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 게임은 오로지 게임에만 갇히지 않는다.
게임 장르만의 특수성이 선명하지만, 그 선명함은 도리어 다른 장르와 만났을 때 더욱 특별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이 호환성과 교차성으로 게임은 미술, 음악, 영화, 언어의 영역과 만나며 유쾌한 ‘레벨 업’을 그리는 중이다. 게임이 서로 다른 4가지 장르와 만나 빚어낸 흥미진진한 세계가 여기 있다.
게임과 미술이 만날 때
레디메이드인 남성용 소변기를 예술 작품 ‘샘(Fountain)’(1917)으로 제시하며 현대미술사의 판로를 바꿔놓은 예술가, 마르셀 뒤샹. 그는 알려진 것보다도 흥미로운 면모가 꽤 많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가 상당한 실력의 프로 체스 선수였다는 것이다. 뒤샹은 1920년대 초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완전히 체스에 매진하여 자타가 공인한 체스 선수가 되었다. 혹자는 뒤샹이 체스 때문에 예술을 포기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간 뒤샹의 체스 선수 활동은 예술 활동이 아닌, 예외적 활동 혹은 취미로 간주되었다. 우리 중에도 뒤샹을 체스 선수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뒤샹과 체스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1920년대 이후 간헐적으로 이어진 작품 활동에서 체스 게임 자체를 레퍼런스로 삼거나 체스 게임의 구조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여 활용한 것이 밝혀지면서 체스야말로 뒤샹의 예술 세계 전반을 지탱하는 핵심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례로 1963년 뒤샹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파사디나 미술관에서 개최된 본인의 회고전에서 예술가 이브 바비츠(Eve Babitz)와 전시장 안에서 체스를 둔 적이 있다. ‘포켓 체스’(1943)나 ‘1932년의 상자’(1932) 같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32명의 다른 예술가를 체스 말로 형상화한 뒤샹의 1944년 기획전 <체스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다. 이토록 체스를 사랑했던 뒤샹이 “모든 예술가들이 체스 선수는 아니지만, 모든 체스 선수들은 예술가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모든 체스 선수는 게임을 통해 예술을 하는 것일까? 미술과 게임의 만남은 어디로부터 촉발되는 것일까?
체스에 대한 뒤샹의 주목이 당대의 게임 형식에 주목한 일이었다면, 동시대 미술가들 역시 우리 시대의 게임 형식에 주목하고 있다. 래리 아치암퐁(Larry Achiampong)과 데이비드 블랜디(David Blandy)가 제작한 비디오 작품 ‘FF Gaiden’(2016~2017)처럼 게임 ‘GTA’나 ‘마인크래프트’의 시각적 형식을 미술관 안에서 접하는 일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뉴욕현대미술관과 스미스소니언미술관 등 해외 유수의 미술관들이 ‘팩맨’(1980)이나 ‘테트리스’(1984) 같은 불멸의 고전 게임부터 ‘포털’(2005~07), ‘심시티 2000’(1993) 같은 비디오 게임을 소장품으로 수집했고, 전시장 안에 조이스틱 같은 게임 컨트롤러가 놓이는 것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먼저 게임의 플레이보다 내용에 주목하는 작가들이 있다. 게임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이안 쳉(Ian Cheng), 가브리엘 마산(Gabriel Massan)과 같은 예술가들은 언리얼 엔진과 같은 게임 엔진을 활용하여 제작한 게임적 이미지를 작품 안으로 적극 수용하면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김아영, 김희천과 같은 한국 출신 예술가의 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김아영의 경우 게임 엔진 기반의 CG 등을 활용해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동양의 전통적 역법과 시간관에 주목하여 이를 새로운 가상 세계의 내러티브로 복원하고, 김희천 역시 게임 엔진, AR, VR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젊은 세대가 공유하는 미래에 대한 우울과 좌절감을 흡인력 있는 영상으로 제시해왔다. 이러한 류의 작업은 우선 게임적 이미지로 세계를 재현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들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모습, 우리 사회의 풍경을 제3의 시점에서 가시화한다. 나아가 인위적으로 조성된 가상의 시공간은 지금과는 다른 현실의 모습, 대안적 현실을 상상하는 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게임 내 세계는 단순히 가상의 시공간이 아니다. 게임은 우리 현실을 시뮬레이션으로 상연하는 가상 현실 매체이다.
다른 한편, 코리 아칸젤(Cory Arcangel)의 비디오 작품 ‘/로데오/ 할리우드 플레이하기’(2021)처럼 보다 직접적으로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작품들이 있다. 국내 게임 개발자 멜트미러의 ‘POG’(2024)도 감상이 아닌 플레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여기 속한다. VR 기기를 착용하고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나 AR을 활용해 관객의 특정 행위로 작품을 전개하는 인터랙티브 작업도 같은 종류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객에게 작품에서 해야 하는 어떤 일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을 작품 안으로 더욱 몰입하게 하고 관객의 수행, 즉 플레이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러한 수행성을 통해 작품의 완성에 관객과 그 참여를 필수적 요소로 부각한다.
게임 매체를 대하는 예술가들의 두 가지 접근 방식은 다시 한번 체스에 관한 뒤샹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는 모든 체스 플레이어가 두 가지 미적인 즐거움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시를 쓰는 것과도 같은 설계의 추상화, 둘째로는 체스보드 위의 설계를 육체적으로 수행하는 감각적 즐거움이다.” 전자의 작업이 세계를 게임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추상화로 지적 즐거움을 강조하는 한편, 후자의 작업은 작품 안에 관객을 직접 연루시키며 수행적 즐거움에 조금 더 무게를 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적 즐거움과 수행의 즐거움은 예술을 감상하는 동안 관객의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요소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보는 일은 먼저 눈이라는 생물학적 신체 기관을 사용하며, 본 것을 뇌를 통해 재구성하고 그것의 상(像)을 구성하는 과정은 고도의 지적 처리를 요구한다. 예술가들은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와 같은 고도의 지적 처리가 게임 플레이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각한 것이다.
한 가지 더, 게임이 제공하는 가상 세계의 특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상 세계는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물리적 규칙을 넘어 상상력의 한계까지 우리를 밀어붙인다. 혹자는 게임 안에서 구축된 가상 세계가 완전히 가짜이자 허구이며 허황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가상 없이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종이다. 미래를 계획하며 장래를 설계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수준의 상상부터 게임이나 만화 속 하늘을 나는 말과 초능력을 사용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지극히 허황된 수준의 상상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양쪽이 다 가상의 상황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중세 교회의 종교화는 천국의 영광을 상상했고, 고대의 동굴 벽화는 내일 사냥에서 마주칠 동물을 상상했으니 미술의 기원은 가상을 구축하고 그 안을 탐색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도래할 미래의 이미지를 그리는 예술가들이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를 구축하는 각종 게임 엔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떤 이유이든, 그들의 관계는 이제 막 말 몇 개가 움직였을 뿐이다. 말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엔드 게임이 다가온다. 성큼.
글 | 김여명(전시 기획자)
게임과 음악이 만날 때
게임 음악 콘서트의 주 고객층은 단연 해당 게임의 울트라 마니아들이다. 임윤찬, 조성진 협연 정도가 아니라면 이만한 모객이 쉽지 않은 클래식계에서, 게임 음악 레퍼토리는 산업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금광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젠 ‘모냥’도 빠지지 않는다. 게임 음악이 ‘뿅뿅 사운드’로 대변되던 시대는 거의 우리 전생에 가깝다.
최근 몇 년 사이, 게임 음악이 세계 클래식계를 뒤흔들고 있다. 대중이나 시청자를 위한 팝스 오케스트라의 유쾌한 이벤트성 ‘열린음악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근년에 각각 게임 ‘파이널 판타지’와 ‘젤다의 전설’의 OST 콘서트를 성황리에 열었다. 국내의 유수 오케스트라, 프리미엄 콘서트홀도 팔을 걷어붙였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 등이 ‘메이플스토리’, ‘로스트아크’ 등의 게임 OST 공연으로 롯데콘서트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을 가득 메운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계는 오랜 세월 비발디부터 말러까지, 즉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그야말로 고색창연한 작품들, 클래식(古典)만이 클래식 음악의 견고한 테두리 안에 들어왔고 이는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게임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 1980년대부터 2020년대 사이에 등장했으며 발레나 오페라를 위한 음악도 아니다. 지휘의 세계를 밀도 있게 다룬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타르>에서도 게임 음악은 몰락의 오브제로 등장하지 않나.
게임 음악의 ‘클래식 인베이전’은 그래서 발칙하다. 가히 역성혁명에 가깝다. 이것을 추동하는 첫째 요인은 티켓 파워요, 세일즈다. 이들 게임 음악 오케스트라 콘서트는 대개 예매 오픈 5분 내외에 ‘광속’ 매진된다.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아이템을 모으고 게시판에서 갑론을박하는 것을 넘어서 게임 음악 공연까지 찾는 이들이라면 그 ‘덕력’을 가늠할 만하다. 게임 음악 콘서트의 주 고객층은 단연 해당 게임의 울트라 마니아들이다. 임윤찬, 조성진 협연 정도가 아니라면 이만한 모객이 쉽지 않은 클래식계에서, 게임 음악 레퍼토리는 산업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금광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젠 ‘모냥’도 빠지지 않는다. 게임 음악이 ‘뿅뿅 사운드’로 대변되던 시대는 거의 우리 전생에 가깝다. 메이저 게임 제작사의 경우, 할리우드 영화음악 거장에게 작곡과 편곡을 맡겨 완성한 사운드트랙을, 수십 인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영국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 등지에서 녹음한다. 조잡한 8비트 사운드를 넘어 바야흐로 웅장한 80인조 오케스트라의 시대다.
게임 사운드트랙의 크레딧에서는 영화음악계의 ‘빅 네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 <듄>의 음악감독인 한스 짐머도 이미 2009년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 2018년 ‘피파 19’의 음악 제작에 참여했다. 영화 <21그램>, <바벨>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2편까지 음악을 맡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고품질의 음악 덕에 음악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게임, 게임 음악으로도 유명하다. 이렇듯 유명 음악가들이 게임 음악에 눈을 돌린 까닭은 막대한 개런티와 풍요로운 작업 환경 덕이다. 해외 대형 제작사의 경우, 게임 한 편에서 사운드트랙에 쏟는 예산만 100만 달러(약 14억원)를 넘나들 것으로 관련 업계는 추산한다. 이는 작곡, 편곡, 녹음 등에 드는 비용을 합산한 것으로, 이름 있는 작곡가에게 맡길 경우 작곡 비용만도 10만 달러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는 엔씨소프트의 ‘아이온: 영원의 탑’을 2000년대 중반 작곡가 양방언이 담당하면서 화제가 됐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곡 ‘Frontier’,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와 <도자기>,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음악감독 등을 담당한 그는 처음엔 ‘아이온’ 작업 제안을 받고 크게 망설였다고 한다.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사가 건넨 게임 데모 화면을 보고 그 퀄리티에 놀라 수락했다고 한다. 현재는 한중일 3국을 오가면서 대작 역사 판타지 게임 작업을 자신의 중요한 디스코그래피, 필모그래피에 주저 없이 올리고 있다.이렇게 위상이 높아진 게임 음악은 전통과 보수의 가치가 클래식보다 더 엄중해 보이는 국악계마저 움직이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지난해 혁신적 프로젝트 하나를 론칭했다. 이름하여 ‘게임 사운드 시리즈’다. ‘PUBG: 배틀그라운드’,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대작 게임의 사운드트랙을 대금, 소금, 생황, 타악 등 국악기 중심으로 재편곡해 음원으로 출시하는 작업이다. 이지수, 김진환, 양승환 등 유수의 작곡가들이 편곡에 참여했다. 지난해 5월과 12월 이 프로젝트의 청음회 MC를 맡았는데, 현장에서 ‘PUBG: 배틀그라운드’의 수록곡인 ‘The First Survivor’에 절묘하게 삽입된 ‘이생강류 대금 산조’를 듣는데 등줄기로 고압 전류 같은 소름이 흘렀다. 국립국악관현악단도 지난해 11월 국립극장에서 MMORPG ‘천하제일상 거상’을 주제로 다섯 명의 작곡가가 각자의 작품을 완성한 뒤 공연 현장에서 작곡 배틀을 벌이는 형식의 공연을 열었다. 청중의 투표로 그날의 작곡 승자를 가린다는 형식마저 다분히 게임적이었다.
한편 대중음악계, 특히 K팝에서는 콘텐츠의 ‘게임성’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가수라는 인격의 존재론적 변화가 이를 추동한다. 팬으로서 우러러보는 우상 ‘아이돌’에서 ‘플레이어로서의 나’가 육성하는 ‘아이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2016년 Mnet <프로듀스 101>을 기점으로 연습생까지 대거 시장에 들어오면서 팬이 ‘픽’하고 키워내는 아이돌이라는 개념은 더욱 확장됐다. 한편 더 나아가 2013년, 엑소의 밀리언셀러 달성은 음악계 ‘확률형 아이템’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기획사들이 본격적인 실물 음반 경쟁과 과잉 판촉의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아이돌 음반엔 랜덤의 포토카드나 팬 사인회 응모권이 삽입되고, 이런 게임성이야말로 K팝 산업의 성장, 한국식 팬덤 문화의 세계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방탄소년단을 키워낸 빅히트뮤직이 하이브로 거대화되고 주식시장에 상장하면서 게임 업계 인재들을 음악계로 대거 영입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게임성’을 더 노골화한 기획도 생겨난다. 이를테면 2023년 데뷔한 24인조 걸그룹 트리플에스는 ‘코스모’ 라는 앱 안에서 게임적 세계관으로 팀을 운영한다. 24명의 멤버에겐 이름과 함께 S1부터 S24까지 넘버가 부여돼 있다. 그룹 활동을 좌우하는 팬 투표를 ‘그래비티’ 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라 ‘디멘션’이 결정된다. 디멘션은 ‘발라드 디멘션’, ‘댄스 디멘션’ 등 유닛 같은 활동의 단위 또는 형태를 의미한다. 유저(또는 팬)들은 ‘스위치’ 버튼을 통해 두 명의 S를 어느 팀으로 배정할지 결정하기도 한다.
음악의 ‘게임성’은 앞으로 더 확장될 것이다. 아니, 음악은 게임이 될 것이다. 지난해 가상 가수 최초로 TV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한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 에스파 세계관 속의 캐릭터를 넘어 2024년 정식 가수로 데뷔한 ‘나이비스’는 출발점일 뿐이다. 인공지능 창작 도구의 발전으로 만인이 작곡을 하고 만인이 제작해 유통할 수 있는 시대, ‘요즘 내가 만들어 키우는 이 아이돌 어때?’, ‘내가 만든 새로운 장르, 죽이지?’가 일상의 대화인 시대가 온다면? 음악은 더 이상 남에게 열광하는 소비 산업이 아니라, 내가 직접 플레이하는 예술 장르가 될 것이다. 지금의 게임처럼 말이다. 근미래의 일이리라 확신한다.
글 | 임희윤(대중음악 평론가)
게임과 영화가 만날 때
게임은 영화를 꿈꾸고, 영화는 게임으로 완성된다. 게임과 가장 가깝고 유사한 매체를 꼽는다면 대부분 영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의 역사는 길고, 인기 영화가 게임으로 재탄생하는 사례도 무수히 많다. 이야기 체험을 시청각의 형태로 풀어간다는 점에서 게임과 영화는 여러모로 닮았다. 하지만 실은 게임과 영화만큼 근본이 다른 엔터테인먼트도 드물다. 화려한 영상과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 등 겉으로 보이는 요소들은 유사할지 모르나, 게임과 영화 사이 차이는 마치 평행우주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한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처절한 실패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의 영화화는 숱하게 시도되었지만 대부분 성공한 게임의 인기를 업고 2차 창작물을 만드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툼 레이더>, <레지던트 이블> 정도가 그나마 시리즈화되었고,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2010), <어쌔신 크리드>(2017) 모두 원작의 명성에 비해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원작의 영화화는 한계가 뚜렷하다. 원작을 그대로 따라 하면 반복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듣고, 반대로 원작을 벗어나 영화적인 시도를 하면 기존 팬들의 반발을 부른다. 이는 꼭 게임이 아니라도 원작이 있는 콘텐츠라면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지만,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경우는 그 반발이 특히 더 거셌다. 아무래도 게임과 영화의 결과값이 얼핏 닮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이머와 영화 팬, 양쪽 모두 서로를 초월하는 새롭고 거대한 경험을 원했지만 1980년부터 시작된 게임 원작 영화의 초창기 모델은 이를 달성하기에는 요원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막상 게임을 영화화하려 했을 때 기존 스토리텔링 콘텐츠들, 예를 들면 소설과 결정적 차이를 마주한다. 그대로 옮길 만한 서사가 없거나 너무 짧았다. 당시 영화계의 관심을 받던 게임의 주류는 아케이드나 격투 게임이었고, 이 게임들의 스토리는 매우 단편적인 설정에 가까운 로그 라인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방대한 설정과 스토리를 가진 롤플레잉 게임이나 시뮬레이션 게임 등은 제작이 쉽지 않다는 등의 크고 작은 이유로 아직 관심 바깥에 있었다.그리하여 최초의 비디오게임 원작 영화로 낙점된 것이 당대 최고의 아이콘 중 하나였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였다. 1993년 로키 모턴 감독의 <슈퍼 마리오>는 원작의 캐릭터만 일부 빌려오되 전혀 다른 스토리로 각색되었다. 표현 기술의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여기엔 일정 부분 ‘영화’라는 매체의 우월함과 오만함도 깔려 있었다고 본다. 겨우 ‘게임’을 무려 ‘영화’로 만들 때는 새로운 스토리를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변명하긴 어렵다. 심지어 적은 제작비에 여러 가지 특수효과도 필요한 까닭에 자연스럽게 저예산 B무비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그마저 B무비 특유의 기발함으로 승화시키기보다는 기술의 한계로 인한 조악함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그렇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탓인지 90년대 이후 등장한 게임 원작 영화는 인기 원작을 팔아먹는 수준 낮은 오락물이란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긴 암흑기를 거쳐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 등 성공 사례가 나왔지만 여전히 한계를 극복하긴 어려웠다. 특히 게임제작사에서 야심을 발휘해 영화 제작에 뛰어든 사례들이 뼈아픈 실패를 맛보았다. 2001년 <파이널 판타지>나 2016년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의 실패는 재앙에 가까웠고, 더 이상 대규모의 게임 원작 영화는 나오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스튜디오에서도 중저예산 호러 영화와 비슷한 포지션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계를 돌파한 건 돌고 돌아 다시 캐릭터 IP의 성장 덕분이었다. 숱한 실패에도 영화사들이 게임 원작 영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게임 산업이 영화에 견줄 만큼(때론 초월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일부 팬층을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을 볼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됐기 때문에 다시금 대형 제작이 이어졌다. 물론 IP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 제작 모델이 자리 잡은 것도 컸다. 그리하여 <수퍼 소닉>(2020)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세 번째 속편까지 제작되며 성공작으로 자리 잡았고, <앵그리버드 더 무비>(2016), <명탐정 피카츄>(2019) 등 흥행작이 속속 등장했다. 그리고 2023년 다시 부활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역대 게임 원작 영화 중 흥행 1위를 차지하며 여전히 유효한 흥행 모델임을 증명했다.
상업적인 흥행과 안정적인 시장의 확보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도해볼 좋은 터전이 된다. 사실 영화는 1950년대부터 멀티 스토리, 멀티 엔딩을 시도해왔는데, 이미 게임에서 그 모범 답안이 구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가 게임을 닮아가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던 것처럼 게임 역시 영화의 특정 요소를 채용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시네마틱 게임으로 불리기도 하는 <라스트 오브 어스> 같은 게임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공들인 그래픽과 향상된 조작성은 물론 게임 디자인 면에서도 치밀한 구성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새로운 체험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작품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이미 드라마로 제작되어 호평을 거두었고, 게임에서도 속편 <라스트 오브 어스 2>를 통해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훌륭한 답변을 제시했다. 평행선을 달려온 게임과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관객과 게이머의 행위에 있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게이머는 게임을 수행한다. 겉모습은 매우 닮았지만 작동 메커니즘의 방향성은 수동과 능동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오랫동안 이 점을 간과한 채 ‘이야기’만 이식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를 반복했다. 주변 여건이 빠르게 변하는 와중에 2025년 현재, 게임과 영화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와 IP가 중심이 되는 확장과 변주의 결과물을 선보이는 중이다. 매력적인 캐릭터,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IP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매체 간 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평행선을 달릴 것 같던 영화와 게임이 다시금 서로 닮아간다. 어쩌면 중요한 건 형식이나 방식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이 1970, 80년대 인기 IP들을 한자리에 모아 축제를 벌인 것처럼 오직 즐거움을 향한 시도는 결국 끝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부터 <레디 플레이어 원>까지, 끝과 끝은 통한다. 게임이 꿈꾼 영화의 자리, 영화가 꿈꾼 게임의 형태. 정상에 오르면 결국 만나는 것처럼, 게임의 현재와 영화의 미래는 ‘즐거운 놀이의 장’에서 마침내 함께 어우러지는 중이다.
글 | 송경원(<씨네21> 편집장, 영화 평론가)
게임과 언어가 만날 때
언어는 탄생, 지속, 소멸이라는 생명력을 갖추고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가 생성되고 어떤 단어는 사라지기도 한다. 게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새로운 단어의 원천 중 하나이며, 이는 게임 문화가 대중화되고 영향력을 갖게 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속상한 떼껄룩, 카리스마 떼껄룩.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올려놓은 고양이 사진 아래에 붙은 ‘떼껄룩’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귀엽게 ‘냥이’로 부르는 것처럼 ‘떼껄룩’도 고양이를 부르는 다른 말 정도로 생각했을 수 있고, ‘냥이’의 유행이 지나가고 ‘떼껄룩’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허접’은 어떠한가? ‘떼껄룩’은 못 들어봤을 수도 있지만 물건이나 사람 이름에 바로 결합하여 비하하거나 폄훼하는 말로 쓰이는 ‘허접’은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온라인 용어 또는 유행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 ‘Good Game’을 나타내는 ‘GG’를 하나 더 든다면? 이제 게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가리키는 말인 ‘냥이’, ‘떼껄룩’은 일종의 유의어로 볼 수 있다. ‘냥이’는 단일어인 ‘고양이’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고’를 떼어내고 고양이가 우는 소리를 흉내 내면서 귀여움을 더하는 의도로 만들어낸 말로 볼 수 있다. ‘냥이’의 어원은 이해가 쉽고 설명이 붙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떼껄룩’은 전혀 감이 오지 않을 수 있다. 단어 고양이와 음성적 유사성도 없고 동물적 특성을 흉내 낸 의성어나 의태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단어는 게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부터 비롯된 말이기 때문이다. 게임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에서 아이템을 살 수 있는 보부상으로 인간의 신체에 고양이 얼굴을 한 카짓 종족이 나오는데, 이들이 응대할 때 말하는 ‘Take a look’이 ‘떼껄룩’처럼 들린다. 마치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를 ‘아녕아세요’로 잘못 듣는 것과 같다. 게임 유저들은 카짓 종족을 ‘떼껄룩’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 단어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고양이를 ‘떼껄룩’으로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신조어 중에는 게임에서 온 말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레벨 업’, ‘아이템’, ‘퀘스트’ 등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게임 용어가 많다. 그런데 신조어가 생명력과 전파력을 갖추려면 그 단어에 대한 광범위한 언중의 인정이 필요하며, 단어 구조와 의미가 합리적이고 화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상황을 그 단어로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떼껄룩’ 같은 단어는 너무 생소하고 이상한 말로 치부할 수도 있다. 특히 온라인에서만 쓸 따름이지,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억지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 ‘허접’은 어떠한가? ‘허접’은 ‘허섭스레기’나 ‘허접쓰레기’에서 온 말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허섭스레기’, ‘허접쓰레기’는 2000년 이전까지 매우 적게 쓰이던 말이며, ‘허접’도 구글 트렌드에서 2009년까지 사용량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2월부터 ‘허접’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2016년 ‘허접하다’가 우리말샘에 생성되었다. 거의 사용되지 않던 어떤 단어가 갑자기 쓰이는 것은 사회적 사건과 관계가 깊을 때가 많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쓰나미’가 자주 검색되고 사용되다가 이후에 ‘감동의 쓰나미’와 같이 널리 쓰이게 된 경우가 그렇다. 마찬가지로 ‘허접’도 19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이 일상화되며 온라인 게임이 유행할 때 실력이 형편없는 유저나 쓸모없는 아이템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전에 등재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신조어는 왜, 어떻게 만들어질까? 신조어는 사회·문화의 변화, 신선함 등을 추구하는 사용자의 심리, 언어 사용의 경제성 등에 의해 생성된다. 그리고 신조어는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존 단어를 확장해 쓰기도 하지만 특정 집단에서 사용하던 말이 일반화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왕가에서 사용하던 ‘왕’, ‘공주’ 등이 ‘피겨 여왕’, ‘테니스 황제’ 등과 같이 특정 집단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전문 용어 또는 은어로 널리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나며 언중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전 시대에는 화자 주변의 시간과 공간을 중심으로 소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이가 사용하는 말이나 글은 제한적으로 유통되어 지역, 사회, 시간을 뛰어넘어 전파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인 미디어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가 SNS에 사용하는 말이 흥미를 끌게 되면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세상이다. 더욱이 긴 영상보다 는 짧은 영상을 선호하며, 긴 호흡의 문장을 통한 설명보다는 몇 음절 되지 않은 단어나 문구로 대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각광받는다. 기존 표준어로 현실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게임 속 상황이 현실과 중첩될 때 짧고 신선한 게임 용어가 SNS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널리 유행하는 신조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게임과 같이 비주류 문화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일상에서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대가 주류 세대가 되었다. ‘헐’, ‘님’처럼 인터넷 공간에서 유통되던 단어가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듯 지금 세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언어를 구분해 사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게임 용어를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면서 생명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신규 유저를 가리키는 ‘뉴비’나 오랫동안 게임하면서 실력이 매우 뛰어난 플레이어를 가리키는 ‘고인물’이 게임뿐만 아니라 주식, 스포츠 등에서 쓰이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피로 상징화되는 체력이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딸피’가 노인을 가리키는 비속어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한편 게임을 즐기는 세대의 폭이 넓어졌다. 스마트폰, 태블릿, 개인 컴퓨터로 남녀노소 모두 게임을 즐기며, 교육에서도 게임을 접목하여 학습 도구나 소통 도구로 활용한다. 어떤 문화이든 그 문화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존재하고 그 용어가 많은 층에 사용될수록 쉽게 일반화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경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경영학 용어인 ‘블루 오션’, ‘레드 오션’이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게임이 전 세대를 아우르는 놀이 문화가 되면서 게임 용어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쓰이는 신조어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특정 집단의 은어는 보통 폐쇄적인 반면, 게임 용어로부터 출발한 신조어는 분절된 세대와 집단을 연결하고 소통하게 해주는 언어의 본질적 기능에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어는 탄생, 지속, 소멸이라는 생명력을 갖추고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가 생성되고 어떤 단어는 사라지기도 한다. 게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새로운 단어의 원천 중 하나이며, 이는 게임 문화가 대중화되고 영향력을 갖게 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게임이 단순한 오락에서 벗어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e스포츠의 성장, 게임 관련 산업의 발전 등은 우리 사회에 미치는 게임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또한, 게임 용어를 기원으로 한 신조어는 언어를 풍부하게 하고 게임을 즐기는 세대가 넓어진 만큼 오히려 세대 간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 조경순(언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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