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작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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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안 카펫과 자카드 커튼, 꽃무늬 벽지와 빈티지한 식탁보.. 친근하고 안락한 공간을 연상시키는 데커레이션과 인테리어 아이디어가 트렌드로 올라섰다. 바쁜 일상 속, 긍정적인 에너지와 여유로운 분위기로 정신적 피로를 말끔히 씻어줄 것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피로한 사회에 살고 있다. 과도한 업무량과 정신적 압박, 치열한 경쟁에 의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심신이 고달프다. 그렇게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늘 휴식을 갈구하며 평온하고 여유로운 삶을 꿈꾼다. 사회의 피로 지수가 높아질수록 아늑한 공간과 여가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인테리어 관련 태그가 천만여 개가 훌쩍 넘어서는 것, 2015년 ‘세계행복보고서’에서 공식적으로 행복한 국가로 꼽힌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의 여유로운 일상이 반영된 인테리어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부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신적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힐링 공간에 대한 선망은 패션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시즌 커튼과 카펫, 벽지 같은 인테리어를 테마로 한 흐름이 트렌드의 중심으로 들어선 것도 그 때문!

사실 이 같은 흐름은 2015 S/S 시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느 가정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법한 윌리엄 모리스풍의 벽지와 패브릭으로 만든 듯한 플로럴 룩이 셀린과 루이 비통, 프라다 같은 빅 하우스의 메인 룩으로 등장했으니까. 털이 보송보송한 고양이들이 뛰어놀 듯한 따뜻한 페르시안 카펫이 등장하는 시즌이 되자 한결 농밀한 색감과 이국적인 패턴이 어우러진 룩이 런웨이를 점령했다. 나무 바닥으로 된 브루클린의 아파트에 깔려 있을 법한 페르시안 카펫의 유행은 최근 가장 강력한 트렌드를 선도하는 구찌로부터 시작됐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외모를 지닌 구찌의 수장,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영감은 전 세계의 앤티크 숍에서 수집한 빈티지한 패브릭에서 출발하는데, 쇼는 물론 광고 이미지에서 카펫은 묵직한 존재감을 발한다. 현대미술의 요람이라 불리는 베네치아의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를 뒤덮고 있는 아티스트 루돌프
스틴겔(Rudolf Stingel)의 카펫 설치 작품을 연상시키듯 수백 개의 페르시안 카펫이 깔린 쇼장을 오가는 구찌 걸들의 룩은 중세 시대 시인의 다락방을 감싸고 있을 법한 벽지나 커튼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찌발 카펫 트렌드는 이번 시즌 수많은 디자이너의 주요 테마로 작용했다. 토리 버치는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듯한 카펫을 쇼장 전체에 도배했는데, 이는 1960년대 말 런던을 배경으로 섹스와 마약에 찌든 록스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퍼포먼스(Performance)>의 모로칸 인테리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빈티지 카펫이 깔린 무대 위에 오른 모델들은 마라케시와 뉴욕의 첼시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아니타 팔렌버그의 분신처럼 보였다. 안토니오 마라스 역시 무대의 메인 테마를 카펫으로 잡았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브로케이드와 카펫 문양이 조화를 이룬 보헤미안 룩을 완성했다. 그런가 하면 에트로의 무대에는 카펫과 더불어 벽지, 태피스트리, 18세기 프랑스 건축 양식의 판자 등을 이용해 테크니컬하게 패치워크한 룩의 향연이 펼쳐졌다. “인테리어의 즐거움에 대해 깨우쳤어요. 페이즐리를 토대로 벨벳, 트위드, 브로케이드 등 다양한 소재를 매치해 3D처럼 보이는 프린트를 만들었죠.” 베로니카 에트로의 말처럼 쇼는 풍요롭고 매혹적인 에트로 홈 컬렉션을 보는 듯했다. 에트로와 함께 보헤미안 딜럭스 무드의 최강자로 꼽히는 드리스 반 노튼 역시 비상한 데커레이션 트렌드를 제안했다. 고풍스러운 파리 시청사의 웅장하고 화려한 살롱에서 쇼를 연 드리스 반 노튼의 무대에는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거대한 자카드 커튼이 설치되었고, 길디드 프린지, 브로케이드, 시퀸과 어우러진 글래머러스한 인테리어를 입은 그의 모델들은 무대 배경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이처럼 친숙한 인테리어와 데커레이션 빈티지 벽지와 벨벳 소파, 램프와 세라믹 꽃병, 타자기가 놓인 책상 등 50년대풍 인테리어로 꾸민 ‘집’으로 관객을 초대한 디자이너는 또 있다. 그곳엔 어떤 여자들이 사느냐는 물음에 에르뎀은 이렇게 답했다. “아티스트나 소설가를 꿈꾸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나 로미 슈나이더같이 좋은 집안에서 자란 50년대 여자를 상상했지요. 그녀는 소파나 커튼 패브릭으로도 옷을 만들어 입을 줄 알고 할머니의 오래된 오실롯 코트를 좋아해요.”

이처럼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의 뮤즈는 히피들의 집 안 한쪽에 놓여 있을 법한 패치워크 담요나 시골집 식탁보로 쓰일 것 같은 꽃무늬 천, 빈티지 페르시안 카펫과 자카드 커튼을 두른 여성이다. 때론 할머니 같기도 하고 때론 빈티지 숍에 열광하는 소녀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언뜻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과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집보다 안락하고 친근한 장소는 없으니까

에디터
정진아
artwork by
PYO KI SIK
photo
INDIGITAL, GETTY IMAGES KOREA/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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