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팔도 지도를 펼쳐 보고 있자면 각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이 떠오르며 금세 입안에 침이 고인다.
그런데 서울을 바라보며 서울 음식을 떠올렸을 땐 괜스레 묘연한 기분에 빠져든다. 살면서 “이것 참 서울 음식답네”란 말을 내뱉거나 들어본 기억이 있던가? 그리하여 ‘서울 음식이란 무엇일까?’로 시작된 궁금증은 이윽고 ‘그런데 서울 음식이란 게 있나?’란 의심으로 가닿는다. 서울의 맛을 알고자, 그래서 더 정확히 즐기고자 그 정체에 얽힌 8가지 궁금증을 펼쳐봤다.
궁금증 하나,
서울 음식, 그 뿌리는 무엇일까?
지금처럼 서울이 수도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 한양, 그중에서도 궁중 음식이 보편적으로 서울 음식의 뿌리로 언급된다. 궁의 음식 문화가 혼례나 잔치 등의 교류를 통해 사대부로, 다시 사대부가의 문턱을 넘어 민가로 퍼졌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재료의 호화로움 차이는 있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궁중 음식으로 알려진 신선로는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지 <동국세시기> 등에 기록된 명칭으로 동시대 조리서 <소문사설> 등에서는 열구자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궁중음식과 서울음식>에 따르면 궁에서는 열구자탕으로, 양반가에서는 신선로라 불렸을 뿐 같은 음식이라는 것이다. 신선로는 본래 열구자탕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를 담아내는 그릇을 뜻하는 말이다. 무엇이든 담아내어 끓이면 신선로가 될 터이지만, 기본적으로 고기와 생선전, 각종 채소를 가지런히 돌려 담고 육수를 부어 끓이는 기본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궁중 음식이 한양 음식 문화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집중된 곳이니만큼 자연스럽게 음식이 가장 발달하고,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서 예를 든 신선로만 해도 근현대까지 인기를 끈 요리이니까 말이다. 다만,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일본 식문화가 스며들면서 신선로를 비롯해 많은 전통 요리가 소위 말하는 ‘퓨전’ 형태로 변모했다. 당시 시점에서 바라보면 개탄할 노릇이겠지만, 각종 식자재가 집결하는 지역인 만큼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한양이 경성이라 불리게 된 시기에는 일본 음식 자체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1911년 출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리법 안내서 <조선요리제법>에서 일본 요리 만드는 법을 다룰 정도였다. 해방 후 근현대에는 식자재뿐만 아니라 사람도 밀집되면서 서울의 음식 신은 점점 복잡해지고 풍성해졌다. 특히 1960년대는 산업화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었고, 그 중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가 가장 많았다. 고향을 떠나온 이들 중 지방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을 차려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의 음식 문화는 또 다른 변화에 들어섰다. 지금도 하나의 음식으로, 하나의 문장으로 딱 잘라 규정 짓기 어려운 서울의 다양한 음식 신은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궁금증 둘,
오롯이 서울에서 태어난 음식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서울 음식 역사의 시작을 분명 한양 음식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현재 서울의 맛을 온전히 대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기까지’ 한 음식, 전통을 이어갈 의무로 남은 음식이 아닌 실체를 마주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서울 음식이라고 거칠게 정의했을 때 곧바로 두 가지 장르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평양냉면이다. 본디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의 평양냉면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에 의해 서울에서 ‘다시’ 태어나 자랐고 현재까지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실제 평양의 그것과 결을 같이하나 동치미, 꿩고기 육수를 소고기 육수로 내거나 닭 육수와 섞어 쓰는 등 지역적, 시대적 특징에 따라 재료를 재편한 점이 특히 그렇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 ‘우래옥’ 역시 그렇다. 평양의 유명 냉면집 ‘명월관’을 운영한 고 장원일 회장이 평양 요리사들로 꾸려 본토에 가장 가까운 맛을 내며 절대적 지지를 받은 곳인데, 암소의 우둔살과 다리 안쪽 살로 만든 육수를 사용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 이따금 동치미 육수를 내는 곳이 있긴 했지만 십수 년 전 냉면에서 검출된 대장균의 주범으로 발효식품인 동치미 육수가 거론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과학의 발전이 바꿔놓은, 조금은 애석한 변화랄까. 두 번째는 이른바 ‘모던 한식’이다. 특히 파인 다이닝에서 구현하고 있는 현재의 모던 한식은 2009년 ‘정식당’ 임정식 셰프를 통해 ‘뉴 코리안’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이곳 서울에 씨앗이 뿌려졌다. 한 상 차림에서 벗어난 코스 형식, 서양의 조리 문법에 한국적 재료로 터치를 더한 요리는 ‘이게 한식이 맞냐’는 세간의 볼멘소리를 들었던 곡절의 시기를 굳건히 이겨내고 당당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해외에서 경험을 쌓고 서울로 돌아온 젊은 셰프들이 가세하면서 한식의 색채와 방법을 주인공 삼아 꽃피운 서울의 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
궁금증 셋,
전국에서 맛볼 수 있는 설렁탕은 서울 음식이 맞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부산 돼지국밥, 포천 이동갈비, 전주 비빔밥처럼 ‘서울 설렁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설렁탕은 ‘음식’으로는 최초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탄생설 중 가장 유력한 것은 조선시대 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선농단에 제를 지낼 때 의식을 치른 후 행사에 모여든 이들에게 소뼈를 곤 국물에 밥을 말아 대접했다는 이야기다. 이에 선농탕, 설농탕으로 불리다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는 이야기. ‘썰’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가장 오래된 설렁탕집인 종로의 ‘이문 설렁탕’이 서울 땅에 자리한 세월이 벌써 100년을 훌쩍 넘는다. 이곳을 필두로 1920년대 경성에만 설렁탕집이 10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성행했다. 일제강점기 전쟁 식량 보급을 목적으로 육우 생산량과 정육점이 크게 늘었고, 고기를 팔고 남은 뼈와 부산물로 국을 끓여 뚝배기에 담아 저렴한 가격에 판 것이 인기 요인. 그 맛이 얼마나 사람들을 홀렸는지, 소를 정육하는 백정을 천하게 여기는 신분제가 여전히 존재하던 중에 차마 설렁탕집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이 배달해 먹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서울에서 명성을 떨친 또 하나의 음식으로 서울식 추탕(추어탕)이 있다. 설렁탕만큼 유행한 것은 아니나 미꾸라지 양식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가을철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입맛을 더욱 다시게 했다. 설렁탕과 추탕의 대단한 인기는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발간된 잡지 <별건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궁금증 넷,
서울식 추탕, 서울식 불고기에서 ‘서울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연하지만 서울만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뜻. 서울식 추탕의 가장 큰 특징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는 것이다. 1924년 첫 출간된 조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소고기 사태나 업진살로 낸 육수에 각종 버섯과 파를 넣고 곱창이나 양도 삶아 썰어 넣었다. 이후 미꾸라지를 넣어 뚜껑을 닫고 끓이는 식이다.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 체에 걸러 끓이는 남도식 추어탕에 밀린 것일까. 이제는 자취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다동에 위치한 ‘용금옥’이 거의 유일하게 서울식 추탕을 선보이는 곳이다. 서울식과 남도식 두 종류를 모두 맛볼 수 있는데, 서울식은 청양고추를 넣어 칼칼하고 깔끔하게, 남도식은 들깻가루를 넣어 걸쭉하고 고소하게 완성하는 것도 차이점이다. 불고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말하고 싶다. 구이식과 전골식, 그리고 서울식. 서울식은 구이와 전골의 중간 형태다.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황동 판에 얇게 저며 간장 양념에 재운 소고기를 올려 굽고 테두리를 따라 채워진 육수에 적셔가며 익혀 먹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1957년 서울 ‘한일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주의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당시의 조리장이 일본식 스키야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달콤한 양념, 자작한 국물에 지지듯 익히는 방식이 분명 비슷한 데가 있으나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19세기 난로회의 모습을 그린 <성협풍속화첩>의 ‘야연’에 특히 잘 드러나 있다. 화로에 둘러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전립골’이라고 불리는 불판. 갓을 뒤집어놓은 모양새로 평평한 부분에 고기를 구워 먹고 움푹 들어간 부분에 육수를 담아 채소나 고기를 데쳐 먹었다. 채수가 잘 우러난 국물에 아예 고기를 넣어 전골로 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황동 불판과 비교했을 때 중심부와 테두리의 역할만 바뀌었을 뿐 유사한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서울식 불고기 역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식문화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궁금증 다섯,
음식의 간으로 지역 음식을 구분할 때, 서울의 간은 어떠한가?
“이거 서울 김치네”라든지, “김치는 역시 전라도지”라는 말. 한 번 쯤 내뱉거나 들어본 적 있지 않은가. 한반도의 모든 지역이 가지고 있는 식문화, 김치로 비교했을 때 서울의 간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듯싶다. 지역별 김치 맛의 차이는 재료에서 오고, 재료의 차이는 기온에서 온다. 음식이 쉬이 변해 염장과 강한 양념이 발달한 무더운 아래 지방, 소금 간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추운 윗지방의 딱 중간 지대에 놓인 서울의 김치 맛은 위치만큼이나 중도를 유지한다. 간이 너무 세지도, 싱겁지도 않고 자작이 적당한 국물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멸치젓, 갈치속젓 등에 비해 맛이 깔끔한 새우젓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점차 ‘개운하고 시원한’ 맛으로 익어간다.
궁금증 여섯,
서울의 맛을 대표하는 거리는?
앞서 말했듯이 하나의 음식으로 대변하기 어려운 서울의 ‘다양한’ 식문화는 음식 거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구의 안지랑 곱창 골목, 강릉의 초당두부 거리처럼 서울의 맛을 대표하는 거리라 했을 때 대번에 떠오르는 곳들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한 신당동 떡볶이 거리, 반건조한 아귀가 아닌 생아귀를 사용하며 서울식 아귀찜을 보여준 가게들이 여전히 성업 중인 낙원동 아구찜 골목, 이북에서 건너온 아낙들이 빈대떡을 부쳐 팔던 대폿집에서 돼지족 요리를 낸 것이 자리 잡으면서 형성된 장충동 족발 골목, 1초가 급하고 한 푼이 아쉬운 시장 상인과 직장인들 대상으로 1970년대부터 성행한 동대문 닭한마리 골목, 그리고 어쩌면 공시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헤아린 노량진 컵밥 골목까지. 식문화가 사람, 재료, 시간(역사)에 의해 형성된다는 당연한 이치 위에서 바라보면 대부분의 이러한 여러 음식 골목이 모두 지금 서울의 맛을 대표하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궁금증 일곱,
서울의 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보르도 와인, 부르고뉴 와인 등 해외에서는 지역명이 곧 술의 특징을 대변하는 대명사처럼 쓰인다. 샴페인, 코냑처럼 스파클링이라는 대분류를 벗어나 독자적인 이름으로 불리며 그 지역의 술맛을 대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술의 ‘스타일’ 면에서는 아직 뚜렷하게 서울 술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없지만 거론된 술들이 모두 해당 지역에서 자라는 포도로, 해당 지역의 양조장에서 빚는 술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현재 100% 서울의 재료로 서울에서 술을 빚는 양조장이 한 곳 존재한다. 성수동에 위치한 ‘한강주조’다. 서울에서 유일한 쌀 재배지, 강서구에서 재배한 경복궁쌀로 빚는 ‘나루 생막걸리’는 서울 유일의 지역 특산주이기도 하다. 역사와 전통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삼해소주’도 빼놓을 수 없다. 한양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사이에서 널리 마시던 서울 대표 소주로 20세기 초반까지 서울 마포지역에서 수백수천 독을 빚었다고 전해진다. 무형문화재이자 식품 명인이었던 김택상 명인이 북촌에서 그 맥을 잇고 있었는데, 2021년 작고 후 삼해소주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김현종 대표가 삼해소주 역사의 결을 따라 마포로 거처를 옮겨 공방을 지키고 있다.
궁금증 여덟,
그럼에도, 서울의 맛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자가 호흡하는 전통. 글로만 남은 궁중 음식을 재현하고 이으려는 이들, 새로운 문법으로 한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들, 반드시 특별한 철학이 있지 않아도 생계를 위해 오늘의 음식을 짓는 이들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유로 전통을 잇고, 새로운 전통을 써 내려가는 움직임이 곧 서울의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 프리랜스 에디터
- 장새별(F&B콘텐츠 공방 ‘스타앤비트’ 대표)
- 포토그래퍼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