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과 염정아의 어느멋진 날

권은경, 이예지

영화라는 세상에서 긴 시간 각자의 길을 걸어온 황정민과 염정아가 이제 같은 목적지에서 만났다.

강력계 에이스 형사인 여자와 과거 신분을 숨긴 채 사는 남자. 넷플릭스 독점 공개 영화 <크로스>는 부부가 된 두 사람이 선물하는 엔터테인먼트다.

황정민이 입은 슈트, 슈즈는 드리스 반 노튼, 염정아가 입은 시스루 블라우스, 팬츠, 타이츠, 힐, 이어링은 돌체앤가바나 제품.

황정민과 염정아가 <더블유> 촬영장에 모인 날은 어느 일요일이었다. 최근 매일 연극 <맥베스>를 준비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는 황정민에겐 이날이 연극 연습을 쉬는 하루였다. 보통의 일요일이었다면 염정아는 가족과 성당에 다녀온 후 식사와 설거지, 청소 등을 하며 오후를 보냈을 것이다. ‘시간 엄수란 정해진 시각보다 일찍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뜻.’ 할리우드에서 40년 넘게 활동 중인 톰 행크스가 작년에 한 강연에서 지나가듯 한 말이다. 황정민과 염정아의 시계 역시 표준시간과 다르게 움직인다. 황정민의 그 유명한 ‘밥상 수상 소감’에 빗대자면, 그는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맛있게 잘 먹기 전에 밥상을 둘러싼 동선을 미리 파악하고 반찬 냄새를 음미하며 숟가락 들 준비를 마쳐놓는 사람이다. 염정아는 ‘여배우’로 단장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김치볶음밥으로 속을 든든히 채운 다음 화보 촬영장에 1시간가량 먼저 도착한다. 서로에 대한 증언과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두 사람은 참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그런데, 이들이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치부해버리면 배우가 현장에 임하는 직업의식과 책임감과 노력을 조명할 길이 없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배우는 왜 오랫동안 사랑받는가? 카메라와 무대 뒤편에서 그 이유들을 찾는다면 거기엔 ‘일을 대하는 변함없는 태도’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긴 세월 활동을 이어오며, 배우일 때와 한 가정에 속한 일원일 때의 모드를 깔끔하게 전환하는 삶의 형식도 일찍이 습득했을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

“그렇게 오래 각자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참,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어요.” 염정아의 말처럼, 이제야 두 사람이 한 화면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부부라면 어떨까? 8월 9일 넷플릭스를 통해 독점 공개되는 <크로스>는 이 부부가 이끌어가는 오락 액션 영화다. 보통의 부부와는 좀 다르다. 여자는 나쁜 놈들 때려잡는 강력범죄수사대 에이스 형사다. 이 집에서 살뜰한 주부의 자리는 남자 몫이다. 바쁘고 목소리 큰 가장 대신 살림에 능한 내조의 달인. 실은 잘나가는 특수 요원이었고 그 과거를 숨긴 채 살아가는 남자. 이 부부가 큰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제 지난날의 일상과 다른, 더블 액션 플레이가 펼쳐진다.

더블브레스트 롱 코트는 아미 제품.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아 씨는 도도하고 좀 차가울 거라는 인상이 있었죠. 그런데 너무너무 수더분한 사람입니다. 정이 많고요. 그런 면에 놀랐어요. 집안일도 능숙하게 해내고 좋아해요.” 황정민이 본 염정아는 그렇다. 정작 염정아는 부지런함과 주변 챙기기에 있어서 황정민에 비하면 자신은 ‘어디 갖다 대지도 못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황정민에 대한 염정아의 첫마디는 ‘완전 끝내주는 분’이었다. “정민 선배님에 대한 얘길 전부터 많이 들었어요. 워낙 부지런하고, 현장에 일찍 도착해서 청소도 하고 그런다고. 언제나 먼저 움직이는 분이에요. 여자 배우에 대한 배려심도 상당해서 많이 챙겨주셨죠. 아이들 케어도 잘하시고, 얼마나 가정적
인지. 신기할 정도라니까요?”

새삼스럽지만 경이로운 건 데뷔 이래 지금껏 써온 두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상당히 촘촘하다는 점이다. 황정민의 경우, 2001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단 한 해도 빠짐없이’ 출연작을 선보였다. 지금 활동 중인 한국 배우 가운데 그처럼 밀도 높은 필모그래피를 쓸 수 있는 배우는 또 없을 것 같다. “배우에겐 몸이 악기예요. 악기는 계속 써줘야 하는 거고요. 가만 놓아두는 시간이 길어지면 다음에 사용할 때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기본적인 감성도 중요하지만, 연기는 기술이거든요.” 그의 말을 들으며, 노년에 이른 저명한 재즈 연주가의 말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일단 연습실로 가서 연주를 해라. 오늘도 내가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계속 연주해라.’ 스스로가 악기이자 연주자로서 황정민은 자신의 현이 녹슬 틈 없게, 연주하는 감각을 잊지 않게 살아왔다.

‘어떻게 하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삶의 주제에 헌신한 몇십 년이다. “그 점에만 더듬이를 세운 채 지금껏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없어진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제는 좋은 사람,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염정아가 입은 시스루 블라우스, 이어링은 돌체앤가바나, 황정민이 입은 팬츠, 슈즈는 드리스 반 노튼 제품.
퍼 베스트, 벨트, 데님 팬츠는 웰던 제품.

드라마와 영화를 고루 오간 염정아의 흔적도 빼곡하긴 마찬가지다. 염정아의 커리어에 변곡점을 만들어준 작품은 드라마 <스카이 캐슬>과 더 거슬러 올라가 영화 <장화, 홍련>을 꼽을 수 있겠지만, 사람 염정아의 모습이 비로소 좀 더 드러난 계기는 <삼시세끼 산촌편>이겠다. 여배우 셋의 시골 생활을 보여준 그 예능에서 염정아는 스태프들까지 배불리 해 먹이는 ‘큰손’의 실체를 드러냈다. 염정아에게 혹시 예전부터 가까운 이들에게서 ‘귀엽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는지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어우, 너무 많이 들었죠(웃음). 그나마 결혼하고서 많이 야무지게 변한 거예요. 한편으로는 아이를 낳은 후 훨씬 동글동글해졌고요.” 염정아는 그 샤프한 이목구비를 띤 마스크에 화려한 이미지가 강했던 시절에도 말을 할 때면 가식 없는 털털한 면모가 보였다. 외모와 이미지 그리고 자연인 사이에 발생되는 격차, 그 ‘갭’의 효과는 미스코리아 출신 20대 연예인이 연기, 노래, 버라이어티 쇼까지 두루 섭렵하며 활동하는 게 일반적이었던 90년대보다 지금 더 유효하게 통한다. 염정아는 이제 한 집안의 부모와 10대 자식 세대 모두가 아는 배우가 되었고, 예능으로 그런 유명 여배우의 사적인 모습을 엿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막 활동을 시작한 20대 때 매니저가 없었거든요. 엄마가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그러면서 제 일을 봐주셨죠. 엄마에게 너무 많은 연락이 와서 결국 제 일에 집중하려고 퇴직하셨는데, 그러자마자 저한테 매니저가 생겼어요(웃음). 제 아이들이 지금 중학생, 고등학생이에요. 우리 아이들은 제가 출연하는 예고편 영상을 보여줘도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나영석 피디가 예능으로 초대했던 염정아는 이제 7월 18일 첫 방영하는 tvN <언니네 산지직송>으로 다시 한번 사람 염정아의 리얼리티를 보여줄 예정이다.

노르딕 패턴 니트, 넉넉한 실루엣의 팬츠는 로에베, 스니커즈는 컨버스 제품.
두 배우가 입은 티셔츠는 르 주 제품.

생각해보면 이만한 커리어 역사를 가지고 황정민처럼 다양한 예능에 등장하는 배우도 없다. 카메라 앞에서 주저함과 어색함 없이 수다를 이어갈 수 있는 그는 유재석부터 유튜브 세계의 재재나 제프프에 이르는 세대와 두루 합을 이루는 게 가능하다. 예능이 그와 어린 세대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면, 무대는 그의 고향이자 또 다른 꿈이다. 그는 7월 13일부터 8월 1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연극 <맥베스> 무대에 오른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선보이는 건 그와 부인이기도 한 김미혜 대표가 오래전부터 꿈꿨던 바다. 욕망으로 인해 서서히 타락하다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마는 인간을 그린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이 고전은 그런 줄거리를 가진 현대극의 원형이기도 하다. “연습하면 할수록 맥베스라는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껴요. 모든 인간에겐 다 각자의 욕망이 있죠. 그 욕망에 눈이 멀 때 얼마나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느냐가 다를 뿐이고.”

욕망과 파멸이라고 하면, 영화 <아수라>와 <곡성>이 떠오른다. 2016년은 한국 영화계에 마법이 일어난 것처럼 훌륭한 영화가 우수수 등장한 해였다. 김성수와 나홍진 감독이, 또 황정민이, 지독할 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스크린에 쏟아낸 해이기도 하다. 주로 남성성의 세계에서 진하게 각인된 황정민의 얼굴은 최근 <서울의 봄>의 ‘전두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또 잊지 못할 황정민의 모습 하나는 임수정과 출연한 허진호 감독의 <행복>에 있다. 사람이 변하고 사랑이 막다른 지점에 이르렀을 때, 영화 속 황정민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다. “저는 멜로를 좋아해요. 사랑하는 이야기요. 배우는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정직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누구나 터부시하지 않는 감정이고, 관객들도 다 사랑을 해봤거나 하려고 하기 때문에 디테일까지 신경 쓰며 연기하지 않으면 다 들통이 나버리거든요.”

큼지막한 셔츠, 퍼 벨트, 데님 팬츠는 웰던 제품.

황정민이 류승완 감독과 <베테랑 2>를 작업하기 전에, 염정아는 그 감독과 <밀수>를 촬영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배우는 해녀 역할을 하기 위해 물속에서 숨 참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지난 몇 년은 염정아에게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는 시간이었다. 잠수의 나날을 경험한 걸 포함해 언젠가는 뮤지컬 영화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디어 이뤘고 (<인생은 아름다워>), 심지어 와이어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녔다(<외계+인>). <외계+인>에 염정아라는 기묘하고도 귀여운 신선이 나타날 때면 그녀는 신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저는 예전보다 지금 체력이 더 좋아졌어요. 안 해본 훈련들을 해야 했으니. 해내고 나면 또 별것 아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마음고생은 좀 하죠. ‘이 작품 너무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어 일단 오케이를 했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잖아요. 약속이니까.” 올여름은 염정아가 예능과 영화와 드라마를 한 시기에 선보이게 된 타이밍이다. 7월 31일에는 디즈니+에서 시리즈물인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이 공개된다. “여러 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에 제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 작품의 인물을 연기하는 건 또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정치인으로 출연하는데 아주 센 캐릭터예요. 태어나서 그렇게 욕을 많이 해본 적도 없어요(웃음).”

롱 코트는 아미, 팬츠는 Y-3 by 비이커 제품.

황정민은 올해 칸 영화제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그가 좋아하는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를 봤다. “영국에 사는 시리아 난민의 이야기예요. 와··· 어떻게 이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래, 내가 예전부터 좋아했던 영화가 바로 이런 거였지.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보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기 위한 영화에 대해 고민했다. 시간이 나면 ‘극장에서 영화나 한 편’ 찾는 게 익숙했던 때와는 다른 지금, 변화한 ‘관객’을 되찾기 위해 영화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아버지랑 같이 <벤허>를 보러 갔어요. 그게 제 첫 극장 경험이에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첫 경험을 마블 영화로 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들은 또 숏 폼이 익숙한 세대예요. 배우로서 영화라는 놀이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이 많던 시기에 <크로스> 대본을 받았어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만큼은 이야기에 빠져 웃을 수 있는 작품. 예나 지금이나 ‘재미’라는 뚜렷한 미덕을 갖춘 영화는 귀하다. 염정아가 <크로스>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소감을 말하는 모습은 꼭 영화를 시사회로 남들보다 먼저 본 관객이 신나서 수다를 떠는 듯했다. “너무 재밌는 거예요. 웃긴 코드가 있어요. 신인 감독님의 입봉작인데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만드셨을까, 감독님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저부터 재미있었기 때문에 더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각자의 길을 성실히 걸어온 영화계의 두 프로페셔널이 의기투합했다. 2024년의 황정민과 염정아는 여기에 있다. 다시, 묻고 싶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배우는 왜 오랫동안 사랑받는가?

포토그래퍼
김신애
스타일리스트
이혜영(황정민), 조운진(염정아)
헤어
이규원(황정민), 박내주(염정아)
메이크업
임미현(황정민), 송유미(염정아)
작품 협조
ⓒ최윤희, TINC
어시스턴트
박예니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