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 분야에서 일 년 중 가장 중요하고도 성대한 주간. 4월 열린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생생한 참관기가 여기 있다.
드디어 열렸다. 한 해 중 디자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손꼽히는 빅 이벤트, 매해 초여름 열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다. 이 귀한 행사가 막을 올리면 로피에라 박람회장에선 ‘살로네 델 모빌레(가구박람회)’가 개최되는 동시에, 밀라노 전역에선 무려 1,000개의 크고 작은 행사가 ‘푸오리살로네(장외 전시)’ 형태로 열린다. 이르게는 2월 말부터 가구 및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들의 전시와 프레젠테이션 초대가 서서히 밀려들고, 그중 꼭 가봐야 할 곳만 추려도 엑셀 일정표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이브닝 파티까지 빼곡히 채워진다. 한편 이 시기엔 카시나, 폴트로나프라우, B&B, 몰테니, 카르텔 등 이탈리아 가구 산업의 근간인 가구 브랜드들이 그들의 최신 미학과 기술을 집약한 신제품을 대거 발표하는데, 올해는 유독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 흐름이 목격되어 신선함을 안겼다. 1970년대를 풍미한 광택이 정교한 아르데코 장인 정신에서 힌트를 얻은 다양한 신제품이 탄생했는데, 주로 래커와 강철과 같은 소재에 집중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몰테니의 ‘123체어’, 미노티의 ‘슈퍼문’ 등이 대표적인 예.
그런가 하면 밀라노 기반의 건축 디자인 팀 디모레 스튜디오 (Dimore Studio)를 이끄는 두 디자이너 에밀리아노 살치(Emiliano Salci)와 브릿 모란(Britt Moran)은 새로운 가구 라인인 ‘인테르니 베노스타(Interni Venosta)’를 론칭하기도 했다. 현대와 아방가르드가 융합된 과거 이탈리아의 우아함, 바우하우스의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와 헤리트 리트벨트(Gerrit Rietveld)의 이념을 지지하는 단순하고 정직하며 간결한 컬렉션으로, 짙은 옛 향수를 일으키며 크게 호평을 얻었다. 4월 셋째 주에 진행된 올해의 밀라노 디자인 위크, 가장 근사하고 독창적이며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이벤트들을 추려보았다.
전통과 혁신을 꿰어 만드는 미래
온종일 걷고 또 걸어야 하기에 가장 편한 스니커즈를 골라 신고 태세를 갖춘 후 스타트를 끊을 목적지, 로사나 오를란디 갤러리로 출발했다.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대모 로사나 오를란디(Rossana Orlandi) 여사가 운영하는 이곳은 2002년 버려진 공장을 개조해 디자인 전문 갤러리로 오픈한 이래 수많은 스타 디자이너를 배출한 명성 높은 곳이다. 여사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특유의 커다란 화이트 프레임 선글라스를 끼고 프리뷰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기성 아티스트와 떠오르는 재능이 혼재된, 국적도 다양한 80명이 넘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의 작품이 전시된 이곳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한국’이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한 한국 공예전 <사유의 두께(Thoughts on Thickness)>로, 올해 예술감독은 윤현상재 대표이자 스페이스비이 갤러리 디렉터 최주연이 맡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박강용 옻칠장과 옻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는 유남권, 허명욱 작가를 비롯해 한국 공예가 및 브랜드 총 25팀이 참가해 총 630여 점의 공예품을 소개했다. 예술·공예 이론가 글렌 애덤슨(Glenn Adamson)이 이야기한 ‘Material Intelligence’를 근거로 물성에 담긴 인문학적, 철학적 의미를 조망하는 세 파트의 전시는 단지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동시대의 매력적인 기물로서 가치를 지닌 한국 공예의 인문학적, 철학적 의미를 보여주었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시도는 늘 있어왔지만 올해는 유독 다른 전시장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감지되었다. 우선 일본의 타일 제조업체인 단토(Danto)는 수 세기에 걸친 타일 전통과 현대적 디자인 감성을 융합한 제품을 선보였다. 디자이너 인디아 마다비(India Mahdavi) 와 테루히로 야나기하라(Teruhiro Yanagihara) 스튜디오가 만든 컬렉션은 고대 공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편 <월페이퍼> 매거진은 트리엔날레 밀라노에서 미국활엽수수출협회(AHEC)와 함께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전시 를 열었다. 가장 오래된 전통 소재인 ‘나무’를 활용해 동시대 신진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가운데, 특히 가나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길스 테티 나르테이(Giles Tettey Nartey)의 신작이 주목을 받았다. 서아프리카 지역민의 주식인 ‘푸푸’를 준비하기 위해 디자인한 공동 테이블 ‘커뮤니온(Communion)’이 그것. 문화적 상징성과 기능적 우아함이 결합된 디자인을 통해 ‘혁신’과 ‘장인 정신’은 창의성과 디자인의 두 초석이며, 하나는 다른 하나를 강화하고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발견이 아닌 경험으로서의 디자인
해마다 장소를 달리하며 화제의 전시를 개최하는 디자인 플랫폼 ‘알코바(Alcova)’. 지난해 버려진 도축장에 이어 올해는 밀라노가 자랑하는 건축적 랜드마크인 ‘빌라 보르사니’와 ‘빌라 바가티 발세치’를 전시 장소로 낙점했다. 건축가이자 테크노(Tecno) 가구 창립자인 오스발도 보르사니(Osvaldo Borsani)가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건축한 빌라 보르사니는 밀라노 최고의 현대식 주택 중 하나로 일컬어지며, 마찬가지로 빌라 바가티 발세치는 19세기의 부유한 가문
의 여름 저택으로 쓰이던 곳이다.
올해 알코바의 전시 중 가장 돋보였던 건 바가티 저택 정원의 아날로그식 냉동고에서 펼쳐진 건축가 준야 이시가미(Junya Ishigami) 의 새로운 가구 컬렉션이었다. 2019년 서펜타인 갤러리를 디자인하기도 한 이시가미는 도쿄의 어머니 집에서 쓸 가구를 만들었는데, 가죽, 등나무, 목재, 유리, 강철 등의 소재를 활용해 만든 가볍고 날렵하면서도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의자, 테이블, 칸막이, 램프 등이 오래된 저택의 야외 냉동고와 어우러졌다. 독일 디자이너 파비안 프라이타크(Fabian Freytag)는 독일의 욕실 전문 브랜드 발로네 (Vallone)와 함께 세면대, 수도꼭지, 거울, 램프로 구성된 욕실 유닛 ‘티오레(Tiore)’를 빌라 보르사니에서 선보였는데, 마치 연극무대처럼 천막을 드리운 채 욕실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오래된 책들과 함께 서정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전시를 진행하며 시선을 모았다.
이 외에도 제재소에서 나온 목재 폐기물을 활용해 만든 조명, 의자 등을 선보인 에코니트우드(EconitWood), 금속 소재 주방용품을 소개한 콜롬비아 디자이너 나탈리아 크리아도(Natalia Criado), 알루미늄으로 전체 컬렉션을 완성한 수파폼(Supaform) 등이 전시를 수놓았다. 모더니즘의 정수로 여겨지는 빌라와 이탈리아의 낭만적 저택 내부에 자리 잡은 디자인 전시를 둘러보며, 온라인 플랫폼에선 충족될 수 없는 ‘경험의 가치’, 디자인은 단순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새삼 확인했다.
새로운 빛, 새로운 세계
환상적인 빛은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선 갈수록 진화하는 조명 디자인 및 기술의 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조명 전문 브랜드 플로스(Flos)는 18세기 궁전 ‘팔라초 비스콘티’에서 특별한 설치를 선보였다. 미카엘 아나스타시아데스(Michael Anastassiades)가 디자인한 IC 컬렉션의 새 에디션과 바버&오스거비(Barber & Osgerby)의 벨보이 램프 등이 호화로운 바로크 양식의 궁전 내부를 감싼 유리 패널 속에서 환상적으로 빛났다. 디자인적 접근 방식과 아트 리서치를 조명 작업에 접목하는 밀라노 기반의 스튜디오 조파토&콤베스(Giopato & Coombes)는 두 곳에서 전시를 펼치는 활약을 했다. 알코바의 전시 공간 중 하나인 빌라 보르사니에서 기하학적 구성이 돋보이는 샹들리에 ‘Flamingo’를, 자신들의 쇼룸에서는 베니스의 아스라한 아침 안개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 ‘Bruma’를 발표했다. 체코 유리 생산업체인 프레시오사(Preciosa)는 픽셀 기하학에서 영감을 얻어 완전히 맞춤화 가능한 조명 ‘크리스털 픽셀’을 선보였다. 초기 픽셀 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만큼 복고풍의 1980년대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RGBW LED 색상으로 빛나는 400개 펜던트가 음악에 맞춰 빛을 발하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패션 하우스의 DNA를 공유하는 라이프스타일
패션 하우스의 라이프스타일 전시는 이제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디자인 전시를 둘러보다 보면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의 DNA가 새겨져 있음을 자주 깨닫게 된다. 선두주자는 역시 에르메스다. 이들은 ‘대지(Ground, The Earth)’라는 테마에 맞춰 ‘소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전시장 바닥 전체에 벽돌, 석재, 슬레이트, 목재, 압착한 흙 등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를 깔아놓았다. 실내 바닥 설치물로 전시된 이 소재들은 에르메스 말기수의 실크 저지 패턴에서 따온 형태로 구성되기도 했다. 에르메스 홈의 새로운 컬렉션과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담은 클래식한 기존 제품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근원의 소재 그리고 인간의 장인 정신을 담는 지구적 전시란 규모가 아닌 철학에 있음을 보여
준 전시로 남았다. 로로피아나는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치니 보에리(Cini Boeri)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를 펼쳤다. “당신이 누워 있을 때 생각은 더 깊고 풍부해지죠.” 시대를 앞서간 여성 건축가 치니 보에리, 생전 그녀가 가구를 디자인하며 남긴 명언들과 함께 1979년에 황금콤파스(Compasso d’Oro) 상을 수상한 모듈식 스트립스 시스템, 스트립스 침대, 소파 및 암체어 등이 로로피아나 인테리어 패브릭으로 장식되었다. 특히 보톨로 체어는 캐시미어와 실크를 결합한 소재 캐시퍼(Cashfur)로 재해석되어 100개 한정 스페셜 컬러 시리즈로 선보였다.
공예의 가치를 강조해온 로에베는 유명 아티스트 24명에게 의뢰해 제작한 램프 컬렉션을 공개했다. 빛의 특성을 탐구하고 대나무, 종이, 유리와 같은 재료를 활용해 만든 조명들. 그중에는 전통 종이를 다루는 지승공예가 이영순, 말총을 다루는 정다혜 작가 작품도 있다.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도입하는 동시에 여러 세대의 디자인 및 공예 지식을 확장하여 경계를 넓히는 예술 작품 같은 조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대한 건축가의 유산은 언제나 동시대에 살아 있는 영감이 된다. 르코르뷔지에와 조 폰티 두 명의 건축가를 기린 전시도 패션 하우스의 진두지휘 아래 펼쳐졌다. 보테가 베네타는 카시나, 르 코르뷔지에 재단과 협력해 ‘LC14 타부레 카바농 테이블’ 디자인을 회고한 대규모 설치 작품 ‘On the Rocks’을 선보였다. 일본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그을린 목재와 브랜드 시그너처인 인트레치아토 우븐 가죽 기법으로 마감해 제작한 스툴로 구성했다.
생 로랑은 산 심플리차노의 중정에 위대한 조 폰티의 역사적인 모더니스트 건축물에 경의를 표하는 파빌리온을 지었다. 조 폰티의 팔레트를 연상시키는 흰색 기둥과 기하학 패턴으로 이뤄진 이 전시에서 1957년 그가 어느 컬렉터 부부의 베네수엘라 빌라를 위해 처음 구상한 맞춤형 식기 컬렉션을 전시했다. 태양, 초승달, 북극성 그리고 부부의 이름에서 딴 문자 ‘A’가 새겨진 진귀한 오리지널 피스를 만날 수 있었다. 생 로랑은 오리지널 컬렉션에서 손으로 그린 도자기 접시 12
개를 새로 제작해 밀라노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판매했다.
- 프리랜서 에디터
- 강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