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천일야화, 그리고 열린 결말, 25 SS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 컬렉션

명수진

VALENTINO 25 SS 컬렉션

뜨거운 수요일이었다. 1월 29일에 열린 2025년 SS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쿠튀르 데뷔로 큰 관심을 받았다. 맥시멀리스트인 그가 쿠튀리에로서 어떤 한계에 도전할까? 호기심을 자아낼만한 질문이다. 오랜 드뮤어 트렌드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더욱 눈이 번쩍 뜨일만한 소식이기도 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관람석에 무려 200페이지 분량의 쇼 노트를 놓아두었다. 서문에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어린 시절부터 매료됐던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문장이 인용되었다. ‘48벌의 드레스, 48개의 목록’이라고 쓰고 이처럼 목록을 짜는 행위는 ‘우주의 혼돈에 약간의 질서를 가져오는 방법이 될 수도 있고, 바벨탑처럼 혼돈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적어두었다. 움베르토 에코로 시작된 인용구는 호머(Homer),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까지 세계관이 확장되어 나갔다. 압도적인 두께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첫 발렌티노 오트 쿠튀르를 이해하는 것은 논문 해독 수준의 쉽지 않은 과제가 될 수도 있다. 컬렉션의 테마는 ‘베르티지누: 목록의 예술(Vertigineux: A Poetics of the List)’. 프랑스어로 ‘현기증을 일으키는,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이라는 뜻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자신과 발렌티노의 세계를 둘러싼 수많은 영감과 이야기를 멜팅팟에 녹였다. 이를 의미 있는 틀 안에 가두고, 어떤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런웨이에서 찾은 듯했다. 모델들이 암흑의 공간으로 차례차례 등장할 때마다 배경 스크린에 번호가 표시되었는데 이는 모델들이 번호가 적힌 카드를 들고 워킹했던 초창기 오트 쿠튀르 프레젠테이션을 떠오르게 했다. 동시에 붉은색의 수많은 단어들이 스크린에 흘러갔다. 인타르시아(intarsia),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클레오파트라(cleopatra), 점묘주의(pointillism),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크레이프 드 신(crêpe-de-chine), 블러디 메리(bloody Mary)…. 나열된 단어는 실루엣, 소재, 컬러에 대한 요약은 물론 철학적인 성찰, 역사적인 인물까지 모두 포괄했다. 이는 주식시장의 티커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컬렉션이 열린 장소가 파리의 전 증권거래소인 브롱냐르궁(Palais Brongniart)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1번 룩은 알록달록한 컬러 블록의 할리퀸 크리놀린 드레스였다. 레드, 그린, 블루, 아이보리, 블랙 컬러의 다이아몬드 패턴을 풍성한 시폰 다발로 완성하고 어린이 몇 명은 거뜬히 숨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볼륨의 스커트가 시선을 끌었다. 이후 48번까지 차례차례 등장한 룩은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각기 제각각의 세계’라고 표현한 것처럼 하나하나 새로운 챕터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아이보리 빈티지 크로셰(Crochet) 드레스, 노란 제비꽃이 가득 피어난 들판 같은 볼 가운(ball gown), 1975년 영화 <배리 린든(Barry Lyndon)>에 등장했던 파니에(panniers) 드레스, 푸크시아 핑크 컬러 스커트, 검붉은 레드 컬러의 투우사 드레스, 모아레(moiré) 소재로 완성한 블랙 오스만 팬츠(Ottoman pants), 고대 그리스 도리아 양식의 플라운스(Flounce) 드레스, 사무라이의 갑옷, 인간에게 배신 당한 요정 말레피센트(Maleficent)의 드레스 등은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룩에서 여러 세계가 충돌하기도 했다. 심플한 플래퍼(flapper) 양쪽에 커다란 파니에(panniers)를 장식한 드레스는 명백한 판타지 장르였다.

시인이자 20세기 스타일 아이콘인 낸시 쿠나드(Nancy Cunard)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뱅글, 얼굴 전체를 가리는 주얼리 마스크, 라인스톤을 주렁주렁 장식한 아이웨어 등 개성 넘치는 액세서리는 컬렉션에 천일야화와 같은 신비로움을 불어넣었다. 끝없이 펼쳐진 스토리텔링을 탄탄하게 받쳐준 것은 역시 발렌티노 하우스의 완벽한 테크닉이었다. 퀼팅, 태피스트리, 브로케이드, 레이스, 리본, 깃털, 진주, 자수 등의 정교함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서사였다. 너무 열린 결말로 끝나버린 48개의 챕터는 어쩌면 다음 시즌을 위한 프리퀄이 될 수 있을지도?

영상
Courtesy of Valent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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