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조명하는 아티스트, 아서 제이파(Arthur Jafa)가 시인 시몬 화이트(Simone White)와 뜻깊은 대담을 나눴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를 둘러싼 이야기부터 그를 향한 미술관들의 관심에 대한 솔직한 반응까지, 거침없는 입담이 펼쳐졌다.
아서 제이파(ArthurJafa)는 예술계에 깊고 넓은 반향을 일으킨 아티스트로 각인되기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는 영화 제작자이자 촬영 감독이었다. 1990년대엔 아내 줄리 대시와 함께 제작한 영화 <먼지의 딸들>과 스파이크 리 감독이 연출한 <브루클린의 아이들>을 촬영했고,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인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에도 참여했다. 영화 뿐만이 아니다. 2010년대 들어 그는 비욘세의 동생인 솔란지 놀스의 ‘돈 터치 마이 헤어’와 ‘크레인스 인더 스카이’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맡기도 했다. 제이지의 인상적인 작품인 ‘4:44’ 뮤직비디오 공동 연출, 인권 운동가였던 말콤 X와 오드리 로드를 포함한 여러 흑인 인권 관련 다큐멘터리 촬영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차곡차곡 모은 수백 개의 소장품은 해머 뮤지엄이 2년에 한 번씩 여는 전시인 <메이드 인 L.A>에서 빛을 발했다. 그가 참여해 소장품을 공개한 2016년, 덕분에 관객들은 지난 세기 역사나 팝 컬처와 관련한 이미지를 풍성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전시가 있기 몇 년 전에는 지식인에 속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인터뷰한 것과 함께 자신이 촬영한 우주, 파도, 밤거리 풍경, 그리고 아티스트 카라 워커의 페이퍼 커팅 아트워크 등을 병치한 영상 에세이, <꿈은 죽음보다 차갑다(Dreams Are Colder Than Death)>를 발표했다.
‘아카이빙’을 향한 아서 제이파의 욕구는 <사랑이 핵심이다, 핵심은 죽음이다(Love Is The Message, The Message Is Death)>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뉴욕 할렘가에 자리한 개빈 브라운스 엔터프라이즈 갤러리에서 발표했는데, 전시 시점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사랑이 핵심이다, 핵심은 죽음이다>는 제이파가 다양한 장면을 조각처럼 이어 붙여 리드미컬하게 완성한 7분 30초짜리 영상이다. 거기엔 여러 뉴스 장면을 비롯해 경찰의 보디 카메라에 찍힌 풍경, 시민권을 요구하며 행진하는 인파의 모습, 농구 경기와 카니예 웨스트의 콘서트 장면 등등이 흐른다. 단 7분 30초로 제이파는 흑인성과 미국에 만연한 인종차별의 초상을 다면적으로 조명하고, 그 속에 내재된 잔인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2020년 6월, 흑인 증오 범죄로 허망하게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시위가 전 세계 곳곳에서 들끓었던 때는 뮤지엄 열세 곳이 웹사이트에서 아서 제이파의 작품을 48시간 동안 스트리밍했다. <뉴욕 타임스>는 제이파의 영상 작업을 두고 디지털 시대의 ‘게르니카’라고 불렀다. <사랑이 핵심이다, 핵심은 죽음이다> 이후 제이파의 작품은 조각, 설치 미술, 회화, 심지어 벽지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어떤 작업이든 그 속에는 다양한 장면을 능숙하게 조작하고 재문맥화하는 그의 독보적인 능력이 자리한다.
2019년, 제이파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30분짜리 영상 <더 화이트 앨범> 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직접 촬영한 갤러리스트 및 친구들의 친근한 모습을 한데 엮고,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초현실적인 모습의 록스타 이기 팝과 인종차별 혐의에 항의하는 젊은 백인 여성, 가교 아래에서 춤추는 사이버 고스들, 성경 공부 중인 성도 아홉 명을 살해한 범죄자가 ‘임마누엘 아프리칸 감리교 교회’를 드나드는 장면 등을 담았다. 그의 영상 작업에는 그가 어린 시절에 즐겨 듣던 음악이 자주 등장한다. 1960년 미시시피주 투펄로, 흑인과 백인을 구분 짓는 문화가 유독 강한 지역에서 중산층 교육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제이파. 그의 작업에 자주 쓰이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 소리는 늘어지거나 왜곡되면서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연출한다.
지금 아서 제이파의 두 개인전이 뉴욕에서 열리고 있다.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의 ‘세컨드 스페이스’ 격인 52 워커(Walker)에서는 4월 5일부터 6월 2일까지 멀티미디어 전시가 열린다.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는 4월 4일부터 한 달간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재구성한 영상 작업이 공개된다. 제이파 버전으로 새로 태어난 <택시 드라이버>는 격렬한 토론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영화에 스며 있는 인종차별적 면모를 알아채고, 영화와 달리 오히려 흑인이 살해당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현실 감각을 드러낸다. 전시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 아서 제이파와 시몬 화이트(Simone White)가 만났다.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흑인 여성, 시몬 화이트는 아서 제이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관점을 날것 그대로 녹여내는 작품을 쓴다. 화이트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물을 때마다 제이파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Simone White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의 또 다른 전시 공간인 52 워커에서 4월부터 선보이는 전시는 어떤
내용인가?
Arthur Jafa 전시 제목은 <블랙 파워 툴 앤 다이 트라이 니그(Black Power Tool and Die Trynig)>’다. 참고로 ‘Trynig’는 오타가 아니다. 이 전시는 미로 같은 하나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관람객들이 그 전시장을 걸어 다니는 모습은, 책이나 영화가 만들어질 때처럼 이미지를 배열하고 표현 요소를 구성하는 방식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의 개별적인 특수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일종의 게슈탈트 효과를 내듯 어떤 식으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궁금하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비치스 브루(Bitches Brew)>라는 앨범 커버 이미지처럼 말이다. 그러한 불협화음이 빚어내는 예술성이 흥미롭다.
당신이 짓는 제목에는 ‘Die’와 ‘Death’라는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
내가 자주 생각하는 것들이라 그런 것 같다. 누가 이번 전시 제목을 듣더니 웃으면서 “한동안 ‘죽음’이 제목에 왜 안 들어가나 했다!” 하더라(웃음). 내 첫 번째 다큐멘터리 제목이 1960년대에 나온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를 응용한 <꿈은 죽음보다 차갑다>였다.
이후에는 알다시피 <사랑이 핵심이다, 핵심은 죽음이다>를 발표했다. 내가 쓴 에세이 제목도 <나의 검은 죽음>이다. 요즘 사람들은 ‘흑인으로 사는 것의 불안정성’ 같은 멋진 표현을 선호하던데,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자신이 그 불안 정성을 소비하거나 흡수해버린다면, 혹은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가정하는 기계가 되어버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제목은 중요하다. 어떤 제목에 담긴 암호를 풀어내야 그 속에 담긴 보물을 완벽하게 펼쳐볼 수 있다.
당신 작업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은 단순히 블랙 트라우마에서 비롯되는 고통만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이 일상의 희극적 요소들과 공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시인이자 학자인 프레드 모튼과 얘기한 적이 있다. 프레드는 트라우마, 죽음, 공포가 흑인성을 진화시키고 부상하게 한 근본은 맞지만, 흑인성 자체가 오로지 공포의 산물은 아니라고 말했다. 내 경우 아직까진 그 생각에 반대한다. 노예가 되어 미 대륙에 끌려온 아프리카 사람들을 놓고 생각해보자면, 공포 없이 흑인들을 이야기할 방법은 없다고 본다.
만약 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있잖아, 너희들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기면 흑인에게 일어난 모든 끔찍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줄게.’ 그렇게 우리가 곧장 손가락을 튕긴다면, 우리의 존재도 지워질 것이다. 흑인을 그려내는 방정식에 공포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매우 역설적인 부분이 있는 이야기다. 그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우리(흑인)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적 구조를 초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어떤 요소를 지우고 있기도 하다’라는 취지였다. 흑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요구하고 교육했던 사회 환경들 사이에 균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인간성을 유지하고, 주장하고, 강화할 수 있었다. 그 점이 ‘흑인’과 ‘아프리카 사람’을 구별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공개하는 영상 작업, ‘*****’를 둘러싼 이야기도 듣고 싶다. 암호 같은 제목을 가진 그 작품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클라이 맥스 장면을 수정해 구성한, 73분짜리 영상이다.
<택시 드라이버>는 나를 완벽하게 매료시킨 영화다.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가 인종차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뭐랄까, 그 이야기의 민낯을 드러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택시 기사인 로버트 드니로가 어린 매춘부인 조디 포스터를 구하러 가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어린 매춘부를 포로로 잡고 있는 사람들은 백인으로 나온다. 사실 폴 슈레이더가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선 그들 모두 흑인이었다. 누군가가 감독에게 ‘이렇게 나가면 안 될 것 같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흑인 관객들이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영화를 잘 보면 숨겨지지 않는 어떤 태도를 느낄 수 있다. 포주를 흑인에서 백인으로 바꿔놓는다고 해서 영화의 논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특히 흑인 성과 흑인 남성에 대한 시선은 더더욱 그렇다. 하비 케이틀 이 포주 역할을 맡게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농담 같은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영화 초반에 하비 케이틀의 역할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 나온다. 두 명의 흑인 포주가 식당에 있는 장면. 그들이 사실 배우 가 아니라, 촬영지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던 진짜 포주들이었다는 점에서 거대한 현실성이 더해진다. 나는 그 둘을 제작진이 의도했던 역할로 어떻게 대입시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흑인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만든 내 발상은 물론 다소 뒤틀려 있긴 하지만, 나에겐 차라리 그 점이 민낯과 관련한 문제였다. <택시 드라이버>는 로버트 드니로의 내면에 집중한지라, 내가 로버트 드니로는 놔두고 흑인 포주들의 내면을 열어젖히는 작업을 한 거다.
<택시 드라이버>의 하비 케이틀이 잔인하게 죽는 장면을 수정하는 작업이 당신에게 무엇을 일깨워주었나?
일깨운다는 표현을 사용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 흔히 어떤 이들은 흑인 예술가, 특히 섬세한 의식과 태도를 가진 흑인 예술가가 세상을 고양시키는 일을 해줄 거라고 어림 짐작한다. 나는 사람들을 깨우치거나 북돋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더테이커의 역할을 맡아 아래로 끌고 내려가면 내려갔지. 땅 아래 묻혀 있는 이들, 어둠과 그림자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런 특성은 선택의 문제다. ‘나는 난봉꾼이다’라고 말해도 사람들이 그런 소리에는 귀 기울이질 않더라. 그렇다고 내가 원칙적인 인간형과 거리가 있다는 뜻은 아닌데, 물론 도덕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뭔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지닌 의미와 그러한 선택이 가져오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살아가는 데 관심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받아 적는 부류에게는 흥미가 없고. 흑인을 사랑하지만, 그런 흑인에게 관심이 안 생기긴 마찬가지다. 예전에 페이스 아이스콜드(Faith Icecold)라는 아티스트와 대화한 적이 있는데, 당신이 그 내용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읽었다.
내가 신자유주의자이자 반 흑인 정서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긴 하다. 내가 흑인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은 이례적이고, 거기에 직설적인 측면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를 보고 누군가는 꼭 흑인들이 죽는 방향으로 <택시 드라이버> 를 굳이 다시 만들어야 했는지, 나의 그 충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현실성을 유지하는 데 주목하는 거다. 역사적으로 흑인들의 슈퍼 파워는 현실 감각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내가 본 <택시 드라이버>라는 영화는 흑인을 현실과 다르게 영웅화한, 일명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장르에 대한 응답이다. 1970년대엔 흑인의 남성성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각인시킨 영화들이 쓰나미처럼 줄줄이 등장했다. <택시 드라이버>는 그 현상을 파괴까지 하진 않더라도 거부하는 시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영화에 느끼는 감동이나 매력이 줄어들진 않았다.
단테는 인생의 중반에 덧없음을 느꼈다고 했는데, 당신은 인생의 중반에 성공을 얻게 된 듯하다.
중반이라니?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인생 끝자락에나 찾아온 것 같구만.
적어도 105세까지는 팔팔하게 지내실 것처럼 보이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미술관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어떤 작용을 한다고 보는가? 예를 들어 한 미술관이 당신에게 주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면에 있는 예술적 충동을 어떻게 관리하나?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작업에 영향을 끼칠 듯한데.
그렇다. 나는 오랫동안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법에 매달렸다. 개념화에 많은 시간을 썼다고 해야 할까. 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머릿속에서 해결이 되면 실제로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아이디어 떠올리기를 즐긴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동시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도전 과제였다.
언젠가 갤러리스트인 개빈 브라운에게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나를 실패작으로 여기는데, 그 이유는 인생의 대부분을 실패하면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썼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어릴 적 내게 성공이란 마이클 잭슨이나 프린스 같은 인물의 것이었다. 나는 소위 ‘쩌는’ 책과 영화, 만화, 예술을 소비하는 입장이었고. 내가 제작자(프로듀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들과 자주 대화를 하는데, 종종 ‘이번 작업이 만만치 않다’고 털어놓는다. 그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무언가를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일이 어찌어찌 풀려서 여기까지 온 느낌이다. 가끔은 내가 사기꾼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뭐라고! 당신이 작품을 전개하는 방식을 보며 나는 사유할 기회를 정말 많이 가졌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비하면 이젠 사기를 치기도 힘든 시대이긴 하다. 그런데 19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특유의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부터 몸 안에 품고 태어난 것 같은 무언가. 나는 그때 그저 아기였지! 내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제임스 브라운 공연을 보러 가셨다. 그 경험이 어땠는지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열광적인 에너지만큼은 기억한다. 그 기억 때문에 내가 결국엔 늘 음악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내 작품이 마일스 데이비스나 지미 헨드릭스만큼의 기능을 하면 좋겠는데,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15년 전에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답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그런 놀라운 반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 됐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상상해보는 일은 즐겁다.
- 포토그래퍼
- TYLER MITCHELL
- 글쓴이
- ANDREA WHIT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