해외 뮤지션의 공연 개런티는 이전 대비 2배 이상 상승했다. 개런티뿐 아니라 인건비, 자재비 등도 부르는 게 값인 추세다. 국내 뮤지션 역시 활동 영역을 글로벌로 넓힘에 따라 공연 섭외 메일을 해외 에이전트에 보내거나 개런티를 해외 원화로 송금해야 하는 케이스가 많아졌다. 이는 곧, 티켓값은 나날이 상승할 것이고 앞으로 페스티벌에서 ‘빅 네임’ 뮤지션을 볼 기회는 적어질 것이라는 사실과 통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 국내 페스티벌 기획사들은 ‘선택과 집중’의 기로에 서 있다. 큰 이름 하나에 기대며 라인업을 짜기보다 허리층의 뮤지션을 밀도 높게 채우고, 충성도 높은 장르 팬을 확실히 흡수하도록 장르 카테고리를 좁히고 있다. 올해 라인업 공개와 동시에 재즈 팬들로부터 환호를 받은 ‘서울재즈페스티벌’, 전자음악 레이버들을 겨냥하는 ‘디에어하우스’, 진짜 ‘놀고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을 확실히 끌어당기고 있는 ‘DMZ 피스트레인’ 등. 페스티벌마다 본연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추세는 애석하지만 ‘내 월급 빼고 다 오른’ 물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 될 거다.
– 김지예(프라이빗커브 제너럴 매니저)

전자 라이브의 시대가 온다
최근 발표된 ‘후지 록 페스티벌’ 라인업에는 예상하지 못한 뮤지션이 헤드라이너로 등장했다. 동시대 가장 창의적이고 발칙한 DJ이자 프로듀서 프레드 어게인이다. 그런데 프레드 어게인 아래에는 그의 절친한 전자음악가 포텟의 이름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여러 악기와 장치를 활용해 즉석에서 라이브 연주와 믹스를 구현한다는 데 있다.

요즘 시대에 전자음악 라이브의 매력은 특히나 유효하다. 무대 위 전자 악기를 동원하고, 단순히 믹스셋을 트는 걸 넘어서 즉흥적으로 트랙을 만들어 악곡 구성과 진행에 ‘라이브성’을 시도하는 추세는 언제나 환영할 만한 것이다. 이로써 뮤지션과 관객 사이 실시간 소통, 농도 짙은 스킨십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이디오테잎, 키라라, 250 등 소위 라이브셋에 강한 전자 음악가들이 있다. 조만간 전자음악가의 라이브 공연이 한국에서도 관객몰이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 이수정D(MZ 피스트레인 예술감독)

K뮤지컬 시대의 개막
팬데믹 종식 이후 국내 공연 시장은 눈에 띄게 성장했고, 2023년을 기점으로 국내 공연 시장의 규모가 영화 시장을 앞섰다. 디지털 시대의 반대 급부인 아날로그 콘텐츠 시장은 더욱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공연 시장을 대표하는 장르인 뮤지컬 시장 또한 매년 성장하고 있다.

반면 국내 뮤지컬 시장은 여전히 해외 라이선스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해외에 지급되는 비용도 적지 않은 만큼 국내 오리지널 창작 작품의 양적·질적 성장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국내 크리에이터의 성장도 그 일환이다. 이를 공감한 많은 제작사들이 대형 오리지널 작품을 출시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IP로 기획 개발에 나서는 중이다. CJ ENM을 비롯한 다양한 뮤지컬 제작사들이 원천 IP를 바탕으로 국내는 물론 글로벌을 향한 오리지널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뮤지컬 기획 개발 기간이 대략 3~5년 걸리는 걸 감안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국내는 물론 뮤지컬의 메인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극장에 한국 뮤지컬의 다양한 포스터가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K뮤지컬의 시대가 곧 도래하리라고 확신한다.
– 예주열(CJ ENM 음악공연사업부장)

New Media

무한한 스펙트럼으로 확장할 콘텐츠
숏폼과 라이브형 콘텐츠는 지금보다 더욱 증가할 것이고, 우리의 생각보다 빠른 기술 혁신으로 AI의 영향이 콘텐츠업에서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아가 최근 한한령이 풀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이로 인한 K콘텐츠 업계의 지형 변화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방송, 유튜브, SNS와 함께 ‘누가 사람들의 콘텐츠 뷰잉 시간을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경쟁하는 OTT로서는 그간 선보이지 않은 보다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의 확장을 꾀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이나 사업자에 관계없이 UGC에서 보던 콘텐츠를 지상파에서 보거나, 보다 타깃화된 스포츠나 게임형 콘텐츠도 시도할 것이고, 라이브 이벤트 등도 더 많이 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결국은 콘텐츠의 다양성으로 시청자의 선택지를 넓히며 그들을 오래 머물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모든 콘텐츠 종사자들의 숙제이므로.
– 배종병(넷플릭스 시리즈부문 시니어 디렉터)

게이 스타를 개의치 않는 세상
남성의 동성애를 다룬 BL 장르의 작품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동성애자 스타의 활약도 심상치 않다. 대표적 인물이 온라인 콘텐츠 크리에이터인 김똘똘이다. 그는 유튜브 예능 ‘홍석천의 보석함’에서 고정 패널로 활약하며 새로운 세대의 게이 스타로 떠올랐다. MBC <라디오스타>에도 출연했다. 뉴미디어와 비교하면 여전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지상파 방송에, 유튜브에서 활약하는 인물이 출연해 커밍아웃을 둘러싼 자기 삶을 들려주었다. 이 사실은 지금 시대와 환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 다른 동성애자 스타의 등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홍석천의 보석함’ 게스트 섭외 과정에서 겪은 난항이 어땠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제는 출연하고 싶어도 못하거나 대기해야 하는 연예인이 상당하다. 그간 동성애자와 관련한 콘텐츠가 적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소수만의 즐길 거리였다. 하위 문화는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제는 드러내놓고 즐기는 시대가 왔다. 홍석천과 김똘똘의 뒤를 잇는 새로운 보석 역시 지속적으로 발굴될 것이다.
– 김우경(‘홍석천의 보석함’, ‘용타로’ 메인 작가)

OTT 플랫폼의 스포츠 판권 경쟁
글로벌 OTT 시장의 성장세는 끝이 보인다. 시장이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성장은 계속 진행 중이나 그 속도가 둔화됐다는 의미다. OTT 플랫폼은 대표적인 구독 모델 중 하나로, 다양한 구독료를 기반으로 주 수익을 내고 있다. 신규 구독자 모집을 위해 새로운 무기를 수시로 장착해야 하는데, 오리지널 시리즈에 이어 향후 OTT 플랫폼의 가장 큰 무기이자 가장 효율적인 콘텐츠는 바로 ‘스포츠’ 콘텐츠라 예상한다.

최근 넷플릭스는 WWE를, 쿠팡플레이는 EPL을, 티빙은 KBO를 중계하며 나섰다. 초반 큰 투자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효율과 성과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OTT 플랫폼이 스포츠 판권을 보유하기 위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보다 스포츠 친화적인 서비스를 통해 스포츠 팬덤을 끌어올리고, OTT 플랫폼뿐 아니라 스포츠 산업 전체를 함께 성장시킬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한 때다. 결국 ‘스포테인먼트’의 방향키를 쥐는 플랫폼이 이러한 흐름의 선두주자로 떠오를 것이다.
– 민선홍(티빙 CCO)

소셜미디어 항해를 이끄는 디지털 나침반
스토리로 순간을 공유하고, 친구들과 DM으로 비밀을 나누고. 10대에게 소셜미디어는 숨 쉬는 공간이자 자아를 표현하는 캔버스다. 그들이 이 끝없는 바다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며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나침반이 보다 중요해졌다. 따스한 공감과 차가운 화살이 공존하는 곳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할까? ‘밤 10시 이후 SNS 금지’ 같은 규칙보다 더 정교한 기술적 장치가 필요하다.

올해부터 인스타그램은 ‘청소년 계정’ 기능을 한국에 선보였다.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 계정은 자동으로 비공개 설정된다. 낯선 이들의 갑작스러운 메시지는 차단되고, 밤늦은 시간에는 알림이 울리지 않으며, 민감한 콘텐츠에는 더 높은 문턱을 두어 무분별한 노출을 방지한다는 내용이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세심한 경비원처럼 유해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부모님들은 디지털 나침반을 가진 것처럼 자녀의 온라인 여정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이 스스로 건강한 소통 방식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 정다정(인스타그램 홍보 총괄)

Movie & Drama

다소 밋밋할지라도, 무해한 캐릭터
어지러운 정치 현실과 경제적 피로감에 불안과 우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이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스마일 마스크’를 쓴 채 삶을 영위한다. 더 착하게, 더 환하게, 더 악착같이. 이런 현실을 반영이라도 한 듯 최근 드라마 캐릭터의 키워드는 무해함, 배려, 그리고 대중을 위한 영웅 판타지로 집중되는 듯한 흐름이 감지된다. 경쟁의 시대 속 잉태한 영웅은 통쾌한 한 방, 요즘 말로 도파민을 선사한다. 한없이 무해해서 다소 밋밋한 남자 주인공은 역설적이게도 요즘 시대 여성의 판타지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작품 공개 전 업계에서 “글로만 봤을 때 매력 없는데?” 하며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온 캐릭터가 시장에서 제대로 통하는 걸 목도하는 요즘이다.
– 서윤혜(팬엔터테인먼트 기획본부장)

@anorafilm

AI가 바꿀 영화 산업 지형도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노라>가 주요 부문 상을 휩쓴 배경에는 ‘AI 논란’도 있다. 사실 <아노라>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시간이 꽤 흐르면서 오스카 레이스에서 꾸준히 버즈 효과를 이어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가장 유력한 작품상 후보였던 <브루탈리스트>가 주연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헝가리어 연기 발음을 교정하고 건축 도면 및 건물 신에 AI를 활용했다는 비화가 전해지면서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발음 역시 연기의 일부이며 건축 예술을 다룬 영화가 AI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 문제라는 논리다. 덕분에 <브루탈리스트>로 갔을 표를 <아노라>가 흡수하면서 막판에 승기를 잡았다.

이처럼 지금 영화계는 AI와 협력하고, 경쟁하고, 경계하고, 심지어 이번 오스카처럼 정치적 이슈로도 활용한다. 최근 AI는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도입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시상식 이슈는 AI가 인간과 영화 예술에 미칠 수 있는 파급력의 극히 일부다. 과연 AI가 영화 산업 지형도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지 기대되는 동시에 두렵다.
– 임수연(전 <씨네21> 기자)

니치한 취향을 조준하는 저예산 및 중급 영화
브로드캐스팅의 시대, 관객이 습관처럼 극장을 찾는 시대는 저물었다. 과거엔 모든 세대가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이야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다양성, 분산이 키워드인 지금 세상은 ‘마니아’성이 부각되는 시대다. 영화 매체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진 요즘엔 한 손에 잡히는 이야기, 관객을 뾰족하게 찌르는 이야기가 시장에서 통한다. 이런 작품들은 오가닉한 바이럴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누군가의 니치한 취향을 조준하거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면서 차근차근 관객 몰이를 한다.

최근 영화 <서브스턴스>의 흥행처럼 ‘50만 영화’의 시장이 한쪽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셈이다. 국내 영화 제작사들이 너도나도 저예산 및 중급 영화 기획에 뛰어드는 이유도 이 때문. 이제 텐트폴 영화의 기준은 ‘제작비’가 되지 않는다. 작년 오컬트 장르의 마니악한 작품, 약 120억원 규모의 중급 영화 <파묘>가 1천만 이상 관객을 기록한 사례처럼, 이제는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어느덧’ 텐트폴 영화가 된다.
– 이현정(쇼박스 영화사업부 본부장)

Art & Design

‘가짜’ 속에서 빛나는 ‘진짜’
팬데믹을 기점으로 인류는 많은 변화를 거쳤다. 생활 양식, 일하는 방식은 물론 가치관의 변화까지. 특히 AI와 메타버스를 필두로 한 가상의 세계는 한때 지구를 휩쓰는 듯 보였다. 빅테크 기업은 이 신기루의 성전에서 여전히 미래 먹거리를 찾고 있다. 하지만 대중도 같은 생각일까? 최근 디자인 신에서 ‘오리지낼리티’에 관심이 높아졌다. 아이러니하게 원본성을 가리기 힘들어질수록 대중은 집요할 정도로 원본의 가치를 탐색한다. 더는 미니멀리즘인지, 맥시멀리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핀터레스트에 레퍼런스는 넘쳐나고, 프롬프트 몇 줄에 근사한 이미지가 뚝딱 생성되는 세상이니까.

심미적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자 결국 대중은 진정성에 가산점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디자이너들에게 그동안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 자기 서사가 중요해졌다. 예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시도하는 창작자가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디자인에서 에고를
비우라던 가르침이 점점 무용해지고 있다.
– 최명환(월간 <디자인> 편집장)

정서적 지속 가능성의 추구
감각적 경험은 기억으로, 잔상으로 남는다. 이제 사람들은 내 집에 들일 리빙 아이템을 고를 때 경험적 소비에 무게를 둔다. 이를테면 느낌 좋은 에어비앤비에 숙박했을 때 경험한 감동을 집에서도 느끼려는 식이다. 그때 그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낀 향, 조도, 소리, 무드 등을 중요한 요소로 바라본다. 어찌 보면 과거는 미감만이 중요했던 시대다. 가구의 브랜드가 무엇인지, 메이드 인 ‘XX’가 무엇 인지에 안테나를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보기 좋은 것’의 시대를 넘어 ‘애착이 가는 것’의 시대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고 오래 쓰는 물건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는 추세다. 그간 리빙업계에서 ‘지속 가능성’은 친환경에 국한한 이야기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보다 확장한 ‘정서적 지속 가능성’을 말해야 할 때다. 공간도 물건도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나와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흐름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 김가언(챕터원 대표)

브랜딩을 위한 새로운 질서
상업과 예술 사이에서 일하는 경계인으로서 체감하는 소비와 경험 양식의 변화가 무척 가파르다. 모두가 브랜딩 전문가가 되고, 누구나 마케팅 문법에 통달할 수 있으며, 더 이상 특정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을 내세울 수 없는 시대다. ‘나만의 취향’이라는 것도 실은 알고리즘이 외주 작업한 껍데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는 브랜드나 기업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동시에 독립적이고 고유한 세계관을 지닌 크리에이터 자본의 힘이 한층 더 막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명한 걸로 유명한 이들을 내세워 바이럴하는 기존 ‘인플루언서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렸다. 이제 브랜드와 크리에이터 간의 협업은 누구나 쉽게 범접하기 힘든, 새로운 진입 장벽을 구축하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자본의 흐름은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이 아닌 비즈니스 ‘세계관’을 설계하는 이들을 향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 최서연(카바 라이프 디렉터)

미술 시장에 부는 저속 성장 흐름
지금 한국 미술 시장은 천천히 그리고 재성장을 위해 숨을 고르는 중이다. 더욱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지난 3년간 한국 미술 시장은 잠재된 인프라의 폭발로 기회와 성장의 시기를 거쳤다. 어느 시대의 발전이 그렇듯 일종의 성장통이 동반되는 추세다. 과열 열기 속 미술 시장은 양극화 현상과 함께 투기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진짜와 가짜들 사이에서 혼돈을 겪기도 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컴컴한 무대처럼 현재 미술 시장은 차가운 분위기 속 거래가 감소하고 경직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저속 노화 식단처럼 좋은 작가와 작품을 섭취하고 귀한 전시와 갤러리를 응원하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흐름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 천천히 숨을 고르며 건강한 미술 시장의 미래를 그려가야 할 때다. 신진 작가 및 갤러리를 육성하고, 해외 미술 시장을 지속적으로 두드리고, 국내외 경계 없이 미래 고객층을 확보하는 것이 저속 성장의 방향키로 보인다.
– 조윤영(더프리뷰 디렉터)

Book

‘죽은 책’이 산 출판계를 구할 수 있을까
지난 수년간 ‘오래된 미래’들이 출판계를 이끌어왔다. 출간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양귀자의 <모순>이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누리고, 쇼펜하우어, 니체, 카네기 등 근현대 철학자와 작가들부터 이제는 부처님까지 서점가를 점령했다. 올드보이, 올드걸의 성공적인 귀환이, 시간의 더께가 묻은 책들이 출판계에 펼쳐진다. 젊은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과거가 열리는 셈이지만 저들의 생각이 시대정신과 어울리는지는 의문이다. 출판 기획은 마케팅 기획으로 대체되고 있다.

지금은 발굴 마케팅이 트렌드다. 출판 기획이 마케팅 기획으로 대체되는 흐름이 좋든 싫든 앞으로 계속되리라는 건 확실하다. ‘죽은 책’이 살아 있으나 서서히 죽어간다는 출판계를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의문이 생긴다. 한강의 저 아름다운 문장은 출판계가 전통과 역사의 새로운 전승자로 자리하려 할 때만 진리로 작동할 것이다, 바른 맥락에서 말이다.
– 김지영(교보문고 도서구매팀장)

도서관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다
‘금서’가 20세기의 잊힌 유물이라 생각하겠지만, 지금 세계 곳곳을 둘러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미국 도서관에선 성과 폭력, 체제에의 저항, 여성과 소수자, 사유의 다양성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도서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로 지금 도서관들은 금서 지정 논쟁을 둘러싸고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등이 이 논쟁의 중심에 선 책이라면 믿을까?

하지만 출판의 역사가 증명하듯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존재였고, 금서 지정은 오히려 그 책의 첫 번째 장을 펼쳐 읽어야만 하는 확실한 이유였다. 2025년을 기점으로 금서 논쟁은 더 확산될 것이며 금서로 지정된 책들은 오히려 금서로 지정됐다는 그 이유로 더 많은 독자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금서는 한 세계의 벽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을 지닌, 송곳 같은 응집력으로 가득한 책이다. 금서를 읽는 일은 그 시대를 초극하여 조망하려는 작지만 거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 김유태(<매일경제신문> 기자)

F&B

거듭되는 재창조의 맛
요즘 시대 식음료 분야에서 과연 천지 창조 수준의 ‘완전한 새로움’이 있을까? 근래 왕왕 보이는 AI가 개발한 레시피도 방법적 측면에서 새로울 뿐, 결국 데이터베이스의 조합이다. 그렇다고 먹고 마시는 일이 고루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인류의 창의성이 기초 자료에 기반한다고 봤을 때, 특히 식음료에서는 각 나라의 고조리서를 비롯해 옛것을 탐구하는 정신이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을 ‘발굴’하거나, 오늘날 향유할 수 있는 형태로 ‘재창조’하는 움직임이 이 시대의 새로운 맛이다. 우리는 이 움직임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클래식 칵테일을 재해석한 모던 클래식 칵테일이다. 그것이 태동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 이를 또 한 번 전복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관련 메뉴를 새롭게 론칭한 ‘앨리스 청담’이 붙인 이름을 빌려 말하자면 ‘밀레니엄 칵테일’이다.
– 장새별(스타앤비트 대표)

하이퍼-스페시픽 퀴진이 뜬다
최근 글로벌 파인다이닝 신에서는 단연 ‘하이퍼-스페시픽 퀴진’이 돋보인다. 과거에는 많은 로컬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 단순히 ‘모던 태국 요리’ 또는 ‘한식 컨템퍼러리’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개념으로 스스로를 정의했지만, 지금은 ‘태국 남부 요리’나 ‘고조리서 중심 한식’처럼 보다 정교하고 구체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 다이닝 신 역시 마찬가지다. 궁중 요리, 반가 요리, 사찰 음식, 혹은 서민적인 한식의 요소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며 차별화된 정체성이 레스토랑의 스타일이 되고, 먹는 고객도 그 차이를 즐기고 탐험한다.

외국인에게도 과거의 한식은 단순히 ‘비빔밥’, ‘김치’, ‘불고기’ 정도였지만, 이제는 이북식 요리와 전라도 손맛의 차이를 논한다. 한식, 그리고 한국 파인다이닝의 다층적인 면이 점차 조명받으며, 요리의 뿌리와 문화적 배경까지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파인다이닝이 지속 가능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경험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 이정윤(다이닝미디어아시아 디렉터)

칵테일도 요리가 될까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클래식 칵테일에는 여러 갈래의 맛이 존재한다. 시트러스한 재료가 들어간 상큼한 맛 (모히토, 김렛), 주스나 시럽을 활용한 달콤한 맛(피나 콜라다, 미도리 사워), 쌉싸래한 풍미가 특징인 칵테일까지 (네그로니, 맨해튼). 이러한 칵테일의 장르는 다채로운 플레이버로 뻗어 나가고 있다. 파인다이닝의 요리에서 맛볼 법한 감칠맛(Savory), 톡 쏘는 향신료, 허브와 소금 등 미각에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흥미진진한 시그너처 칵테일이 등장하고 있다.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로 만든 마티니의 맛이 상상이 가는지? 발효시킨 토마토, 표고버섯 등 예상치 못한 채소가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참깨, 말린 새우의 육수 등을 활용한 ‘파인 드링크’의 세계는 점점 복잡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이 신세계를 지금 국내에서 맛보려거든 지난 3월 오픈한 바 ‘페르마타 서울’을 권하고 싶다. 블러드메리를 고추장으로 재해석한 칵테일, 버섯을 젖산 발효하여 만든 세이보리 칵테일 등 지금 가장 재치 있는 파인 드링크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김아름(주류회사 컬처 매니저)

Architecture

나무로의 전환
콘크리트 시대가 저물고 있다. 여전히 아파트에 매몰된 한국에서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후위기와 맞물려 건축 산업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AI가 건축 설계 업역을 흔든다지만, 가장 오래된 건축 재료인 나무가 산업의 변화를 추동하는 중이다. 국내에서도 공공 건축물에는 일정 비율 이상으로 나무를 사용해야 하는 의무 규정이 이미 시행 중이다.

목구조 건물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한중일만이 아니다. 건축의 주재료가 돌과 벽돌이었던 유럽에서도 나무를 잘 다룬다며 전통에 줄을 댄다. 덴마크나 스웨덴은 바이킹의 선박 건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식이다. 그런데 나무 건축을 둘러싼 패권은 평범한 건물을 나무를 사용해서 짓는 보편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이에게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 몇 년간 관전 포인트다. 참고로 100여 년 전 콘크리트도 같은 과정을 겪었고, 보편적인 해법의 주인공은 ‘돔-이노’를 제시한 르코르뷔지에였다.
– 박정현(건축 잡지 <미로> 편집장)

마땅히 환영받아야 할 반기술주의
모든 툴의 시작은 혁신이었다. 모터가 달린 톱도, 고회전으로 돌아가는 날물이 달려 복잡한 몰딩을 깎아내는 루터도 지금은 흔하지만 아마도 그 등장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CNC(컴퓨터수치제어) 설비가 시장에 널리 보급되고 처음 몇 년간은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가구를 여기저기서 만나야 했다. 곡선 가공의 구현이 너무 쉬워진 탓일까, 그 유혹을 넘어서지 못하는 많은 디자인이 넘쳐흘렀다. 희한하고 못생긴 곡선의 전성시대였다. AI의 발전만 하겠냐만은 포터블 CNC부터 초고속 정밀 3D 프린터까지, 공작 기계의 발전은 매우 빠르다. 새로운 툴에 종속되지 않고 창의적인 활용과 좋은 품질을 만들겠다는 태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깃든 건축이야말로 앞으로 주목받을 테다.
– 김한준(그라운드아키텍츠 대표)

Travel

더 진화한 펫 프렌들리 투어리즘
단순한 관광을 넘어 여행 자체가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요즘이다. 반려동물과 동반하는 여행은 예부터 있었지만, 이제는 국내 숙박업소에서 ‘펫 프렌들리’의 범위를 더욱 확장해 바라본다는 게 주목할 만하다. 반려동물 전용 메뉴가 있는 식당, 펫 스파,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 등 보다 세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반려동물 친화관광도시 활성화 사업을 통해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펫 관광 자원 100선을 발표하는 등 정부 차원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활발하다. 2022년 국내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약 8.5조원, 2032년엔 약 21조원 규모로 훌쩍 상승할 거로 예상된다. 펫 프렌들리 투어리즘의 신세계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 유진호(한국관광공사 관광콘텐츠전략본부장)

물리적 화려함에서 개인화 경험으로
럭셔리 호텔의 정의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과거에는 5성급 서비스, 화려한 인테리어, 프리미엄 입지와 같은 물리적 요소가 럭셔리를 결정하는 주요 기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럭셔리 숙박업계에선 ‘개인화된 경험’이 새로운 가치 척도로 부상하고 있다. 투숙객은 이제 내가 열정을 느끼는 클래스가 제공되는지, 우리 가족의 입맛에 꼭 맞는 다이닝 옵션이 있는지, 내가 온전히 몰입하고 싶은 도시 풍경이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중요시한다.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는 뷔페 테이블이 아닌 나에게 맞춰 제공되는 파인다이닝을 즐기듯 맞춤화되고 절제된 서비스를 찾는다.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나 소수의 VIP만을 위한 하이엔드 부티크 호텔이 고객 데이터를 세심하게 분석하며 맞춤형 서비스 혁신에 집중하는 이유다. 업계 선두주자들은 더는 획일화된 럭셔리 정의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 결국 진정한 럭셔리 호텔은 그곳이 ‘얼마나 비싼가’가 아닌 ‘얼마나 나에게 의미 있는가’로 재정의되는 시대다.
– 유은혜(브룩스 투 리버스 대표)

사진
각 Instagram, Unsplash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