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의 예술가 애니 모리스는 자신의 삶에서 길어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 세계를 그려간다.
개인적 서사와 여성이란 정체성은 곧 그녀의 작품으로 옮겨지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평면과 입체의 구분에서 벗어난 사이의 결과물을 탄생시킨다. 그녀의 대표 연작을 보여주는 장이 더페이지갤러리에서 펼쳐진다.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의 삶에서 연유한 트라우마, 문화적 정체성, 감정적 여정에 기반해 작품을 만든다. 그러한 개인적 서사는 작품의 시각적, 개념적, 주제적 요소에 내재된다. 예술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표현하고 개인적 역사를 보편적 언어로 치환한 루이즈 부르주아가 그랬고, 트레이시에민 역시 자신의 인생을 유물 형태의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영국 작가 애니 모리스(Annie Morris) 또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작가다. 다채로운 색상과 불규칙한 크기의 동그란 구체들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그녀의 대표작인 조각 시리즈 ‘스택(Stack)’은 7개월 동안 품어온 아이를 사산한 경험에서 비롯한 작품이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매우 깊은 충격과 트라우마를 남긴 그 경험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역설적이게도 슬픔보다는 기쁨과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각뿐 아니라 직물,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그녀가 더페이지갤러리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펼친다. 9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항해하는 이번 전시, 둥근 구체들이 반기는 전시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W Korea> 전시장에 들어서면 ‘스택’ 시리즈와 태피스트리 회화가 어우러진 풍경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번 개인전
에서 가장 크게 주안점을 둔 요소는 무엇이었나?
Annie Morris 사람들이 마치 나의 런던 스튜디오에 방문한 듯한 느낌과 함께 작품의 다양한 요소를 온전히 경험하기를 바
랐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스택’ 시리즈뿐 아니라 태피스트리와 철제 조각까지 두루 소개한다. 사실 이번 전시 공간은 좀 더 정돈됐다는 점만 빼면 런던 스튜디오와 거의 비슷하다. 나는 다양한 재료와 매체 모든 것을 바닥에 다 펼쳐서 작업하고 앉아서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작품의 요소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도 좋아해서 여성의 가슴을 표현한 둥근 구체가 직물 회화에서도 나타나고 컬러들도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태피스트리 시리즈의 작품 ‘If You Could Be Anyone’ (2022)도 전시장을 밝힌다. 리넨 위로 바느질해 완성한 시리즈인데 ‘실 페인팅(Thread Painting)’이라고도 불린다. 마치 파스텔이나 목탄으로 그린 듯한 회화적 질감이 특히 눈에 띈다.
이번에 전시한 태피스트리 작품은 그간 그린 드로잉을 바탕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평소 아주 큰 종이를 바닥에 펼쳐놓고 오일 스틱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 오일 드로잉의 즉흥적 표현감을 태피스트리에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태피스트리 작품은 즉흥적 드로잉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바느질로 꿰는 작업은 실제로 몇 개월이 소요된다. 굉장히 빠르게 작업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세한 실로 모든 것을 연결하기 때문에 각 요소들이 영구적으로 존속된다는 속성도 가진다. 캔버스의 납작한 평면적 느낌보다는 조각과 페인팅 그 사이의 입체적 느낌을 주고 싶어서 일부러 캔버스 천을 자글자글하게 만들기도 했다.
‘스택’ 시리즈는 과거 유산한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된 작업이라고 들었다. 이처럼 당신 개인의 삶의 이야기가 늘 작품의 출발점이 되나?
그렇다. 우선 나의 작품은 전부 다 은유적 성격을 띤다. 조각 연작 ‘꽃 여인’이든 ‘스택’ 시리즈든 전부 나의 자유로운 드로잉에서 출발한다. 각각의 형상이나 색상,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언어 모든 것이 조각과 회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시사하는 건 내가 경험한 상처와 아픔, 고통, 불안 같은 감정들이다. 항상 나의 작품과 삶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택’ 시리즈에 대해 더 얘기하자면, 유산이 아닌 사산의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출산을 1개월 남기고 사산하면서 굉장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의사들은 그저 아이가 생명을 잃었다는 의학적 설명과 처치만 해줄 뿐이었고 나는 어떤 설명도 이해도 스스로 할 수 없었다. 그때 겪은 절망과 비통함을 안고 드로잉을 했고 불안정하게 쌓아 올린 구체로 형상화됐다. 작품을 보면 작은 공 위에 큰 공이 올라간 경우가 많다.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형체다.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고자 했고, ‘낙하’라는 개념에 내포된 무너지는 동시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최대한 높이 쌓아 올려서 나보다 더 큰 존재로 만들려고 했다.
개인의 서사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당신의 작품 세계에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맞다. 여성은 항상 작품의 주제가 된다. 어린 시절의 경험, 어머니에 대한 생각 등 나 자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작품에 담긴다. 여성의 모습을 띤 ‘꽃 여인’ 시리즈는 어머니의 초상을 담는 것으로 시작해 지금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확장됐다. 꽃이 상징하는 아름다움과 꽃이 피고 지는 순환을 여성의 삶과 연결 짓고 싶었다. 또 평소 안료를 직접 배합하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안료가 지닌 색 자체의 신성함과 연약하고 유약한 여성의 속성을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안료에 천착한다니 매우 흥미롭다. 동시에 당신은 드로잉을 바탕으로 조각과 태피스트리라는 매우 이질적인 두 미디엄으로 작업을 한다. 당신의 작업 범주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조각이다, 회화다 구분하지 않는다. 페인팅과 조각, 그 사이 어딘가의 공간에 있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작품이라고 생각을 한
다. 실 페인팅 역시 평면적으로 종이 위에 드로잉하는 것보다 조금 더 입체적인 3D 물체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꽃 여인’ 철제 조각도 마찬가지로 평면에 있는 선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공간감을 구현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 작업의 매우 중요한 요소는 안료에서 나오는 컬러다. 일본, 인도, 모로코, 독일, 프랑스 등 각지에서 안료를 모아 굉장히 방대한 셀렉션으로 기존에 없던 걸 만들어내려고 한다. 안료는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매체다. 조형 조각과 청동 위에 안료를 입힐 때 그 질감, 생동감을 주는 동시에 또 굉장히 연약한 느낌을 주는데, 그 과정이 정말 아름답다. 나의 작품은 하나같이 정교하게 깎고 다듬고 예쁘기만 한 것보다는 집착적인 과정에서 불안한 동시에 순수하고도 자유로운 감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 프리랜스 에디터
- 강보라
- 포토그래퍼
- 이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