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이 기억이 안 난다고?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낸 질병 아닌 질병 영츠하이머에 대하여.
이게 기억이 안 난다고?
몇 달 전,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 집에 못 들어간 적이 있다. 그뿐일까. 종종 몇 시간 전 먹은 점심 메뉴가 기억이 안 났고, 누군가와 대화하다가도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했지?’ 싶은 적도 많았다. 마감 한복판이고 한창 바쁜 시기여서 잠깐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도 평소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라 이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기억 안 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서도 이런 증상을 겪는다는 이야기가 꽤 많이 들렸다. 그러던 중 알게 된 것이 바로 요즘 젊은 층에서 화제인 ‘영츠하이머’ 다. 디지털 치매로도 부르는 영츠하이머는 젊음(Young)과 알츠하이머(Alzheimer)의 합성어로 65세 이하의 젊은 연령대가 겪는 심각한 기억력 감퇴, 집중력 저하와 인지 기능 장애를 말한다.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걸까?
영츠하이머는 질병인가?
영츠하이머는 알츠하이머와 달리 질병은 아니다. 기억력 감퇴, 인지 기능 저하라는 유사한 증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퇴행성 뇌질환으로 구분하는 알츠하이머와 영츠하이머는 확연히 다르다. “영츠하이머 현상을 겪는 젊은이들이 내원해서 자신이 치매가 아닌지 의심하는 경우가 많아요. 알츠하이머는대사물 축적, 심혈관 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뇌가 노화되면서 나타나는 비가역적 질환이에요. 하지만 영츠하이머와 알츠하이머는 다릅니다. 알츠하이머는 대사물 축적, 심혈관 질환 등으로 뇌가퇴화하는 퇴행성 뇌질환입니다. 반면 영츠하이머는 특정 질환이 아니라 인지 기능 저하로 인한 기억력 감퇴, 집중력 저하를 겪는 인지 기능 장애입니다.”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총기 원장이 설명한다. 영츠하이머의 주요 증상으로는 사소한 것부터 잊어버리기 시작해 점차 중요한 일까지 잊는것이다. 단순히 잊어버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사소한 걸 잊어버리는 건 영츠하이머 증상의 시작일 뿐. 영츠하이머는 기억 장애만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작업 처리 능력도 떨어뜨린다. 이를테면 평소에는1시간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2배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거나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을 헤매는 것도대표 증상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기화되면 사회적 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평범하고 사소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워진다. 대화의 흐름에 맞는 적절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거나, 집중력이 저하되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없기 때문. 심한 경우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분이바뀌는 등 감정 조절 능력도 저하될 수 있다.
무엇이 영츠하이머를 유발하나
전문가들은 영츠하이머의 가장 큰 원인으로 디지털 기기의 사용과 디지털 미디어에의 과도한 노출을 꼽는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 원장은 영츠하이머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언급한다. 무엇이든 언제든 디지털 기기를 통해 검색할 수 있으니, 뇌에서는 데이터를 외우고 저장하는 습관을 점차 잊어가는 것. 우리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는 생애 주기 동안 끊임없이 훈련하고 발전한다. 하지만 이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습관이 계속되면, 기억을 저장하는 뇌 기능은 퇴화된다. 실제로 무언가를 손으로 직접 필기하면서 들을 때가 디지털로 읽고 쓰는 것보다 이해도가 훨씬 높으며, 정보 저장 기간도 길다. 디지털 미디어, 정보 검색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궁금한 내용이나 알아야 하는 내용이 있더라도 언제든 검색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기능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 디지털 미디어 역시 영츠하이머 현상의 주범이다. 하루에 최소 1시간 이상 노출되는 디지털 미디어는 우리 뇌에 장기적으로 저장되는 정보가 아닌, ‘스치듯 지나가는’ 수많은 정보를 남긴다. SNS 등을 통해 매일 몇 시간씩 시청하는 쇼츠(짧은 길이의 영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렇게 입력되는 정보들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표면적으로 다루고 지나갈 뿐이다. 우리 뇌에서 이런 정보 처리 기능이 자주 사용될수록,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뇌는 무언가를 저장하려는 기능을 점점 상실한다. 굳이 기억할 필요성을 못 느끼니,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의 기능이 저하되며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지 못하게 되는 것. 우리의 뇌는 어떤 사실 정보를 피상적으로 다룰수록 뇌에서 활성화되는 시냅스 수가 적어진다. 독일의 정신건강의학과 박사이자 뇌 연구가인 만프레드 슈피처(Manfred Spitzer) 역시 자신의 저서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 : 디지털 치매>에서 과도한 디지털 기기의 사용과 디지털 미디어로 인한 피상적 정보 처리를 치명적인 원인으로 꼽으며 영츠하이머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한다.
멀티태스킹 역시 영츠하이머의 주요 원인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일을 처리하면 뇌가 활성화되면서 인지 기능과 기억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착각이다. 영상을 보면서 메시지를 보내고, 음악을 감상하고 메일을 확인하면서 또 누군가와 대화하는 등 동시에 한 가지 이상의 일을 처리하면 주의력이 결핍되면서 인지 기능도 떨어진다. 디지털 미디어에의 과도한 노출, 습관적인 멀티태스킹 외에 일상적이고 사소한 원인도 있다. 남녀 불문 20대와 30대의 높은 음주율도 영츠하이머 현상의 주요 원인. 과도한 알코올 섭취는 뇌에서 기억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건 물론 전두엽의 충동 억제 기능도 약화시킨다. 흔히 음주 후 ‘필름이 끊기는’ 현상은 반복할수록 뇌에 과부하를 야기하고 인지 기능 저하로 이어진다.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에의 노출도 영츠하이머의 원인이다. 일시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으면 감정과 정서 조절에 문제가 생기고 뇌의 인지 기능 또한 저하된다. 결과적으로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잘 해내던 일도 실수가 잦아지고 업무, 학습 능력도 떨어진다. 흔하지만 현대인의 불규칙한 생활 습관 역시 원인.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주기 리듬에 맞추어 어느정도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야 하며 식사 시간을 규칙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적절한 운동도 필수다. 일상 리듬을 규칙적으로 유지하고 몸을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뇌의 균형 발달에 도움이 되기 때문. 일상적으로 생각 없이 바쁘게만 흘러가는 현대인들은 불규칙한 생활 리듬, 운동 부족 등에 시달리며 뇌의 인지 기능 또한 시간이 갈수록 저하된다.
영츠하이머인가 우울증인가
영츠하이머는 우울증 등 정신건강학적 질환과 혼동하기 쉽다. 정신건강학적 질환이 있는 경우에도 영츠하이머와 비슷한 증상을 경험하기 때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원장은 영츠하이머의 원인 중 하나로 극심한 스트레스,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 정서적 문제를 꼽는다. 이런 정서적 문제는 감정 변화와 더불어 기억력 저하를 포함한 인지적 문제를 야기한다. “최근에 자신이 영츠하이머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내원하는 환자 중에는 실제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의 질환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건강의학적 질환이 있지만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이를 영츠하이머로 착각한다는 것. 이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총기 원장은 영츠하이머가 의심되면 전문의를 찾아 종합심리검사 겸 인지기능검사를 받아 정서적 문제가 있는지 먼저 확인할 것을 권유한다. 인지적 기능저하를 일으키는 정신건강학적 문제가 없는지를 우선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를 위해 언어이해, 지각추론, 작업기억, 그리고 처리속도까지 4가지 영역으로 구성된 객관적 인지기능검사이자 종합심리검사인 웩슬러 인지기능검사를 추천한다. “현대인은 자기 기분을 관찰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바쁜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자신이 정신건강학적질환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정서적 문제를 영츠하이머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내원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웩슬러 인지기능검사를 시행했을 때 4가지 영역 중 작업기억과 처리속도의 효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어요.” 웩슬러 인지기능검사를 시행하면 우울증, 불안장애 등 정서적 문제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문가의 진단을 받을 수 있다.
건강한 일상으로 뇌를 건강하게
앞서 언급한 종합심리검사 겸 인지기능검사를 통해 특별한 정서적 문제가 없다고 진단을 받았다면 영츠하이머를 겪고 있는 것. 영츠하이머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처방에 따른 약물 치료가 필수는 아니지만 일상에 지장을 줄 만큼 심각한 증상을 겪고 있다면 전문가의 심리 상담을 권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문가의 다음과 같은 조언에 따라 일상에서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 방법은 앞서 언급한 원인에 착안하는데, 디지털 미디어로 인해 뇌가 자극적이고 일시적 정보만 처리하지 않도록, 건강한 활동으로 뇌가 활성화되도록 하면 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원장은 뇌를 건강하게 활성화하는 방법을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너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는 등 생활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중요합니다. 감성적인 이야기 같지만 낮에 충분히햇볕을 쬐고 자연의 변화를 느끼고 몸을 충분히 움직여주는 것 역시 뇌의 균형적인 발달에 도움을 주죠. 더 중요한 건 디지털 미디어와의 일방적 소통에만 의지하지 않는 거예요. 하루에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거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일상적 행위는 뇌에 건강한 자극을 줍니다. 대화가 편안한 상대를 2주에 한 번 정도 만나면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고 뇌를 활성화해줘요.” 하지만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듯 디지털 미디어와 기기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휴대폰 알람 최소화하기. 우리의 휴대폰 안에는 메신저, 메일 등 수많은 앱이 알람을 울려댄다. 알람을 확인하는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에만 확인하자. 알람이 울릴 때마다, 또 울리는 알람이 바라는 것을 시시각각 처리하는 것 자체가 멀티태스킹이고 집중력 저하를 유발한다. SNS, 짧은 길이의 영상 등 디지털 미디어는 한 번에 최대 30분, 하루에 최대 2시간까지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위에 전문가가 제안한 습관을 3개월만 지켜도 문제의 영츠하이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츠하이머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처방에 따른 약물 치료가 필수는 아니지만 일상에 지장을 줄 만큼 심각한 증상을 겪고 있다면 전문가의 심리 상담을 권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일상에서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
- 도움말
- 김총기(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안주연(마인드맨션의원)
- 참고 도서
-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 : 디지털 치매>만 프레드 슈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