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재의 냉정과 열정 사이

이예지, 권은경

<흑백요리사>라는 서바이벌 쇼를 향한 열광적인 관심, 미슐랭 3스타라는 훈장, 그리고 유명세.

그런 것들 뒤에 놓인 인간 안성재의 이야기는 그 어떤 쇼보다도 흥미롭다. 뜨거운 명성 속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자기다운 삶을 유지 중인 안성재에겐 지나온 삶의 재료가 많다.

코트, 타이는 구찌 제품.

하우스의 대표적인 다이얼 디자인을 모티프로 한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컬렉션이 18K 핑크 골드 소재로 새로 출시되었다. 지름 41mm, 18K 핑크 골드 케이스, 압인 처리한 블루 뉘, 뉘아주 50 다이얼, 러버 질감의 다크 블루 스트랩의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워치Audemars Piguet 제품.

안경은 미우미우 by 룩소티카, 니트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화보 촬영 스튜디오에 모인 많은 사람 중에서 안성재는 눈에 띄게 커다란 사람이었다. 넷플릭스의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참가한 셰프들이 긴장된 마음으로 심사평을 기다리게 만든 이 만만치 않은 남자는, 이제 <더블유>의 디렉팅에 얌전히 따르며 포즈를 반복해야 했다. 오데마 피게의 묵직한 시계를 찬 손으로, 수십 번씩 도토리를 떨어뜨리거나 두부를 으깨면서. 안성재는 2017년 한남동에 오픈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모수 서울’의 오너 셰프다. 모수는 미슐랭의 별을 한 개, 두 개 받더니, 2022년엔 별 세 개를 거머쥔 ‘스타’가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베벌리힐스와 나파밸리, 샌프란시스코 등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이력을 쌓은 후, 2016년 모수 샌프란시스코를 열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2년 봄에는 홍콩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M+ 뮤지엄 건물에서 모수 홍콩도 출발했다. 약 8년 전, 핫한 파인 다이닝 성지로 득실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미 고고한 미슐랭의 별을 따낸 그는 모두가 말리는 와중에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기존 자리에서는 폐업한 모수 서울의 두 번째 챕터를 앞두고 섭외에 응한 쇼가 이 정도로 파장을 일으킬 줄은 그도 물론 짐작하지 못했다. 재밌는 것은 <흑백요리사>를 향한 열광적인 관심과 유명세, 그리고 미슐랭 3스타라는 훈장 뒤에 놓인 인간 안성재의 이야기야말로 그 어떤 쇼보다도 흥미롭다는 점이다. 지고 싶지 않았던 ‘길바닥’의 소년에서 미슐랭 스타 셰프가 된 그는 요즘 뜨거운 명성 속에서도 차가운 이성으로 안성재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

안경은 미우미우 by 룩소티카, 니트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하우스의 상징 로열 오크 모델에 다양한 소재와 색상, 격자무늬 기요셰 기법을 적용해 완성한 로열 오크 오프쇼어 컬렉션. 지름 43mm, 스틸 케이스, 블랙 세라믹 푸시 피스 및 스크루 잠금식 크라운, 메가 타피스리 무늬의 스모크 브론즈 다이얼이 인상적인 로열 오크 오프쇼어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워치 Audemars Piguet 제품.

<W Korea> 안성재는 요즘 한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입니다. 한 시기에 여러 인터뷰를 하면 대동소이한 이야기가 나오기 쉽죠.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의 방향이 좀 어긋난다고 느낄 때는 없나요?
안성재 대동소이(웃음). 네, 그렇죠. 하지만 저에 대해 제가 먼저 알리고 싶은 점이 있다거나 그런 건 딱히 없어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저는 성실히 답할 뿐입니다.

제가 놀라운 건 셰프님의 어휘력이에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죠? 그런데 외국에서 오랜 시간을 산 사람 특유의 억양도 크게 느껴지지 않아요.
8년 전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제가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같이 일하는 직원이나 비즈니스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대가 불편해할 정도로요. 평범한 대화는 괜찮은데, 사업적이거나 전문적인 대화는 어려웠어요. 재외동포로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소통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일부러 더 사용하고, 더 읽으면서 공부했어요. 요리를 배울 때와 마찬가지예요. 필요에 의해서, 해야 하니까 알고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제 경험과 제가 손님들에게 드리고 싶은 시간을 잘 설명하고 소통하고 싶었어요.

언어를 잘한다는 것에는 그 언어가 속한 문화와 맥락을 파악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문득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찍먹’과 ‘부먹’ 중 한 가지를 선택할 때 마음의 소리를 내비친 순간이 떠오르네요. ‘왜 부먹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죠(웃음).
아, 그러니까 저는, 소스와 함께 먹는 여러 가지 튀김 요리 중에서도 탕수육에 대해서만 ‘찍먹’이라고 말한 겁니다. 탕수육이 원래는 소스에 볶아서 나오는 요리라고 하잖아요. 혹시 중식 셰프들과 그런 얘길 해본 적도 있으세요? 진지해서 죄송합니다. 어떤 중식 셰프들은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는 게 잘못된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옳고 그름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저 개인의 취향입니다. 정통 음식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라면 저도 다 알고 할 말 많죠. 그저 나는 탕수육을 먹을 때 그렇게 먹겠다, 하는 그런 어떤….

‘찍먹’, ‘부먹’ 논쟁은 그냥 하나의 재밌는 놀이일 때가 많아요. 어쩌다 좀 첨예해진 면이 있죠.
그래요?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요즘의 뜨거운 명성은 충분히 누리고 계신가요?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한 배우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영광을 좀 더 마음 편히 누릴걸, 들뜨지 않으려고 너무 내 마음을 단속한 게 아쉽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화보 촬영도 하고 광고도 찍는 거 보면, 네, 즐기고 있어요. 하지만 연예인과 달리 저희에겐 본업이 따로 있잖아요. 관심을 받는 만큼 본업으로 기대치를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니, 저는 모수 오픈에 더욱 집중하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유명해진 것과 저희 레스토랑에 관한 문제는 별 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없기야 하려고요. 내년 2월 모수 서울 다시 오픈하면 손님 입장에선 한동안 예약에 성공하기가 어렵지 않겠어요?
지금은 오픈 준비에 신경 쓰느라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그럴 것 같아요. 상관이 없다는 건 작품이 확 흥행한 배우들과 같은 경우는 아닐 거라는 뜻이에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대중적인 음식을 파는 곳은 아니잖아요. 주 고객층이 있어요. 저희 레스토랑과 파인 다이닝 문화에 공감하는 분들이 오시는 편이죠. 그렇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의 명성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요. 유명세란 어느 시점이 되면 떠나간다는 점도 잘 알고요. 그저 늘 그래왔듯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면, 지금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평판은 이어질 거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어요.

가장 가까운 사이인 부인과는 요즘의 유명세에 대해 어떤 대화를 하시나요?
음. 와이프도 물론 자랑스러워해요. 그러면서 걱정도 합니다. 제가 공인이 되었으니까요.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훨씬 많아졌고, 필터링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와이프와 자주 상의해요. 누가 아무리 달콤한 얘기를 해와도 저는 제 사람들이 누군지 잊지 않고 있어요.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제가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도와주신 분들, 모수를 함께하는 이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2017년부터 운영하던 모수 서울이 올해 1월 말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습니다. 당시 모수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지문을 올셨죠.
급하게 문을 닫은 게 저의 뜻은 아니었어요. 모수에 투자한 회사에서 그럴 필요성이 있었나 봐요. 그런 사정은 단호하게 잊어버린 채 다음 단계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 오픈할 시점을 최대한 당기고자 하는 마음에 아주 타이트한 일정으로 목표를 잡고 말로 뱉었어요.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어떤 기대치를 심어주고서 그 시점이 좀 늦어지고 있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길은 미국에서의 절차나 법, 또 ‘피플 워크’ 등등 많은 면에서 아주 다르더라고요. 부동산 문제부터 각종 허가를 받는 걸 제가 다 챙겨야 하니 쉽지가 않았어요. 청담동의 어느 적당한 건물에서 레스토랑을 다시 열 생각이었다면 진작 영업을 시작했을 거예요. 모수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 오래 가기 위해, 제가 정말로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콘셉트로 그리는 고집을 부리느라 그래요.

건축가 조민석은 올해 영국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설계 작가로도 선정돼 멋진 구조물을 선보인 분입니다. 그에게 모수 챕터 2의 건축을 위해 어떤 부분을 강조했을지 궁금해요.
우선 ‘모수는 원래 이렇다’ 식의 말은 하지 않았어요. ‘원래’라는 건 없어요. 저는 그분에게 제가 모수를 처음 만들 때 파운데이션이 된 것들을 말씀드렸어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만든 레스토랑인지, 어떻게 모수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는지. 경지에 올랐고 기술이 뛰어난 전문가라면 그 정도만으로 핵심을 파악한다고 봅니다. 거기에 건축가 본인의 아이디어를 접목해 표현해달라고 할 뿐이죠. 누가 저에게 음식을 부탁하면서 레시피를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면 어떻겠어요.

2017년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오픈하기까지,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나 정식당의 임정식 셰프와 도원결의 비슷한 걸 하셨을까 싶습니다.
친분이 있는 그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엔 한국에서 말하는 파인 다이닝과 제 기준 사이에 좀 거리감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에서 파인 다이닝을 시작한 파이오니어들과 제가 제시하는 것이 분명하게 달랐어요. 요리 방법부터 시작해 여러 스타일 면에서. 그렇다면 모수가 새롭고 다른 걸 선보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새로움에는 ‘가격’도 있었죠. 모수 샌프란시스코를 오픈할 때도 신진치고는 금액대가 너무 높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그런 지적을 한 매체가 억지스러웠다고 생각해요. ‘맛은 있는데, 네가 누군데 여기 와서 이 가격에?’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한마디로 이거였죠. ‘디스 이즈 미.’ 한국에서도 모수가 좀 높은 가격을 제시한 곳이었어요. 그게 시장 변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요. ‘이 정도 경험이라면이 금액을 낼 수 있다’라는 의견들이 생기면서다른 곳도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거든요. 모수가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한 거죠. 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미슐랭 스타 셰프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무작정 높은 금액을 매긴 게 아닙니다. 음식 가격이 얼마에 책정되느냐에 따라 한 음식의 퀄리티가 정해져요. 지방 곳곳을 돌며 가장 좋은 재료를 찾고, 수산시장을 다니면서 제가 원하는 기준의 음식을 만들고자 계산해보니 나온 금액입니다. 최상의 음식을 내기 위한 자존심, 또 그걸유지할 수 있는 인력이 돌아가게끔 하는 사업적인 면을 고려해서 나온 결과예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런치가 20만원에 가까워도 생각보다 마진이 크게 남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많은 사람이 아는 것 같아요.
저는 파인 다이닝이 한마디로 ‘이모션’을 파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비싸고 좋은 재료를 쓰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 다. 5만원짜리 맛있는 음식도 있고 10만원짜리 맛있는 음식도 있죠. 누군가 저희 레스토랑이 매긴 금액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도록,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짜임새를 안겨줘야 해요. 이건 좀 센시티브한 서브젝트이긴 해요. 저도 늘 노력하지만 어렵고 복잡한 문제예요.

로열 오크 오프쇼어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43mm 워치는 Audemars Piguet 제품. 니트는 베르사체, 안경은 버버리 by 룩소티카 제품.

로열 오크 오프쇼어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43mm 워치 Audemars Piguet 제품.

모수가 선보이는 음식의 코어는 뭘까요?
그냥 저희가 만들고 싶은 음식을 만듭니다.

왜, ‘이노베이티브 한식’ 같은 표현 있던데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들어도 딱 아우트라인이 잡히게끔 해주는. 그게 문제예요! 아우트라인 잡으려고 하는 거. 장르를 국한하기보다 늘 ‘최선과 최고가 뭘까’ 하는 기준을 가지고 할 뿐이에요. 한국에서 얻은 재료를 좀 다른 방식으로 소개하는 게 저희의 방향성이긴 합니다. 다른 나라의 이곳저곳에서 좋은 재료를 가져오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요. 저는 주변에 있는 재료를 잘 활용하는 셰프이고 싶어요. 그게 저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 그래서 모수 서울과 모수 홍콩이 아주 다릅니다. 홍콩에서는 나름의 로컬 레스토랑이 되는 게 목표예요.

컨템퍼러리 아트 분야에서는 LA로 대표되는 서부보다 동부의 뉴욕이 전통적인 장인데, 파인 다이닝에서는 어떤 요인 때문에 서부가 우세해졌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뉴욕에 자주 가긴 했어도 살아보진 않았는데, 일단 서부 캘리포니아에는 최상의 식재료들이 있어요. 기후가 훌륭합니다. 기후 덕에 나파밸리처럼 질 좋은 포도가 자라는 지역이 존재하죠. 와인이 많이 생산되니 자연히 레스토랑들이 생겨났고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있던 시기에는 샌프란시스코가 전 세계에서 가장 힙하고, 익사이팅하고, 돈이 많이 모여드는 도시였어요. 동부의 레스토랑 브랜드가 서부에 오면 망한다는 말이 있었죠. 하지만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의 브랜드가 뉴욕에 가면 트렌드가 됐어요. 제가 한국에 올 때는 모든 걸 버리고 온 겁니다. 주변에서 제정신이냐고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왜 샌프란시스코 레스토랑을 접고 서울행을 택하셨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한국에 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 같아요. 삶은 결국 ‘내가 뭘 원하는가’의 문제잖아요. 저는 한국에서 살길 원했어요. 워낙 어렸을 때 이민을 간 터라 금의환향 같은 느낌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죠. 그곳은 포화 상태여서 제가 발버둥을 쳐도 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기도 했어요.

‘이민을 떠나던 때’라고 하면 기억 나는 순간이 있나요?
그날의 여러 장면과 감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저희 집이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났거든요. 어느 날 어머니가 오전 수업만 받고 조퇴하라고 하셨어요. 점심을 못 먹고 일찍 나왔으니 집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어요, 길바닥에 앉아서. 학교도 일찍 마쳤고, 밥도 먹었고. 신났죠. 그런데 집에 들어가니까 이삿짐을 다 싸놓은 상태였어요. 저는 ‘친구들에게 인사는 해야 한다’, ‘빌린 게임기도 돌려줘야 한다’고 그랬죠. 게임기를 주러 친구 집으로 뛰어갔는데 친구는 물론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고. 제가 어려서 놀라고 슬퍼할까 봐 부모님이 미리 말을 안 해주신 것 같아요.

그렇게 갑자기 떠났으니 한국에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그리움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겠어요.
제가 느낀 외로움과 공허함은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원망까지 포함한 모든 감정을 어떻게든 표출해야 회복도 잘 되었을 텐데, 그럴 수 있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어요. 어린 나이에 갑자기 타지로 던져졌을 때는 저도 그렇고 가족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거든요. 90년대에는 흔하다면 흔했던 이민자 가정의 슬픈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과정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은 어디 가서도 기죽지 않는, 자존심 강하고 자존감 높은 제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과거 이라크 파병 경험도 있으시죠. 그런데 파병으로 받은 1년 치 봉급을 차 사는 데 쏟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마련한 차가 뭔가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그때 눈이 돌아가버렸습니다(웃음). 저축을 할 수도 있었는데, 가진 돈을 다 부어서 살 수 있는 가장 빠른 차를 샀죠. 스바루의 WRX라는 스포츠카였어요. 패기 있고 멋진데요? 좀 달리셨나요? 레이싱하다가 사고가 나서 두 달 만에 폐차했습니다(웃음). 제 과실만은 아니어서 보상금을 좀 받았거든요. 그걸로 또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차를 샀어요. 미쓰비시의 랜서 에볼루션. 나름 그때 핫한 모델이었어요.

차를 고를 때도 확고한 취향이 있나요?
어우, 있죠. 저는 무조건 포르쉐입니다. 차를 워낙 좋아해서 차종을 여러 차례 바꿔 타봤어요. 지금은 포르쉐를 타는데, 누군가는 ‘돈 많나 보네’ 할 수 있겠지만 저로서는 어릴 때부터 차를 좋아한 저만의 스토리와 이유가 있는 거죠. 한때 포르쉐 정비사가 되고 싶기도 했고, 제 꿈 중 하나가 포르쉐를 타는 거였습니다. 저와 제일 커넥션이 있는 차인 셈이에요.

자동차 정비사가 되기 위해 관련 학교에 입학을 앞둔 상태에서 불현듯 요리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와 이라크 파병에 지원한다고 했을 때, 가족이 어느 쪽에 더 놀라던가요?
이라크로 갈 때는 사실 숨겼어요, 걱정하실까 봐. 8개월 동안 집에 연락을 안 했죠. 사촌 형한테만 말을 했는데, 그게 일이 커졌어요. 이민자 커뮤니티가 좁잖아요. 형이 친구한테 말했다가 친구가 자기 엄마에게 얘길 하고, 그 얘기가 전달, 또 전달되어 미용실 원장님 귀에 들어갔어요(웃음). 할머니가 미용실에 갔다가 이런 소리를 들으신 거죠. “성재가 이라크에 갔다니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할머니는 ‘무슨 소리냐, 우리 성재는 훈련 간 거다’ 하셨지만….

파병 후 집에 돌아와서 처음 가족을 만났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많이 혼나셨어요?
할머니가 처음으로 제 뺨을 때렸어요. 저는 또 ‘깜짝 놀래켜야지’ 하는 생각으로 신이 나서, 집으로 간다는 말도 없이 1년 만에 ‘짠’하고 나타났거든요. 그런데 저를 보고 다들 울었어요. 그때 느꼈죠. ‘아, 이 정도 일에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구나.’

할머니가 약과를 만들어 파신지라 동네에서 ‘약과 할머니’라 불렸다고요. 할머니와 함께 자라면 부모님과의 관계와는 또 다른 추억이 생기죠. 약과 냄새를 맡으면 할머니가 떠오르실 것 같습니다.
네, 언제나. 할머니가 유방암을 앓아서 한쪽 가슴이 없었어요. 그래서 할머니의 품은 굉장히 특별했어요. 할머니한테 안겨서 가슴을 만지면, 한쪽은 가짜 가슴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거든요. 양쪽의 느낌이 뭔가 다르다는 걸 저는 알았어요. 할머니는 제가 그런 감촉을 느끼는지 모르셨겠지만. 증조할머니도 옆집에 사셨고, 고조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신 때도 있어요. 백 살이 넘을 때까지 사셨거든요. 손주들은 다들 그렇게 할머니들의 사랑을 받으며 크는 줄로만 알았죠. 그들이 이민자로서 용기 있게 살아간 모습과 그 시절의 느낌이 제 안에 풍성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부모님을 도와서 힘든 장사를 하기도 하셨죠. 일찍 철이 든 아이였을까요?
아직도 철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어릴 때부터 보통의 아이들은 하지 않는 일을 많이 겪었어요. 요리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국 돌아온 건 대단한 열정이나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에요. 저에겐 다른 옵션이 없었거든요. 당장 월세를 내야 하고, 학비를 내야 하고, 그런 현실적인 배고픔 때문이었어요. 저는 길바닥에서 온 사람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지금 <더블유> 매거진을 보고 있는 분들의 상상을 초월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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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마 피게 장인들의 독보적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오픈워크 구조의 셀프와인딩 칼리버 3132를 장착한 로열 오크의 더블 밸런스 휠 오픈워크 컬렉션. 지름 41mm, 스틸 케이스,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백, 핑크 골드 색상의 내부 베젤, 야광 물질 처리한 화이트 골드 아플리케 아워 마커가 표시된 로열 오크 더블 밸런스 휠 오픈워크 워치Audemars Piguet 제품.

안성재의 삶을 요약본으로 들으면 영웅 서사가 있는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옵니다. 길바닥에서 미슐랭 3스타를 따내는 레스토랑으로, 미군 생활을 하다 정비사를 꿈꾸던 청년이 엄격한 오너 셰프가 되었죠. 취미로 즐긴다는 복싱도 수준급인 것 같더군요.
제 학창 시절 이야기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이 나올 거예요(웃음). 재밌는 일화가 있어요. 막 이민을 갔을 때는 사귈 친구도 없고 낯설기만 하다가, 중학교에는 그래도 한국인이 좀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중학생이 되어 등교 첫날이었나 둘째 날 어떤 일이 벌어졌어요. 등굣길에, 바닥에 케첩이 굴러다니고 있더라고요. 별생각 없이 그걸 발로 밟았는데, 케첩이 옆에 지나가던 학생에게 확 튄 거예요. 갱단과 어울리는 좀 험한 흑인 친구였죠. 저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어릴 때는 제 덩치가 작았어요.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중학교에 올라갔는데, 시작부터 험난했네요.
억울했어요. 나는 힘이 없고, 잘 싸우지도 못하고, 그 친구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계속 맞기만 하니까. 그날 이후로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레슬링부에 들어갔고, 좀 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죠. 그 동네에는 그런 문화가 있었어요. 딱히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갱 비슷한 무리와 가깝게 지내야 하는 거요. 배드민턴 선수도 하고, 운동을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제가 동양인 아이들 중에서 가장 컸고요. 학생 때 조금은 과격한 시기를 보내기도 하면서 내 자존심을 지키자는 마음을 키웠어요. 그런 마음은 지금도 여전해요.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 달라진 것뿐이죠.

생존 본능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나요?
네. 저는 생존 본능이 아주 강했어요. 지는 것도 싫었어요. 체격에서 달리면, 기술을 쓰든 머리를 쓰든 어떻게든 이기려고 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센서빌리티가 생긴 것 같아요. 남의 눈빛을 캐치하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눈치와 계산이 빨랐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이상하게도 ‘어떤 상황이 닥치든 나는 먹고살 수는 있다’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내가 노력하는 ‘그릿’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두려움도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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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모수’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코스모스 다발을 든 안성재. 지름 41mm, 18K 핑크 골드 케이스, 잔물결을 연상시키는 기요셰 패턴의 그린 다이얼, 러버 질감 그린 스트랩의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셀프와인딩 워치Audemars Piguet 제품.

혹시 <흑백요리사>에서 함께 심사를 본 백종원 님과 의견이 대립했을 때 굽힌 적이 있나요? 저는 두 분을 보면서 ‘서로 다른 종교의 지도자끼리는 통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추구하는 바도 스타일도 다르지만, 대가끼리는 통하는 데가 있다는 점에서요. 그 과정에서 왠지 안성재 님이 어느 정도 의견을 쏟아낸 뒤에는 눈치껏 젠틀하게 져준 순간이 한 번은 있지 않을까 했어요.
아니요, 제가 굽힌 적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제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음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컴피티션과 저지먼트라는 것에 대해서요. 그분은 경험이 있어서 설득력이 있는 말을 많이 하셨어요.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는 경우에는 경험자의 말을 듣는 게 낫잖아요. 하지만 제가 확고하게 ‘아니다’라고 생각할 때 굽힌 적은 없어요.

<흑백요리사>가 외식업계에 어떤 활기를 일으킨 것은 분명할 테지만, 이 분위기가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 거라 짐작합니다.
살다 보면 이벤트가 수시로 생깁니다. 팬데믹도 그런 이벤트 중 하나이고,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혹은 정치적인 이슈도 어떤 신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돼요. <흑백요리사> 신드롬도 그런 것 중 하나일 거예요. 이를 계기로 레스토랑에 좀 더 마음을 열고 지갑도 여는 현상이 언젠가는 가라앉을 수 있겠죠. 그런데 파인 다이닝은 서울에서 1% 정도의 인구만이 즐기던 문화일 겁니다. 크리스마스나 아트페어처럼 특별한 시즌에는 좀 북적거리다가 다시 한가해지는 건 늘 있는 현상이고요. 만약 이번 신드롬으로 1% 이상의 인구가 경험하는 기회가 생긴다면, 셰프들에겐 손님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저희가 잘 해나가는 게 중요하죠.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 손님도 중요합니다. 레스토랑에 관심을 갖고 다른 나라와 도시를 찾는 분들이 제법 계세요. 서울에서 갈 만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과거에는 몇 군데밖에 안 됐다면, 이제는 옵션이 꽤 늘어났죠.

새삼스럽지만 오너 셰프로 사는 건 참 피곤하고 복잡한 일 같습니다. 엄격한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민한 감각도 풍부한 자원도 갖춰야 하고, 창의력도 필요하죠. 그런데 요리는 과학의 영역이기도 해요. 업장 운영시간 동안에는 내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요. 너무 변태 같은 인생 아닌가요?
아주 변태적이죠. 그것 말고도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많을 거예요. 사이코,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틱, 마니악…(웃음). 셰프는 자신의 개념을, 고객이 먹고 만족해야 하는 음식으로 손을 이용해 만들어내야 해요. 그래서 아티스트가 아니라 크래프트맨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의력을 결과물로 실행해내는 능력이 없으면 그 창의력이 소용 없어져요. 제가 셰프인데, 셰프로 활동하지 못하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죠. 친구 셰프들이 그 점을 걱정해주기도 했다가 요즘에는 또 이런 말을 해요. 비록 올해 레스토랑 오픈은 못했지만 다른 이유로 바빠졌으니, 공평한 거 아닌가 하는 말. 네. 모든 게 다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포토그래퍼
김신애
헤어
홍현승
메이크업
임정인
어시스턴트
나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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