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테에 지원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한국의 젊은 갤러리스트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매해 6월 개최되는 아트 바젤 바젤의 위성 페어로, 젊은 세대의 갤러리 및 작가를 집중적으로 소개해 ‘아트바젤 등용문로’으 통하는 리스테. 지난 6월 10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올해의 페어에 한국 최초로 입성한 영 갤러리스트가 있다. 그가 두근거림으로 가득한 리스테 항해 일지를 보내왔다.
헬로, 리스테!
리스테(Liste)는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모토로 1996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한 아트페어다. 그간 데이비드 즈워너, 페로탕, 더 모던 인스티튜트, 헤럴드 스트리트 등 오늘날 미술 시장을 선도하는 갤러리부터 런던의 로즈 이스턴(Rose Easton), 토론토의 프란츠 카카 (Franz Kaka), 아테네의 핫 휠스(Hot Wheels), 빈의 소피 타파이 (Sophie Tappeiner) 등 최근 핫하게 떠오르는 갤러리까지 이들은 리스테를 통해 갤러리의 초기 기반을 다짐과 동시에 갤러리가 추구하는 고유의 프로그램을 선보여왔다. 내가 리스테에 관객으로서 처음 방문한 것은 2017년의 일이다. 당시 리스테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기이함’에 가까웠다. 우선 아트페어가 열릴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장소(양조장)에서 페어를 진행했고, 갤러리들은 부스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괴상한 곳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펼쳤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계단을 오르내릴수록 리스테라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페어와는 결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단지 판매를 위한 페어라고 하기엔 너무 실험적인 작품, 달리 말하면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 많았고, ‘정말 여기엔 아무도 없겠지’ 하는 곳에 부스를 지키며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갤러리스트도 있었다. 이렇게 반복하며 마주한 몇몇 장면은 당시 미술을 전공하고 있던 사람, 즉 예비 작가였던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리스테에 참여하려면 어떤 작업을 해야 할까, 이상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갤러리와 일해야 하는 걸까, 상업적인 것을 지향하면 리스테 근처에는 영영 못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등등.
시간이 흘러 2020년, 나는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작업을 그만두게 되었고, 스튜디오로 사용하려던 작업실은 대책 없이 지금의 갤러리 ‘실린더’가 되었다. 스스로 꾸린 전시를 통해 판매라는 것을 해보고 갤러리의 꼴을 갖춰 실린더를 운영한 지 2~3년을 넘길 무렵인 2023년 11월 어느 날, 리스테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리스테에 지원하라는 단순 명료한 내용. 같은 해 9월 프리즈 서울에 참여도 해봤겠다, 점차 짜임새를 갖춘 갤러리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별 고민 없이 리스테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올해 페어를 위해선 한국의 두 젊은 작가 장종완, 박예림의 부스 전시인 <Skate Blade>를 제안했다. 간단히 말해 각기 다른 두 작가의 작업적 타임라인을 스케이트 날 위에 올리고, 말려 있는 날의 생김새에서 착안한 상상적 변형을 통해 두 작가의 시간대가 이어진 순환고리를 만든다는 내용의 전시였다. 여러 드래프트의 글과 수십 장의 스케치업을 거쳐 최종 제안서를 제출했고, 3개월 뒤인 2024년 2월, 참가 승인 이메일을 받았다. 실린더는 감사하게 부스비를 서포트해주는 ‘Friends of Liste’에도 선정되어 무사히 참여하게 되었다.
리스테 2024에서 건져 올린 대안적이고도 결정적 장면들
2021년, 리스테는 페어 장소를 이전의 양조장에서 현재의 메세 바젤(Messe Basel)로 옮겼다. 메세 바젤은 매해 아트바젤 바젤이 열리기도 하는 대형 박람회장 성격의 장소로, 리스테는 2021년부터 이곳의 Hall 1.1에서 개최되고 있다. 리스테를 양조장 공간에서 처음 접한 나로서는 기존 페어의 문법을 따르는 컨벤션 형태의 올해 페어가 과연 리스테 특유의 유산을 잘 계승할 수 있을지 조금은 의문이었다. 그런데 페어장에 도착해서 보니 걱정과 우려는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한,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거대한 페어장 홀 가운데 자리한 방사형 부스 구조가 눈에 띄었는데, 이 구조는 페어에 참여하는 각 갤러리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다 직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페어 건축을 담당한 케르스텐 기어스(Kersten Geers)와 데이비드 반 세버렌(David Van Severen)에 따르면 전형적인 페어의 동선에서 벗어나 아트 페어를 열려 있는 시스템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재창조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한다. 이는 곧 직관적이고, 실용적이며, 혁신적 콜렉티브인 리스테 아트페어의 정체성을 공간에 반영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 페어에 참여하는 갤러리들이 서로 이웃하며 일종의 하이브리드적 풍경을 펼치게 된 듯했다. 또 한 부스에서 최대 3인까지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갤러리가 솔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기에,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이 아니라 한 작가의 온전한 작업 세계를 밀도 있게 엿볼 수 있었다.
리스테 페어의 가장 핵심적 가치는 ‘새로운 발견’일 거다. 올해 페어에는 전 세계 35개 국가에서 총 91개 갤러리가 참여했는데, 대다수 갤러리가 고유의 정체성 아래 새로운 유형의 갤러리 모델, 가령 작가와 갤러리스트의 관계, 상업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 등 여러 가지 대안을 새롭게 제시하려 했음을 느꼈다. 모두가 아직 설립 연차가 오래되지 않은 갤러리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들이 리스테에 참여할 수 있는 연한인 5년이 지나 다음 단계로 올라선 그때의 모습이 어떨지 몹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페어에 공식 참여한 올해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부스를 소개한다. 우선 브뤼셀에 기반을 둔 데미안&더 러브 구루(Damien & The Love Guru)가 선보인 크리스티아네 블라트만(Christiane Blattmann)의 프레젠테이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만나는 페어 입구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가는 강이 흐르는 유역의 경계가 되는 분수계에서 모티프를 얻어, 이 특징을 산업용 배수관으로 옮겨온다. 배수관은 예측할 수 없는 외부의 자연적 요소와 건조한 실내를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작가는 실외에 있어야 할 배수관 형태의 조각들을 부스 내부에 위치시켰다. 조각을 통해 부스 벽을 두 세계의 경계로 정의하고 이를 반전시켜 풀어낸 작가의 프레젠테이션은 리스테로 입장하기 전 일종의 분수계가 되어 다른 경계 너머인 페어장으로 넘어가는 ‘포털’과도 같은 장치로 작용했다.
방콕의 노바 컨템퍼러리(Nova Contemporary)가 선보인 팜 비라다(Pam Virada)의 부스도 인상적이었다. 부스를 밝
힌 것은 실제 초에 붙어 일렁거리는 촛불. 팜 비라다는 버려진 쟁반을 촛대로 재구성하여 하나의 가정용품을 다른 물건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펼치는 작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소속감과 기억의 다양한 상태를 봉합함으로써 가정을 고차원적인 성찰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작가의 작품들은 붙잡을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의 무형적 성질을 탐구하는 니모닉 장치(무언가를 기억하기 쉽게 도움을 주는 장치)로서 작동하고, 그래서인지 묘하게 당시 촛불을 본 순간들이 이번 리스테에서의 기억과 지금을 매개하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만 같다. 덧붙여 부스의 촛대에는 불이 붙어 있기도, 때로는 꺼져 있기도 하여 동적이고 가변적인 물질을 제한된 조건 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 부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파리에 기반을 둔 페트린(Petrine)은 세나 사사키 (Sena Sasaki)의 장소 특정적 작업을 선보였다. 그의 작업은 바위를 감상하는 일본의 수석 문화에 기반을 둔다. 작가는 2017년, 자신의 고향인 홋카이도의 한 오래된 집으로 이사하고, 전 주인의 유품으로 가득 찬 방을 발견한다. 그중에는 지질학적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돌을 모아둔 방이 있었다. 세나는 사라진 바위의 형태, 크기, 무게, 질감, 색깔 등을 상상하면서 바위가 있던 자리에 남겨진 ‘흔적’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를 토대로 홋카이도의 강을 따라 돌을 수집하며 강과 그 지형의 흔적을 간직한 점토를 돌 위에 올려 이를 소성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이번 리스테를 위해 진행 중인 수석 시리즈의 배경을 바젤로 옮기고, 한 달의 압축된 시간 동안 그 내러티브를 바젤의 것으로 전환하였다. 작가로부터 작품 프로덕션과 얽힌 바젤 현지에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로운 레이어 중 하나였다. (처음엔 바젤 사람들이 라인강에서 지속적으로 돌을 옮기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작업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나중에는 식사에도 초대해주었다고 한다.)
농지 한복판에서 열린 ‘바젤 소셜 클럽’
6월 한 달, 스위스 바젤은 어느 때보다 분주해진다. 리스테와 더불어 또 하나의 흥미로운 대안적 페어인 ‘바젤 소셜 클럽(Basel Social Club)’이 개최되기 때문이다. 바젤 소셜 클럽은 ‘소셜 클럽’을 내세우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기존 아트페어의 문법을 전복시키고자 2022년 출범한 이벤트다. 입장료 없이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매해 개최 장소를 달리하며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3회째를 맞는 올해, 이들은 부르더홀츠와 바젤란트로 이어지는 바젤 외곽의 대규모 농장을 개최지로 낙점했다. 전시 작품들은 다양한 기상 조건에도 견딜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었고, 농지의 넓은 특징을 반영해 작품들 사이 간격이 여유로웠다. 그리고 조금은 예측 불가했던 6월의 날씨 속에서 우뚝 솟아 있는 다양한 작업들과 이를 감상하는 관객은
자연 속에서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연출해냈고, 입장료가 없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미술 관계자들, 혹은 이와 관련성이 없는 현지인들은 서로 소시지와 맥주를 마시면서 도보로, 혹은 자전거로 자신만의 경로를 만들며 이벤트를 즐겼다. 특히 여름의 유럽은 해가 길기 때문에 바젤 소셜 클럽은 늦은 시간까지 관람할 수 있었고, 선선한 날씨와 함께 진행된 야외 프로젝트는 방문객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What is Love’로 유명한 볼리비아의 가수 하더웨이(Haddaway)가 야외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그 외 각종 다채로운 퍼포먼스도 정지된 작품들과 함께 바젤 소셜 클럽을 생동감 넘치는 이벤트로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성격은 조금 다르겠지만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나 아트 바젤의 장외 전시 섹션 파쿠르(Parcours)처럼 맵을 보며 작업이 전시된 장소를 찾아다니는 즐거움 또한 있었다. 실린더 또한 올해 리스테에 참여한 박예림의 작품을 바젤 소셜 클럽에 전시했다. 부식된 동판을 야외에 두어 의도적으로 더 부식되게 만들었는데, 바젤 소셜 클럽이 끝나고 작업을 회수할 때 표면이 더욱 부식되어 의도대로(?) 작업이 작동된 것 같아 내심 작가와 나 모두 뿌듯했다.
리스테를 떠나며
팬데믹 이후 다양한 페어가 출몰하면서 미술 지형의 풍경이 다채로워지고 있다. 각기 다른 페어들은 좋은 프로그램을 가진 갤러리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만의 장점을 내세우며 페어를 운영해간다. 그중 리스테는 설립자, 디렉터부터 페어 매니저, 그리고 식료품을 파는 직원들까지 일주일간 열리는 페어에 진심이었고, 부스를 돌아다니며 그 경험이 어땠는지를 계속해서 체킹했다. 덕분에 페어에 참여한 갤러리들은 주최 측과 함께 페어를 만들어간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리스테는 앞서 언급한 ‘Friends of Liste’부터 시작해 작가들이 신작을 제작할 경우 제작비의 일정 부분을 지원하며, 특히 갤러리 경력이 짧고 해외 페어가 처음인 갤러리스트에 게 페어 전후로 세심한 도움을 제공했다.
총 일주일간 진행된 리스테는 한마디로 배움의 장이었다. 향후 다른 페어, 혹은 더 큰 규모의 페어에 참여할 경우 이를 위한 전략, 안배해야 할 체력 등 페어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긴 호흡과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마치 벌크업을 위해 무거운 무게의 바벨을 드는 일과 같았달까. 이번 리스테에서의 경험을 통해 다가오는 프리즈 서울을 더욱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해외로 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낯섦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갤러리스트로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해외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갤러리가 가져야 할 체크포인트는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했고, 앞으로 갤러리스트로서 풀어나가야 할 현실적인 숙제가 보다 분명해진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 숙제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무렵 나와 갤러리는 어떤 형태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마지막으로 갤러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세련되거나 기상 천외한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싶다면, 혹은 동시대 미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40대 미만의 작가들이 보고 싶다면 내년 열릴 리스테 현장을 방문해보길 권한다. 더불어 방문하기 전, 혹은 페어에 가지 않더라도 리스테 홈페이지에 들어가 1996년부터 그간 참여한 갤러리 목록을 들여다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리스트를 보며 내가 좋아하는 갤러리의 과거를 찾아보는 것도 리스테를 방문하기 전 플랫폼에 대한 호기심을 촉진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글
- 노두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