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아이 보테가 베네타

이예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흐트러트린 오후의 노을이 스며든 방.

사랑스러운 60마리 동물 의자가 도열된 사이로 보테가 베네타 2025 Summer 뉴 룩이 등장했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밀라노 패션위크의 마지막을 장식할 보테가 베네타 쇼장으로 가기 위해 밀라노 남부로 향했다. 초대형 셀러브리티들의 등장이 예고된 터라 쇼장 주변의 경비는 삼엄했고, 기대감에 부푼 게스트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쇼장은 이내 뜨겁고 달뜬 공기로 채워졌다. 과연! 마티유 블라지는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데 대단히 능하다. 황금빛 노을이 드리운 쇼장, 60여 개의 동물 의자가 게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당벌레는 양자경, 말은 켄들 제너, 토끼는 제이콥 엘로디 등 셀럽 모두가 각자에 매치된 동물을 찾아가 앉았다. 누군가는 이 장면이 익숙해 보였을 텐데, 블라지는 영화 속 엘리엇의 엄마가 옷장을 열고 장난감 사이에 숨어 있는 외계인을 발견하지 못한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쇼를 직관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아이엔, 김다미, 로운이 날아왔고, 성별 논란을 일으킨 알제리 복서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 이마네 칼리프, ‘Very Demure’라 는 대 유행어를 만든 틱톡커 줄스 르브론, 보테가 베네타의 대표 얼굴 에이셉 라키가 프런트로에 포함되어 있었다.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 모두가 기대하는 TV 쇼를 보는 사람처럼 각자의 방식대로 쇼를 즐길 준비를 마친 듯했다.

에이셉 라키.
제이콥 엘로디.
이마네 칼리프.
스트레이키즈 아이엔.
김다미.
줄리앤 무어.
로운.
케링 그룹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과 양자경.

지난 시즌, 일상의 기념비화에 집중한 마티유 블라지는 이번 시즌은 모두가 겪는 어린 시절에 주목했다. 그는 “어릴 적 무언가를 시도할 때 느낀 경이로움, 부모님의 옷을 처음 입어볼 때의 흥분이 패션의 시작이라는 아이디어에 관심이 많았습다”라고 말했다. 아주 큰 재킷과 비대칭 랩스커트, 한쪽 다리 바지, 으깨진 듯한 주름이 더해진 검은색 드레스 등 어느 한쪽이 비대칭을 이룬 드레스업 게임은 전형적인 어른의 매력과 우아함을 해체해 의복을 구기고, 흐트러트려 재탄생함을 묘사했다. 아이가 어른을 흉내 내고, 성인이 되어가는 여정을 블라지가 그려낸 방식이었다.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실험 또한 돋보였다. 광택이 도는 가죽을 아주 작게 잘라 윤슬 같은 반짝임을 연출한 이브닝드레스, 스톤워시 데님을 모방한 자카르 소재,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런지 셔츠를 조각처럼 형태를 잡아 만든 것, 구겨진 형태를 강조한 스트라이프 셔츠와 티셔츠 등 예상하지 못한 소재의 혁신적 재해석을 통해 한계선을 다시 한번 끌어올린 하우스의 저력을 확인한 현장이었다. 액세서리와 세부 요소는 컬렉션의 매력을 더욱 근사하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장바구니가 장인들의 정교한 제작을 거쳐 가치 높은 백으로 재탄생했고, 악기 케이스는 인트레치아토 기법이 적용된 가죽 가방으로, 마켓에서 볼 법한 장바구니와 페이퍼백은 우아한 가죽 소재 백으로 변신했다. 드레스의 네크라인을 잡고, 신발 뒤꿈치에 달라붙은 개구리 장식, 토끼 모양 옷깃이 달린
가죽 코트, 거대한 물고기가 프린트된 스카프 상의 등에선 밝고 환희에 가득 찬 유희가 느껴졌다. “패션의 원초적 힘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어요. 관찰과 발견, 그리고 옷을 입는 행위에 대한 즐거움, 그를 아우르는 성장과 경외감, 바로 ‘와우(Wow)’의 힘을요.”

이 모든 런웨이의 캐릭터가 합쳐져서 밀라노의 풍경이 완성됐다. 자신만의 놀이터를 만드는 이탈리아 사업가, 딸의 분홍색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비즈니스맨, 방황하는 10대, 슈퍼마켓에 있는 세련된 밀라노 여인, 부모의 슈트를 입고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는 소녀와 소년 등 모든 캐릭터는 각자의 삶 속에서 주인공이다. 블라지의 드레스업 놀이는 즐거움과 모험으로 가득 찬 유년의 기억을 즉각적으로 소환했다. 이 모든 것이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하우스의 초고가 가격 정책도 설득력을 가질 것인가? 블라지는 자신의 유머 감각과 정서에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라는 모험수를 던졌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설득력을 갖는다고 믿는다(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미소를 띤 채 쇼를 감상하던 에이셉 라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보테가 베네타를 진두지휘한 2년 반 동안 그는 고급 옷을 심플하고 훌륭하게 선보일 수 있는 디자이너임을 입증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밀라노 패션위크는 안정적인 기성복을 선보이는 기류가 강했다. 그 와중에 구깃하게 만든 E.T.의 플란넬 셔츠와 데님이라니? 금속 성냥개비로 재킷과 스커트를 장식하고, 인트레치아토 가죽 커버로 된 동화책과 해바라기 꽃다발을 내보일 여유와 자신감이라니! 한층 자유로워진 그는 디자이너들의 리그에서 우위에 섰음을 강력하게 증명했다.

쇼 다음 날 리씨 현장에서 만난 한국 프레스들은 개구리 반지, 시장바구니, 가죽 꽃다발 같은 디테일을 곱씹으며 하나같이 블라지가 선사한 ‘와우’를 즐겼다. 고급스러움이 넘쳐흐르는 가죽의 힘 있는 재단, 한땀 한땀이 소중해 보이는 공예적 액세서리, 귀엽고 사랑스럽게 뛰어노는 개구리와 토끼들까지, 예술과 디자인이 하나 된 초호화 작품은 풍요롭고 분방하고 명랑했다. 블라지의 열정은 눈에 잘 띄고 건강하고 매력적이다. 모두가 어릴 적 패션에 뛰어들었던 향수에 공감하고 환호했을 것이다. 그의 ‘와우’는 과녁에 명확히 적중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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