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영박물관에서 패션쇼를 열고 미술관과 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드는, 아마도 가장 영국적인 디자이너 에르뎀 모랄리오글루(Erdem Moralioglu)가 한국을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촘촘한 일정 탓에 여의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어야 했던, 그와의 이색적인 동행기를 공개한다.
<W Korea> 더블유 독자들에게 영국식 인사를 부탁한다.
Erdem Moralioglu 먼저 당신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다. 달리는 차에서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인데, 이러한 이색적인 동행에 응해줘 감사하다.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의 인터뷰에 특별한 스토리를 부여해주는 것 같지 않나(웃음). 인터뷰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 질문을 받고 과연 ‘영국식’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다.
올해만 두 번째 방문이다. 봄과 가을, 서울의 두 계절을 만났는데 다른 점이 있나?
두 계절 모두 아름다웠다. 운 좋게도 4월과 10월, 간절기에 서울을 찾았다.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생동감과 에너지가 무척 좋았다. 당신의 디자인 언어는 스토리텔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기가 당신의 문학적 뿌리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20세기 초 영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버지니아 울프, E. M. 포스터는 물론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굿바이 투 베를린 (Goodbye to Berlin)>도 애정하는 작품이다.
이번 컬렉션의 시작은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인 <고독의 우물(The Well of Loneliness)>이었다. 래드클리프 홀의 소설 속 고통과 사랑,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했나?
테일러드 재킷의 소매와 안감을 봐달라. 왼쪽 소매에는 책 표지가, 안감에는 1928년 출간 당시 검열된 문장이 담겨 있다. 옷에도 어떠한 비밀이 존재한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나?
지난 시즌에 이어 2025 S/S 컬렉션 역시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진행됐다. 이번 컬렉션을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지리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세 명의 흥미로운 여성 데보라, 마리아 칼라스, 래드클리프 홀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새빌로의 재단사 에드워드 섹스턴(Edward Sexton)과 협업을 진행했다. 지금도 에드워드 섹스턴의 옷을 입고 있다(웃음). 그 정도로 영국에서 만드는 옷을 좋아하고 그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 컬렉션의 영감이 된 소설 <고독의 우물>에서도 새빌로에서 슈트를 맞추는 장면을 떠올리면 마치 데자뷔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옷에서는 ‘디깅’의 즐거움이 느껴진다. 본인만의 리서치 방식과 아카이빙 방식이 있을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매주 화요일에는 대영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보통은 새로운 컬렉션의 주제를 물색하거나 드로잉을 위한 자료 조사에 몰두하지만, 우연히 건물 외벽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버지니아 울프, E. M. 포스터, 세실 비튼과 같은 거장들이 머물렀던 공간이라는 사실에 잠시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순간이 모여 나만의 고유한 방식이 만들어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성성과 남성성, 투명성과 불투명성, 그리고 레이스에서 데님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소재와 색감을 한 컬렉션 안에 능수능란하게 담아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알아봐줘 감사하다. 이번 컬렉션은 대조에 대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핸드백 ‘블룸 백(Bloom Bag)’ 이야기도 듣고 싶다.
꽤 오랜 시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영속적인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기적인 디자인이어야 하고, 자연적인 오브제가 모티프였으면 했다. 또한 몸과 가깝게 위치하는, 이를테면 꽃을 들거나 안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렇게 탄생한 퓨어한 매력의 가방이 바로 블룸 백이다.
옷을 만들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인가?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번에, 그리고 한 눈에 에르뎀 컬렉션을 완벽히 갖춰 입은 모델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 있는데, 짧은 순간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최근 에르뎀이 큐레이팅하는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즐겨 듣고 있다. 특별한 선정 기준이 있을까?
나만의 기준이 있는 것 같다(웃음). 내 십대 시절을 지배한 음악으로 전부 구성하는 달도 있고, 오페라 싱어 마리아 칼라스의 곡으로만 플레이리스트를 채우기도 한다. 지난 11월 플레이리스트에는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담았는데, 힌트는 1977이다.
브랜드 설립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
꽤 오랜 시간 사진집을 수집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사진을 직접 찍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개념, 그 자체를 사랑한다.
반대로 절대 변하지 않을 신념이나 마음 같은 것도 있을 것 같다.
눈을 크게 뜰 것, 새로운 것에 열려 있을 것, 호기심을 잃지 않을 것. 결국 호기심 넘치는 사람만이 좋은 작업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듣고 싶다. 단어들로 나열해달라.
여행, 음악, 책, 영화, 수영, 발레, 전시, 남편의 웃음소리와 그를 웃게 만드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 포토그래퍼
- 윤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