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DEM 2025 FW 컬렉션
조나단 앤더슨, 몰리 고다드, 마르케스 알메이다 등 몇몇 디자이너가 이탈하여 규모가 축소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번 런던 패션위크에서 에르뎀의 존재감은 더욱 빛이 났다. 컬렉션의 베뉴는 여느 때와 같이 과거와 현재가 수없이 교차하는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의 아트리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실존했던 여성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구상하곤 한다. 가장 최근의 예를 들면 2024년 SS 시즌에는 18세기 사교계 여왕이었던 데본셔 공작부인, 2024 FW 시즌에는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2025년 SS 시즌에는 소설가 래드클리프 홀(Radclyffe Hall)의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예외적으로 스코틀랜드의 화가 케이 도나치(Kaye Donachie)와 콜라보를 통해 영감을 주고받았다. 에르뎀 모랄리오글루와 케이 도나치는 런던 왕립예술학교(RCA) 출신의 동문으로, 에르뎀 모랄리오글루가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초상화를 최근 케이 도나치에게 의뢰한 것을 인연으로 이번 시즌의 콜라보까지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동시대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시적 허용을 통해 과거의 인물을 기록하는 케이 도나치의 작업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케이 도나치의 초상화는 인물 그대로의 묘사가 아니라 관찰과 본능에 기반한 추상화다. 그것은 더 본질적인 것을 포착하는 거의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극찬했다.
의상 곳곳에 케이 도나치가 그린 초상화와 꽃이 아플리케로 놓았다. 케이 도나치가 ‘모르는 사람들’을 그리며 취한 일종의 시적 허용은 에르뎀 컬렉션 전반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케이 도나치가 작품을 구상할 때 상상과 현실 사이에 드리운 베일이 섬세한 오간자 소재의 드레스로 형상화된 듯했다. 초상화를 넣은 오간자 시스 드레스는 거의 신비로워 보일 정도였다. 첫 번째 룩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려 200여 개의 오간자를 테스트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케이 도나치가 그림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면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과거의 실루엣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생생하게 재해석하고 있다. 바로 이런 충돌이 콜라보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투명한 잠자리 날개 같은 오간자를 비롯해 영국적인 핀 스트라이프 모직, 풍부한 양감을 내는 브로케이드, 두툼한 볼륨감을 만들어내는 실크 타프타, 다채로운 굵기의 니트 등 풍성한 소재로 구현한 클래식한 룩 중간 중간 미드리프를 과감하게 드러낸 크롭 톱, 비정형적으로 좌우를 다르게 테일러링한 디테일, 모던한 네오프렌 소재 등을 믹스하며 에르뎀만의 경쾌한 분위기를 뽐냈다. 케이 도나치가 유화로 그린 캔버스를 그레이 컬러 핀 스트라이프 스커트에 직접 본딩한 룩이 시선을 끌었고, 거대한 꽃잎을 여러 겹으로 레이어링한 것 같은 피날레의 러플 드레스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한편, 꿈꾸는 듯 부드러운 컬러 팔레트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서 영감을 받은 것.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20세기 초반의 영국 문학은 에르뎀 모랄리오글루에게는 끊임없는 영감의 창고라고. 핑크부터 그린까지 은은한 파스텔컬러는 뿌연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풍경이 비치는 소설 속 스코틀랜드 해안 풍경을 연상케했다. 쇼 노트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인용문이 쓰여 있었다. “그녀가 푸른 페인트에 손을 대는 동안, 그녀는 과거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 사진, 영상
- Courtesy of Erd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