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다채로운 스털링 루비의 시선

권은경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예술’ 그 자체와 ‘예술계’는 별개의 문제다.

미술관과 페어장, 패션 산업을 넘나드는 작품을 만드는 스털링 루비 역시 그만의 생산적인 예술 활동을 이어갈 뿐이다. 전시 <먼지 덮인 계단 위 쉬고 있는 정원사>는 그의 세계를 여러 장르로 드러낸다.

총검을 닮은 날렵한 형태의 조각들이 기념물처럼 설치된 공간에 서 있는 스털링 루비.
루비가 캔버스를 바닥에 둔 채 손으로 오일 스틱을 펴 바르고 문지르며 완성하는 추상회화 연작. 노랑, 빨강, 검정이 격렬한 폭발 속에서 충돌한다.

‘TURBINE. Burning Horizon.’(2024)
121.9 213.4 5.1cm.

전 세계 유명 예술가들의 이름을 모아 작업 성격과 예술계에서의 입지, 또는 시장에서의 가치, 인지도 등등으로 유형화하여 얄궂은 도표를 만들어본다면, 스털링 루비는 홀로 특별한 포지션을 차지할 인물이다. 메가 갤러리와 일하고 유수의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한 작가 중 자신의 패션 레이블을 출시하는 자는 스털링 루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올해 5월에 열린 프리즈 뉴욕에서 가고시안은 스털링 루비의 대형 추상회화 네 점을 선보였다. 가까이 자리한 데이비드 즈워너 부스는 디자인 페어장의 모습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는데 가고시안은 삼면의 벽이 꽉 차게 그림 네 점을, 외벽에 작은 콜라주 작품을 나란히 걸어놓고는 끝이었다. 루비의 그 ‘터바인’ 연작은 한 점당 55만 달러(한화로 약 7억 3,600만원)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2022년 첫 번째 프리즈 서울에서도 마주칠 수 있었다. 페어가 아시아에 상륙한 첫 해, 어떤 라인업으로 강렬한 첫인상을 남길지 고민했을 많은 갤러리 사이에서 벨기에의 자비에르 위프켄스는 스털링 루비 솔로 부스로 나타났다. 역시 무언가를 선언하듯 ‘터바인’ 연작 단 네 점만 걸어둔 상태였다. 여러 훌륭한 소속 작가를 둔 갤러리들이 페어장에서 한 작가의 대형 회화 몇 점만으로 할 말을 마치는 그런 기백과 여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스털링 루비였다.

시위자가 군인이 든 총구에 꽃을 꽂는 모습의 유명한 사진에서 착안한 조각.

‘FP(8747)’(2024)
159.4 16.5 14cm.

분더샵 청담 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신세계갤러리 청담은 9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스털링 루비의 개인전 <먼지 덮인 계단 위 쉬고 있는 정원사(The Flower Cutter Rests on Dust Covered Steps)>를 연다. 평범하지는 않은 제목이다. “네, 시적인 제목을 짓고 싶었어요. 꽃을 자르는 존재가 어느 개인 혹은 유령으로서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서사가 느껴지길 바랐고요. 또 서로 다른 주제들을 망라할 만한 추상적인 제목을 원했습니다. 이 전시는 정물, 성장과 쇠락, 시간의 순환, 고고학, 삶과 죽음 등 여러 주제를 담고 있어요.” 전시 오픈을 앞두고 만난 루비는 함께 갤러리를 걸으며 작품에 관해 안내해주었다. 스털링 루비는 회화, 드로잉, 세라믹, 조각, 콜라주, 텍스타일, 영상 등 실로 다방면에 걸친 작업을 한다. 이번 전시에도 한 작가의 작업이라 믿기 힘든 다양한 작품이 있다. 놀랍게도 총 40여 점은 모두 그가 올해 들어와 작업한 최신작이다. 그는 작년에 브뤼셀에서 개인전을 할 때는 비트 세대의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시에서 따온 제목을 썼다. “저는 시와 예술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거든요. 시와 예술 모두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증명되거나 완전히 이해될 필요는 없다는 개념이 마음에 듭니다.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를 지향해요.”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수 있는 루비의 작품 중 하나가 회화 ‘터바인’ 연작이다. 강렬하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화산이 폭발하고 화산재가 날리는 듯한 이미지도 있는 회화들. 그가 작업 중인 영상을 보면 캔버스를 대하는 그의 태도부터 격렬하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작업한다. 대개 무릎 꿇은 자세로 하기 때문에 무릎 보호대는 필수다(과거의 그는 스케이트 보드 문화와 펑크에 심취한 청년이었는데, 그가 작업 때 착용하는 무릎 보호대를 보면 보드가 떠오르고, ‘터바인’ 연작이 그라피티 아트의 또 다른 버전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가 사용하는 오일 스틱은 끈끈함을 넘어 딱딱함에 가깝기 때문에, 장갑을 낀 손으로 캔버스에 마구 문지르고 펴 바르다가 때로는 일어서서 장화를 신은 발로 짓이기듯이 캔버스 화면에 색을 채워간다. 거대한 캔버스 밑에는 골판지가 깔려 있다. 루비는 자연스럽게 색을 흡수한, 또 자기 제스처의 순간을 보여주는 흔적이기도 한 그 골판지에서 일부를 오려내어 작업의 마무리로 캔버스에 붙인다. 콜라주는 루비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덧붙인 골판지 조각들은 회화 내에서 계단 형태를 이루며 무언가에서 벗어나거나 상승하는 이미지를 만든다. 혹은 골판지가 폭발이나 화재나 전쟁이 일어나는 중인 화면을 가로지르면서, 어떤 원초적 힘이 그것들을 밀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70년대에 유행한 펄프 소설의 표지를 재구성한 종이 콜라주 작업.

‘DRFTRS(8692)’(2024)
30.5 22.9cm.

‘Mortar(8748)’(2024)
25.7 x 54 x 57.8cm.

“저는 1990년대 초반에 MoMA에서 브루스 나우먼의 회고전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현대미술을 많이 접하진 못한 때였지만, 폭력과 반복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죠. 나우먼의 미국 서사는 야구 배트, 펀칭백, 철창, 무서운 광대, 미로 속의 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들을 추상 작업에 녹여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전시를 본 이후로 계속해서 그 감정을 제 작업에서 추구해왔어요.” 스털링 루비의 추상 작업이 정신분열증을 미학적으로 풀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눈에 들어온 건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친 세라믹 작품들이다. 그는 과거 자신의 세라믹 연작에 대해 ‘나는 이전의 내 모든 시도와 헛된 현대적 제스처를 깨부수고 절구에 넣어, 무딘 공이로갈아버리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위압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묵직하고 거친 ‘Basin Theology/Dracula Boat’라는 작품은 대형 절구를 넘어 저승으로 향하는 세라믹 보트처럼 보인다. 도자를 굽는 과정에서 깨지고 터지는 게 삼분의 일이라면, 그는 실패한 그 파편들마저 모아서 절구나 대야 형태의 세라믹에 담아 다시 가마에 열을 가하고, 유약을 바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다. “절구 내부에 들어간 모든 것들은 한마디로 과거에 살아남지 못한 것들입니다. 저는 이런 작업을 늘 유적 발굴 현장이나 무덤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어쩌면 브루스 나우먼의 야구 배트가 스털링 루비에겐 무언가를 깨부술 절구의 공이로 치환된 건 아닐까?

루치오 폰타나의 세라믹 십자가가 떠오르는 스털링 루비식 세라믹 꽃.

‘Flower(8716)’(2024)
100.3 82.5 7.6cm.

스털링 루비의 작업은 자전적 성격이 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일하는 가고시안, 자비에르 위프켄스, 스푸르스 마거스 갤러리 등이 소개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공포, 억압, 폭력, 낙인 등으로 인한 사회적 풍경의 산물이다. 즉 사회 제도와 구조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나 부조리하고 소외된 것들을 탐구해 작업화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군인 경력, 유럽에서 온 자신의 혈통과 미국 소도시의 농경 커뮤니티에서 자란 성장 배경, 부모님이 겪은 히피 문화 등은 오랫동안 그를 형성한 문화 코드인 듯 하다. 2010년경 그는 캘리포니아 수감자를 운송하던 LA 경찰 버스를 개조해 철창이 달린 독방을 만들고, 관객이
체험할 수 있는 설치작을 선보인 적이 있다(루비에게 2024년 현재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아마도 ‘문명적인 불일치’일 것”이라고 답했다). 봉제 인형을 만들 듯 푹신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천 작업으로 뱀파이어가 입을 벌린 형상의 입체 조각 연작을 만들어, 값싼 담요를 대량 생산하는 노동 착취 문제에 주목하기도 했다.

<먼지 덮인 계단 위 쉬고 있는 정원사> 전에서는 루비의 텍스타일 작업을 볼 수 없지만, 그는 어릴 적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던 퀼트와 바느질에 관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제가 자란 곳에서는 기술이나 장인 정신 같은 전통적인 지식이 중요했어요. 노동 계급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환경이었죠.” 펜실베이니아주 소도시의 시골 마을에서 살았던 그는 칙칙한 농장과 단색조의 풍경 일색인 마을에서 유독 다채로운 색감의 퀼트를 접하며 자랐다. 이를테면 아미시들이 만들어 쓰던 이불이 그 한 예다. “무언가를 만드는 그런 유형의 직업은 대개 세대를 거쳐 전승되었고, 심지어 학교에서 관련 교육을 시키기도 했죠. 저는 졸업 후 직업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목공, 용접, 도면 작성 등의 수업을 들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는 저에게 바느질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요.” 언젠가 루비는 인터뷰에서 ‘나는 화가 날 때면 바느질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화가 나면 바느질을 한다니, 바느질은 그에게 일종의 리추얼이었을까? 시간이 쌓이고 리추얼이 반복되면 그건 곧 삶이 된다. 천이나 담요로 조각 설치 작업을 하는 것처럼 옷을 만드는 일 역시 그에게 자연스러워진 이유다.

한동안 분더샵에는 루비의 패션 레이블인 S.R. STUDIO. LA. CA.의 쿠튀르 의상과 오브제 컬렉션을 착용한 마네킹이 서 있을 것이다. 순수미술계와 패션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향하는 사이지만, 루비가 아예 의류 디자인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를 둘러싼 아트 딜러들이 말없이 축하만 해줬을 리는 없다. 2019년 스털링 루비는 처음 의류 컬렉션을 발표했고, 당시 <뉴요커>지는 이렇게 시작하는 기사를 냈다. ‘그의 의류 라인이 그가 만드는 예술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인가?’ 루비가 패션 디자인에 뛰어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레이 가와쿠보를 비롯해 예상치 못한 이들이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캘빈 클라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내던 시절의 라프 시몬스가 루비에게 남성복 라인 협업을 요청하기 전, 런웨이 쇼를 위한 세트 디자인이나 부티크 디자인을 먼저 의뢰한 건 꽤 예전 일이다. 루비는 인터뷰를 앞두고 사전에 ‘라프 시몬스에 관해선 묻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작품 전시와 의류 출시를 구분하려는 듯,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그의 컬렉션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옷을 만들든 캘빈 클라인과 작업을 하든, ‘왜 굳이 패션을?’ 식의 물음표를 가지는 이들을 향해 그가 취하는 입장은 한결같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나 옷을 만드는 것이나 그에겐 모두 똑같은 일이라는 점이다.

일명 ‘드라큘라 보트’로 불리는 거대한 세라믹 작품이 자리한 풍경. 박물관에서나 마주칠 듯한 느낌의 또 다른 세라믹 작품은 조갯빛이 도는 화석 같기도 하다.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이는 많지만, 스털링 루비처럼 종잡을 수 없이 다중적이며 분열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미공개 신작들은 모두 올해 작업한 것들이다. 예술가들에겐 종종 혹은 자주, 스스로 잘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나 아닌 것처럼’ 몰입해 작업에 매진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의 상태가 어떠한지 묘사해줄 수 있냐고 하자 루비는 말했다. “타르콥스키의 <스토커>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어요. 타르콥스키는 시간이 왜곡되고 현실이 중단된 상태에서 자신을 잃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죠.” 묘한 점은 그가 대비되는 것들을 가지고 노는 듯한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세라믹이라고 하면 매끈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루비는 거칠고 금속성마저 느껴져서 황폐한 풍경의 하나와 같은 세라믹 작품을 만든다. 추상 작업에 직사각형 골판지 조각을 덧붙여, 색들이 형태 없이 폭발하거나 소멸되는 듯한 와중에 기하학적인 순간을 조형한다. 총검에 해바라기꽃이 꽂힌 모습의 가늘고 긴 조각은 꽃과 나무 구조물을 땅에 묻어 형태를 빚고, 알루미늄을 부어 만드는 모래 주조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반전 시위가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의 유명한 보도 사진에서 착안한 이 조각에서 싱싱하던 꽃은 건조한 잿빛으로, 총검은 경건히 바쳐진 제물 혹은 기념비처럼 서 있다.

‘Bat Flower(8730)’(2024)
76.2 57.5cm.

루비는 드로잉을 향한 애정을 말할 때 유독 밝은 표정이었다. 그에게 드로잉은 다른 작업의 밑바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순수한 즐거움이다.

‘DRFTRS(8697)’(2024)
33 48.3cm.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의외의 말을 했다.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이 두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스털링 루비가 생각하는 성공의 의미란 바로 ‘자율성(Autonomy)’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에겐 예술가가 되는 것만큼 자율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또 없었다. 다운타운 LA 국경 부근 산업 지역에 위치한 약 3만 6,000평(12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압도적 규모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텍스타일을 가공하고 염색하며, 그의 작업 분야처럼 복잡다단한 재료들에 둘러싸인 채 왕성하게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 자율성을 제1원칙으로 삼는 예술가에겐 그가 향하는 곳이 곧 길이 된다. 그 점이 스털링 루비에게 미술관과 페어장, 패션 산업을 내키는대로 오가는 독특한 포지션을 부여한다. 어쩌면 예술계에서 진작 지긋지긋하게 느껴진 무엇이 있진 않을까? “다행히 예술계와 예술은 같지 않습니다. 제가 도전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되고 동기를 부여받는 한, 저는 대체로 예술계를 무시할 수 있을 거예요.”

포토그래퍼
강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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