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고 자유로운 박지현

전여울

배우 박지현은 자신을 자유로운 영혼이라 말한다.

사랑에 솔직하지 않은 적 없고, 자유와 행복이 지켜지는 한 무엇이든 할 용기가 있다고 고백한다. 투명이란 단어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어쩌면 박지현을 수식하는 모든 말들. 그런 그녀가 11월 개봉하는 영화 <히든 페이스>에서 감춰진 얼굴, 숨겨진 욕망을 품은 인물을 연기한다.

니트 톱과 프릴 홀터넥 셔츠는 앤 드뮐미스터, 벌룬스커트는 플로렌티나 라이너 by 아데쿠베, 슈즈는 프라다 제품.

<W Korea>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히든 페이스>가 11월 개봉을 확정 지었죠. 재작년 촬영한 것으로 아는데 극 중 연기한 ‘미주’가 아직 당신 안에 남아 있나요?
박지현 어떤 작품이든 촬영이 끝나면 잘 접어서 보내는 편인데 이상하게 ‘미주’는 아직까지 제 안에 머물러 있는 듯해요.

<인간중독>, <방자전>, <음란서생> 등을 연출한 김대우 감독의 신작이에요. 어떤 인연으로 합류하게 됐어요?
슬프고 서정적인 감성을 풀어내는 감독님 특유의 방식을 워낙 좋아했거든요. 특히 <방자전>을 좋아해요. 저는 그 작품이 그렇게 슬퍼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춘향전>을 완전히 다른 시선에서 각색한 걸 보고선 ‘이분은 천재다’라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감독이군요.
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 <히든 페이스> 미팅차 처음 만나뵙고 대화를 나눴는데 저와 정말 비슷한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정말 감정적인 사람이거든요. 한마디로 감수성이 예민해요. 그런데 감독님과 유독 말이 잘 통했어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원래도 팬이었지만 이번 기회로 함께 작업하면 정말 편하겠다는 생각이 확 스쳤던 것 같아요.

셔츠는 마르니, 데님 팬츠는 커미션, 빈티지 워커는 미우미우 제품.

<히든 페이스>는 콜롬비아 감독 안드레스 바이즈가 연출하고 2011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죠. 세 남녀의 에로틱한 관계, 그들의 숨은 욕망을 굉장히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기억해요. ‘밀실’이라는 자극적인 장치가 극을 이끌기도 하고요.
국내에서 <히든 페이스>가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이 돌기 한참 전에 원작을 봤어요. 하루아침에 애인이 영상 편지만 남긴 채 사라지고 주인공이 애인을 찾는 과정에서 밀실이란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러나잖아요. 밀실에 갇힌 자와 그 바깥의 사람들, 그리고 얽히고설킨 관계. 원작의 구조는 정말 좋았는데 저는 결말이 어딘가 아쉬웠거든요. 그런데 리메이크가 확정되고 김대우 감독님이 연출을 맡는다 했을 때 어떻게 각색하실지 궁금하고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탄생했어요. 뭐랄까, 작품이 굉장히 쫀쫀해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요.

이 영화는 배우 박지현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섹시한 작품으로 남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을 관통하는 큰 줄기가 ‘욕망’인 데
다 연출을 맡은 김대우 감독은 데뷔 이래 꾸준히 본인만의 에로티시즘 미학을 표현해왔잖아요.

물론 섹시한 신, 섹시한 캐릭터가 등장하긴 하지만 꼭 그것에 한정해 말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제가 연기한 ‘미주’만 해도 작품명처럼 감춰진 얼굴이 있는 굉장히 입체적인 캐릭터거든요. 그리고 언젠가 좋은 작품을 만나서 연기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어요. 몸에도 감정이 있는 만큼 배우로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오프숄더 원피스는 본봄, 타비 플랫슈즈는 메종 마르지엘라 제품, 양말은 에디터 소장품.

지난달 <더블유>가 인터뷰로 만난 배우 정은채는 이런 말을 했어요. “욕망을 드러내고 분출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오히려 그런 욕망 외에 뭐가 있을까 생각한다.” 한편 박지현은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품은 ‘미주’란 인물에 어떻게 접근했나요?
저는 인물에 저 자신을 많이 투영하는 편이에요. 결국 어떤 인물이든 나를 거쳐서, 나를 통해서 나오는 셈이잖아요. 배우 자신과 캐릭터를 완전히 분리시키면 어떤 입체성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아직 그 정도의 능력은 없는 것 같아요. ‘미주’의 경우에도 최대한 저와 겹쳐보려고 했어요. 일단 제가 가진 것 중에서 ‘미주’와 닮은 것들을 생각해요. 그런 다음 그 부분을 뾰족하게 발전시키고 저에게는 없지만 ‘미주’가 가진 것을 살을 붙이듯 덧입히는 식이죠. 저는 굳이 캐릭터와 저 자신을 딱 잘라 분리시키지 않는 편이에요.

박지현과 ‘미주’의 가장 큰 교집합은 뭐였나요?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물론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저나 ‘미주’나 어떤 욕망이 들면 그것에 꽂혀서 무조건 가져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박지현의 가장 큰 욕망은 무엇인가요?
보통은 사랑이었어요. 사랑에 있어서는 굉장히 솔직하고 자존심 부린 적 없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으로 처음 호흡을 맞춘 김대우 감독은 당신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어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배우다.” 어떤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 짐작하나요?
글쎄요, 미팅에서의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팅이든 오디션이든 저는 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신인 시절엔 그런 자리가 막연히 두려웠어요.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결코 좋은 시너지를 내는 생각은 아니잖아요. 이걸 어떻게 전화위복시킬까 고민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마인드로 미팅 현장에 나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잘 봐, 지금부터 내 연기를 보여줄게, 이건 나의 퍼포먼스야, 너희 이거 공짜로 보는 거야, 나 안 뽑으면 나는 딴 거 하면 돼.’(웃음) 감독님을 만났을 때도 한창 이 마인드로 스스로를 다독이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저에게서 어떤 확신 비슷한 것을 보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쉽게 말해 ‘깡’으로 밀어붙인 거네요. 여러 인터뷰에서 입버릇처럼 말한 “그럴 수도 있지”의 태도와 이어지는 얘기 같아요. 그러니까 초연해버리는 마음이랄까요?
무엇에든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는 마음인 거죠. 예전의 저는 너무 감성적인 사람이었어요.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었고요. 늘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노력하지만 그게 어디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넘기기로 했어요. 그 순간부터 무척 편안해지더라고요.

보통 그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인 듯해요. 타고나길 무던한 성격이든가, 아니면 상처를 많이 받아 무던해지기로 선택한 사람이든가.
저는 그보다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입장이 있다’고 생각해서인 듯해요. 하물며 악인에게도 어떤 정당성은 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말도 안되는 캐릭터나 장면을 말이 되게 만드는 게 제 직업이잖아요. 불가해한 인물과 신에서 어떻게든 정당성을 찾아서 상상력으로 그럴싸해 보이게 만드는 거 말이에요. 그래서 뉴스나 영화에서 악인을 보면 그 사람의 전사가 머릿속에 그려져요. 어떤 사건으로, 어떤 결핍으로 저 사람이 저런 상황에 이르렀을까 하면서요. 직업적 이유로 무엇에든 ‘그럴 수 있지’라는 사고 습관이 생긴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다 떠나서 한 사람으로서도 내가 포용하고 이해해버리면 차라리 편해지더라고요.

니트 톱과 프릴 홀터넥 셔츠는 앤 드뮐미스터 제품.

그러다 보면 ‘나’가 희미해지지 않나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일 수 있으니까요.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이게 대단히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싫든 좋든 한 사람에게서 정당성을 일부러 찾아주는 거잖아요. 갈등을 겪기 싫으니까, 귀찮아지니까. 요즘 말로 저는 회피형 인간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화나 분노, 미운 감정이 제 안에 남아서 에너지를 갉아먹는 게 싫어요. 저는 항상 행복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유와 행복, 이 두 가지만 방해받지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오늘 화보를 담은 포토그래퍼가 박지현을 두고 “자유로운 영혼 같다”는 말을 슬며시 했어요.
앗,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웃음).

그런데 여태 맡은 배역들은 ‘자유로운 영혼’과 사뭇 거리가 있지 않았나요? 전작 SBS <재벌X 형사>에서는 책임감 강한 베테랑 형사 ‘이강현’을 연기했고, 박지현을 널리 알린 JTBC <재벌 집 막내아들>에선 찔러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재벌가 장녀 ‘모현민’을 소화했어요. 언젠가 나와 비슷한, 그래서 마음이 동하는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갈증이 있나요?
글쎄요, 저에게도 어떤 취향은 있죠. 전사가 복잡한 인물, 남몰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에 끌리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최근까지 촬영한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을 찍고 나서 제 안의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김고은 선배님과 처음으로 함께한 작품인데, 서로의 10대 시절을 함께한 절친한 두 여성의 서사극이에요. 다만 존엄사를 다루고 죽음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제가 맡은 ‘상연’은 아픔을 간직한 친구인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진 분명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 ‘상연’의 슬픔에, 상황에 도무지 스스로가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보는 사람이 슬퍼야 하는데 제가 너무 슬퍼하는 거예요. <은중과 상연>이 남긴 건 이거였어요. ‘좀 더 해봐야겠다.’ 아직은 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좀 더 해봐야 내가 진정으로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원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은중과 상연>이 또 박지현에게 새로 알려준 것은 뭐였나요?
이전까지만 해도 연기에 있어서 무조건 날것의 느낌을 추구했어요. 매 테이크마다 톤을 다르게 갔고 즉흥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은중 과 상연>의 현장도 그랬고, 특히 고은 언니를 보면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언니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우직함, 꿋꿋함이 느껴지거든요. 유한한 현장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스태프의 노고 속에서, 최단시간에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아요.

예전엔 즉흥성에 충실했다면 이젠 연기에 있어서 기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듯해요. 박지현이 배우를 꿈꾸게 만든 영화는 무엇이었어요?
이창동 감독님의 <오아시스>요. 어렸을 때 봤거든요. 그 당시엔 장애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어요. 어리기도 했으니까 문소리 선배님의 사실적인 연기를 보고 다큐라고 착각한 거죠. 나이가 들고 실은 그게 연기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해요.

<오아시스>를 본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자로의 길을 생각한 거예요?
아니요. 저는 다섯 살 꼬마 때부터 이미 배우였어요. 역할극에 진심이었거든요(웃음). 동생과 안 해본 역할극이 없어요. 동대문 의류상가 사장님인 동생과 옷 품질이 별로라고 시비를 거는 손님인 나, 간호사 동생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환자인 나, 피겨 스케이팅계에서 세기의 라이벌 관계인 동생과 나···(웃음).

하하,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죠. 올 한 해 박지현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뭐였어요?
또 <은중과 상연>의 이야기지만 작품을 하는 내내 죽음에 대해 곱씹다 보니 자연스레 비우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일례로 원래는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새는 정말 카드값이 예전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돼요. 인간관계도 조금씩 줄여가고 있고요. 소유가 저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해요.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인간 박지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무려 최근에 키가 컸습니다! 166.7cm에서 168.2cm로. 취미로 3~4년째 꾸준히 발레를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인 듯해요. 지금 30대 초반인데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조만간 공식 프로필도 바꿀 예정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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