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따사로운 색

W

검정 일색으로 도배된 런웨이를 벗어나기 위해, 디자이너들은 조물주의 뜻에 따라 따사로운 색에 집중했다.

ICE-CREAM PASTEL

봄이면 꽃 피는 것이 불변의 섭리이지만, 패션의 섭리는 조금씩 변화가 느껴진다. 지난 2009년과 이번 2010년 봄 / 여름 시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컬러. 작년에는 마치 팬톤 차트를 펼쳐놓은 듯 다양한 원색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마치 ‘물빠진’ 듯한 느낌의 파스텔 색상에 집중했다. 원색을 주요 컬러로 쓰더라도 사이사이에 연한 파스텔 컬러를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파스텔 색상들은 마카롱이나 컵 케이크, 아이스크림(그 중에서도 배스킨라빈스의 ‘슈팅스타’) 등 여성들이 선호하는 디저트를 연상시키는데, 그 쓰임새는 걸리시한 룩보다는 좀더 우아한 실루엣이나 소재와 결합된 점이 이번 시즌의 가장 큰 특징이다. 러플과 트위스트 장식으로 극도로 가느다란 룩을 만든 버버리 프로 섬, 진주와 시퀸을 섬세하게 수놓아 쿠튀르적 면모를 보여준 크리스토퍼 케인, 글래머러스한 40년대 할리우드 여배우의 느낌을 살린 디올, 뚝 떨어지는 깨끗한 커팅의 트라페즈 드레스 위주의라인업을 선보인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 등은 모두 파스텔톤을 성숙한 무드로 연결시킨 케이스. 다소 어린 느낌의 파스텔톤을 한결 고급스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소재 선택 역시 중요한데, 빅터 & 롤프나 샤넬, 발렌티노 컬렉션처럼 고급스러운 레이스와 튤, 오간자 등을 사용해 극도로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살린 옷을 선택하는 것이 이번 시즌의 키포인트다.

EYE-POPPING GRAPHICS

선명한 꽃프린트, 야성적인 애니멀 프린트, 모던한 지 오메트릭 프린트… 여러 색을 사용한 멀티 프린트는 전통적인 봄 시즌의 필수품이었고, 그것은 2010년 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패션에서 나날이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디지털 프린트’가 이번 시즌 제대로 빛을 발했다는 것. 컴퓨터기술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비주얼 메이킹에 익숙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종이에 디자인을 스케치하고 이를 패턴화 해 재봉하는 과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 스피레이션을 컴퓨터 태블릿에 연결해 그려가면서 이를 형상화한 프린트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 될 정도다. 말하자면 패션 패러다임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파충류가죽 무늬를 가지고 그래픽적인데칼코마니 효과를 넣은 알렉산더 매퀸, 수정결정체를 촬영하고 그 일부분을 확대해서 프린트한 코스튬내셔널, 유리가 녹아내릴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나선형 무늬를 그래픽적으로 표현한 런던의 신예 메리카트란주 등이 대표적인 예다. 마치 3D처럼 보이는 돌체 &가 바나의 장미꽃 프린트, 잉카 제국의 벽화를 검정과 베이지 투톤으로 단순화시킨 지방시, 겹겹의 서클 무늬를 각도계처럼 표현한 드리스 반노튼 등의 컬렉션을 보면 꽃이나 동물, 나무 잎사귀, 보석 등 익숙한 소재를 프린트하더라도 그 마무리에는 하나같이 디지털적인 터치를 가미했음을 알 수 있다.

UNBLEACHED NEUTRAL NUDES

온통 검은색으로 옷장을 가득 채운 굉장한 ‘블랙마니아’라면, 미안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별로 입을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시즌을 불문하고 ‘올 블랙’룩을 고수한 디자이너들이 몇몇 있었지만, 이번 시즌만큼은 예외다. 지나치게 튀는 전형적인 봄 색상이 꺼려진다면 그 대안으로 추천할 만한 이번 시즌 컬러는 바로 중성적인 누드 톤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거의 염색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베이지에서 밝은 회색 톤에 이르는 누드톤의 상을 선보였다. 누드톤의 아름다움은 가까이서 볼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데, 만지면 바스러질 듯한 소재의 고급스러움이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 이번 시즌 끝단을 시접 처리하지 않고 올이 풀린 채로 놔두는 ‘로 컷(Raw Cut)’의 유행 역시 자연스러운 누드톤 트렌드에 일조했다. 질샌더와 샤넬, 보테가 베네타 등이로 컷과 누드톤을 효과적으로 접목한 대표적인 예다.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으로 각 도시를 대표하는 세브랜드, 뉴욕의 도나 카란과 밀라노의 알베르타 페레티, 파리의 랑방은 각기 입체 패턴의 드레이프로여성의 실루엣을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해 누드톤을 택했다. 이런 누드톤은 짧은 쇼츠나 스포티한 아우터보다는 무릎길이의 데이드레스나 재킷, 간절 기용테일러드코트 같은 포멀한 의상과 어우러지는 것 또한 이번 시즌의 특징이다. 격식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 검정 재킷을 대신할 만한 괜찮은 대안이 될 것이다.

에디터
패션 디렉터 / 최유경
포토그래퍼
PHOTOS|JASON LLOYD-EVAN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