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어보니 가관이다. 남편 혹은 남자 형제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당신의 옷장. 남자처럼 편한 옷만 찾다가는 종국엔 희미하게 남은 여성성마저 잃을 것 같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어울리지도 않는 ‘여자옷’으로 옷장을 채우자니 취향을 내동댕이치는 것 같아 어쩐지 서글프지 않나. 꼭 꽃무늬 블라우스에 ‘샬랄라’ 치마를 입어야 여잔가? 당신이 줄기차게 입는 ‘남자옷’에도 희망은 있다. 여자가 되고 싶은 여자를 위한 매니시 룩 스타일링 레시피.
스웨트 티셔츠
넉넉한 품의 스웨트 셔츠는 실내복 혹은 집 앞 슈퍼 갈 때나 입는 아이템으로 치부되기엔 아까운 아이템이다. 혹시 라면 국물이라도 튄 맨투맨 티셔츠가 있다면 이참에 곱게 빨아 다리미로 다려서 외출복으로 인생역전을 꾀해보는 것도 좋겠다. 평생 청바지에만 매치한 맨투맨 티셔츠에 드레시한 맥시 스커트와의 만남을 주선해볼 것. 세상에 이런 짝이 또 없다. 여기에 엄마 화장대에 놓인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오버사이즈 재킷을 남자친구가 입혀준 양 사뿐히 어깨에 걸칠 것. 그렇다고 이참에 굳이 뾰족구두까지 신겠다고 무리수를 던졌다간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어제 치노 팬츠에 신은 옥스퍼드 슈즈나 로퍼 혹은 스니커를 꺼내 신어도 무방하다. 오히려 그게 근사하다.
테일러드 팬츠
검은색 테일러드 팬츠와 화이트 셔츠. 모르긴 몰라도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조합일 것이다. 여기에 검은색 테일러드 재킷이라도 가세했다간 그야말로 기만 세고 매력 없는 노처녀, 혹은 여자 경호원의 옷차림 정도가 될 터. 하지만 이 두 아이템은 현대 의생활에서 없어선 안 될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이를 가능한 한 여성스럽게 포장하는 일이 당신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테일러드 재킷 대신 케이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건어떨까? 새로운 블랙이라 일컬어지는 캐멀 컬러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장식 하나 없이 미니멀한 케이프는 뉴 클리니즘이 부각되고 있는 최근의 시류에도 잘 부합할뿐더러 재킷과는 또 다른, 차별화된 매력을 발산한다. 펄럭이는 케이프 자락, 상상만으로도 근사하지 않나? 여기엔 빅 클러치나 빅 백이 안성맞춤. 신발은 발목이 드러나지 않는 앵클부츠가 좋겠다.
밀리터리 재킷
밀리터리 룩의 기세가 등등하다. 모르긴 몰라도이번 시즌 트렌드에 1g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저 생소한 이야기는 아닐 듯. 밀리터리 룩, 언뜻 들어도 페미닌한 이미지와는 몇 광년 떨어져 있는 패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 시즌엔 밀리터리 룩이 편견에 반기를 들었다. 당신이 한때 유니폼처럼 입은 카고팬츠와 소위 ‘야상’은 옷장 깊숙이 넣어두거나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는 편이 좋겠다. 대신 매니시한 밀리터리 재킷 하나쯤은 새로 장만하는 것이 어떨지. 베이식한 진과도 잘 어울리지만 아찔한 미니스커트나 쇼츠 그리고 녹아내릴 듯 낭만적인 시폰 블라우스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여기엔 오히려 여성스러운 펌프스나 샌들보다 투박한 레이스업 부츠가더 잘 어울린다. 가방은 끈이 긴 메신저백이나 빅 백이 제격.
바이커 재킷
언젠가부터 바이커 재킷 없이 가을을 나는 건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베이식의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사내 냄새가 풀풀 나는 아이템인 것은 사실. 그렇다면 이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릴 지원군이 필요한 시점. 물론 한때 ‘샤방샤방’ 한 시폰 미니 드레스와 열애를 했으나이도 지나간 유행. 바이커 재킷에 완숙미를 더할 때가 왔다. 새로운 파트너로 매니시한 와이드 팬츠와의 만남을 주선하고싶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도 무리 없이 어울릴 만한 조합. 물론 나긋나긋한 여성미를 더하려면 이너웨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침 전성기를 구가하는 레이스 톱은 바이커 재킷과 와이드 팬츠의 만남에 완충제로 손색이 없다. 이때 가방은 얌전하게 어깨에 메거나 드는 것보단 슬그머니 팔로 감싸안아 옆구리에 밀착시킬 것!
테일러드 재킷
무뚝뚝한 테일러드 재킷으로 어른스러운 스쿨걸 룩을 연출해보는 건 어떨까. 이때 이너웨어는 없는 듯 보여야 한다. 뭐니뭐니해도 여자는 쇄골을 드러냈을 때 여성미도 사는 법. 사실 두툼한 살에 덮여 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곳 아닌가? 가뜩이나 남성적인 아이템인 테일러드 재킷에 깃이 꼿꼿이서 있는 셔츠까지 매치했다간 비서실 김대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란제리 느낌의 캐미솔 톱이나 내친 김에 브라톱을 입어도 좋겠다. 그리고 여기엔 이번 시즌 간만에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풀 스커트가 제격.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스커트, 생각만 해도 ‘므흣’ 하다. 이 대목에서 또한 가지 중요한 건 신발. 납작한 걸 신었다간 개화기 신여성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일 테니, 이왕이면 아찔한 하이힐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는지.
- 에디터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 포토그래퍼
- 엄삼철
- 스탭
- 어시스턴트/ 정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