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영 마땅찮은 존재,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욕망의 대상. 이토록 상반된 ‘냉온탕’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레오퍼드 무늬’라 부른다. ‘천박하고, 공격적이고, 나이 들어 보이는 무늬’라는 선입견을 훌쩍 넘어서 ‘세련되고, 관능적이고 때론 귀여운 무늬’로 도약한 레오퍼드. 여자의 옷장을 쥐락펴락하는 이 표범무늬의 아슬아슬한 매력은 올가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수컷에게 제 매력을 드러내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암컷의 본능이자 숙명이라면, 레오퍼드 무늬를 제 몸에 두른다는 건 자연의 질서를 흩트리는 행동일 것이다. 레오퍼드 무늬를 사연 많은 역전 다방 김마담이 즐겨 입는 미니스커트나 대중 목욕탕 한켠에 널어놓은 양배추머리 아주머니의 나일론 홈드레스쯤으로 생각하는 남성이 대다수니 하는 이야기다. 아이폰 4G가 출시되고,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거리를 누비는 시대를 맞이했지만 취향만큼은 아직 아버지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 현실. 그나마 여초현상이 두드러진 곳에서야 레오퍼드 무늬 아이템에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지만 여자 연예인이 표범무늬 옷을 입은 사진이 인터넷 게시판에 뜨면 이에 달리는 악플과 선플로 성별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호오’가 뚜렷하게 갈리는 존재가 바로 레오퍼드 무늬임에는 틀림없다. 일례로 몇 년 전 빈티지 숍에서 호기롭게 사들인 A라인 레오퍼드 코트를 입고 지하철에 탔을 때 쏟아지는 시선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같은 날 동창회에서 만난 (남자인) 친구들로부터 “사냥하다 왔니, 역시넌 여전하구나. (당연히) 남자친구는 없지?” 등 갖은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내내 차라리 이걸 뒤집어 입는 게 낫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패션을 남성에게 어필하려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레오퍼드만큼 매혹적인 무늬가 또 있을까? 남자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된 그 레오퍼드 코트를 두고 멋 좀 낼 줄 아는 언니들은 “어머 예쁘다, 어디서 샀어?”라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고 보면 해가 지날수록 레오퍼드 홀릭을 자처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수요만큼 공급도 자연스레 늘기 마련. 레오퍼드 프린트를 상징으로 삼는 브랜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저가부터 하이패션 브랜드까지, 각 브랜드에서 레오퍼드프린트를 쏟아내는 통에 우리는 선택을 두고 즐거운 고민에 빠지곤 한다. 이 매혹적인 무늬를 탐닉하는 여자들에게 본격적인 레오퍼드 계절을 맞이한 지금은 더없이 좋은 시절이 아닐까?
그런데 레오퍼드라고 다 같은 레오퍼드일까? 자타가 인정하는 레오퍼드 홀릭 인 더블유 패션팀의 에디터 K는 “난 레오퍼드 무늬를 보면 굳이 태그를 보지 않아도 무슨 브랜드인지 알 수 있어. 돌체&가바나, 로베르토 카발리, 블루마린, 이브 생 로랑, 모스키노 등 레오퍼드 무늬를 시그너처로 삼는 브랜드들은 저마다 개성이 있거든.” 이쯤 되면 ‘레오퍼드 감별사’라 불러도 될 수준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레오퍼드라고 해서다 똑같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가만히 보면 브랜드마다 고유의 레오퍼드 무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돌체&가바나의 레오퍼드 무늬는 베이지 톤의 바탕색과 비교적 검정과 브라운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점박이 무늬가 어우러져 있으며, 이브생로랑은 이보다 불규칙적인 무늬에 하얀 바탕색이 눈에 띈다. 또 블루마린은 붓으로 그린 듯 추상적이고 뾰족한 모양의 점박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스키노의 레오퍼드는 투톤이 아닌 짙은 초콜릿 색상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가하면 로베르토 카발리는 모양 자체는 돌체&가바나와 흡사하지만 색상이 옅거나 그윽한 카키빛이 도는 것이 특징. 이처럼 레오퍼드 무늬는 마치 로고처럼 브랜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레오퍼드, 즉 표범무늬라고 믿고 있는 프린트의 정체가 레오퍼드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 레오퍼드로 오인(?)하는 무늬로는 재규어, 치타, 오슬롯 무늬가 있다. 사실 이브 생 로랑 고유의 레오퍼드 프린트는 오슬롯 무늬에서 출발했다. 아프리칸 무드에 매료된 무슈 이브 생 로랑은 1964년 컬렉션부터 남아메리카의 고양잇과 동물인 오슬롯의 무늬를 사용해온 것. 이후 조금씩 변형을 거쳐 지금의 레오퍼드 무늬로 자연스레 진화했다. 한편 브랜드 안에 ‘애니멀리어’라는 레오퍼드 프린트 라인을 별도로 전개하고 레오퍼드 프린트를 브랜드의 아이콘으로 삼는 돌체&가바나 듀오는 퍼스트 라인에선 전형적인 레오퍼드 프린트를, 세컨드 라벨인 D&G에서는 치타 무늬를 사용한다. 블루마린의 무늬 역시 치타에 가까우며, 블루걸의 레오퍼드는 엄밀히말해 스노우 레오퍼드 종에 속한다.
전 세계 여자들에게 레오퍼드 신드롬을 일으킨 돌체&가바나는 “레오퍼드 프린트는 여자가 자신의 신성성을 깨닫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라며 레오퍼드 무늬의 영험함을 역설한다. 이 듀오의 말처럼 레오퍼드 프린트는 길들여지지 않는 여성미를 발산하는 도구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자칫 천박한 이미지로 전락할 수 있는, 치명적인 단점이 문제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오직 아이템의 적절한 선정과 스타일링밖에 없다. 우선 레오퍼드 초보자라면 가방, 신발, 스카프, 장갑 등의 액세서리 코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 중에서도 레오퍼드 초보자에게 가장 적합한 아이템은 스카프다. 특히 정사각형의 클래식한100% 새틴 실크 스카프보다는 머플러처럼 긴 직사각형의 시폰이나 면혼방의 실크 스카프가 ‘진리’. 그 활용도는 가히 전천후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킷은 물론 트렌치코트, 바이커 재킷 심지어 티셔츠같은 캐주얼 아이템과도 근사하게 어울린다. 스타일링의 화룡점정이랄까? 액세서리 코스에 익숙해지면 활동 반경을 넓혀서 아우터나 원피스드레스 등의 아이템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액세서리에 비해 고도의 스타일링 전략이 수반되어야 한다. 물론 이번 시즌 구찌, 모스키노 칩&시크, 발맹 등의 컬렉션에서 보이듯 레오퍼드 아이템을 제외하고는 검정 색상 아이템으로 ‘통일’하면 무난하게 ‘합격’할 터.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스타일링에 안주하는 건 재미없지 않나. 마침 레오퍼드 무늬 연구에 박차를 가한 디자이너들은 이번 시즌에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색다른 레오퍼드 무늬의 스타일링 레슨을 런웨이에서 진행했다. 먼저 레오퍼드 프린트 톱에 도트 무늬 스커트를 매치하는 프린트 믹스 스타일링을 선보인 돌체&가바나와 블라우스와 점프수트에 다른 농도의 레오퍼드 프린트를 매치한 로베르토 카발리의 룩을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혹은 돌체&가바나의 프리폴 컬렉션처럼 전형적인 색상의 레오퍼드 프린트가 아닌 빨강, 보라, 노랑, 파랑 등의 무지개 색상을 덧입힌 아이템도 레오퍼드를 색다르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이번 시즌 가장 두드러진 레오퍼드 스타일링은 따로 있다. 드리스반 노튼과 저스트 카발리 컬렉션이 그 예다. 먼저 저스트 카발리는 카키빛이 도는 레오퍼드 아이템과 강렬한 원색을 더한 레오퍼드 아이템을 매치해 무늬의 완급 조절을 꾀했다. 같은 프린트의 아이템이 한 룩에 공존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색상의 변화로 막은 것. 이러한 레오퍼드 프린트의 믹스 매치는 이번 시즌 가장 눈에 띄는 레오퍼드 룩을 선보인 드리스 반 노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레오퍼드 프린트의 퍼 머플러에 보다 밝은 색상의 레오퍼드 블라우스를 매치한 것. 여기에하의는 베이식한 단색의 스커트를 선택, 자칫 카오스 상태에 빠질 수 있는 룩을 세련되게 마무리했다. 이뿐만 아니라 드리스 반 노튼 컬렉션은 레오퍼드 프린트 아우터에 네온 그린 색상의 하의를 매치‘, 레오퍼드에는 무조건 검은색’이라는 편견을 넘어서면서도 세련되고 안정된룩을 연출했다.
정작 아프리카 평원을 질주하는 이 커다란 고양잇과 맹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무늬에 인간들이 이토록 열광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지구상의 수많은 동물 중에서도 유독 ‘그’무늬에 매혹되었고, 덕분에 이 아프리카에서 온 원초적인 무늬를 지닌 동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프린트의 왕좌’를 차지했다. 남자들의 삐딱한시선 따위는 쿨하게 무시한 채, 자신의 패션 주관을 관철한 이 시대 여자들이 일궈낸 아름다운 쾌거!
- 에디터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 포토그래퍼
- 김범경
- 스탭
- 어시스턴트 / 정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