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바치는 한 송이 꽃 25 SS 질 샌더 컬렉션

명수진

JIL SANDER 2025 SS 컬렉션

루시와 루크 마이어 듀오 디자이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질 샌더는 25 SS 시즌 앤티크한 분위기의 꽃무늬 카펫과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복고적 런웨이를 준비했다. 이는 어쩐지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은 낡은 호텔의 복도를 연상케했다. 주변으로는 루시와 루크 마이커 커플에게 이번 컬렉션의 영감을 준 캐나다 사진작가 그렉 지라드(Greg Girard)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작가는 게스트로도 자리했다. 그렉 지라드의 작품 중 네온 컬러 조명이 비치는 밤 사진은 질 샌더 25 SS 시즌 컬러 팔레트의 단서가 됐다. 또한 20세기 자동차와 모텔 객실, 전 세계 대도시의 나이트 라이프를 담은 그렉 지라드의 작품은 박시한 셔츠와 펜슬스커트 등에 디지털 프린트되어 등장하기도 했다. 루시와 루크 마이어 커플이 그간 예쁜 것만 보고 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 이번 시즌은 한층 다크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는 상상보다 가혹한 현실 세계를 반영한 것. 루시와 루크 마이어는 이번 컬렉션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환경 문제에 대한 반응이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남녀 통합으로 선보인 25 SS 질 샌더 컬렉션은 오묘한 무지개 컬러 광택이 도는 오버사이즈 코트와 슈트 시리즈로 문을 열었다. 이는 80년대에 질 샌더가 선보인 파워 드레싱에서 영감을 받은 것. 오프닝 모델은 웨이스트 벨트로 재킷을 원피스처럼 연출하긴 했지만 남녀 성별에 따른 차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젠더리스 슈트에 이어 네온 컬러가 옴브레 염색된 실크 셔츠, 스커트, 원피스 시리즈까지 80년대의 패션 공식을 따라 등장했다. 이는 절망과 허무가 지배한 세기말 홍콩 뒷골목을 떠오르게 했다. 한편, 보디라인을 유연하게 흐르는 파스텔컬러의 니트 원피스와 스커트 셋업에서는 희망이 버블처럼 부풀어 오르는 광란의 20년대 분위기도 느껴졌다. 펜던트 목걸이와 니트 톱에는 ‘외로운 마음(Lonely Hearts)’라는 문구를 새겼다.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는 여정처럼 컬렉션은 후반으로 갈수록 긍정적인 분위기를 냈다. 트윈 니트 카디건, 실크 톱, 드레스에 새긴 3D 꽃송이 니트 장식은 음울한 현실 세상에 보내는 루시아 루크 마이어 듀오 디자이너의 애정 어린 선물 같았다.

스토리와 콥센트가 확실한 컬렉션이었지만 중간중간 스트리트 스타일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실용적 아이템도 많았다. 실키한 소재로 변주한 워크웨어, 지퍼 장식으로 터프함을 더한 가죽 스커트, 소매 부분에 가죽을 덧댄 고급 버전의 바시티 재킷, 미식축구 선수를 연상케하는 래글런 소매 티셔츠, 작은 도일리 같은 패턴을 유머러스하게 더한 풀오버 등 꽤 많은 아이템이 스트리트의 감각을 담았다. 이는 부부이면서 듀오 디자이너인 루시와 루크 마이어의 상반된 이력 – 루시는 디올, 루크는 슈프림 출신이다 – 으로부터 비롯되는 흥미로운 긴장감이다.

영상
Courtesy of Jil Sander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