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작가들이 친구에게, 또 연인에게 보냈던 편지
‘편지는 지상의 기쁨.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절이 알려주듯, 예술가들은 손으로 직접쓰 거나
타자기로 두드린 그 물성 있는 기쁨을 남기고 떠났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작가들이 친구에게, 또 연인에게 보냈던 편지를 통해 그들의 내면과 아픔과 사소한 일상을 엿본다.
1. 친구에게
From. 프랑수아즈 사강 To. 베로니크 캉피옹
너는 꼭 나를 보러 와야 해. 나는 흠잡을 데 없는 집에서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 실성한 듯한 웃음과 캉피옹 8번의 세련된 재치가 그리울 뿐이야. 요즘 왜 안 오는 거야? ‘기’는 내일 와서 사흘 있을 거야. 비가 제법 내려서 불을 넉넉하게 지폈어. 넌, 넌 뭘 하고 있니? 세네샬과 사이가 틀어졌어(걔는 너무 많이 마시고 모든 게, 심지어 나 같은 여자들도 쉽다고 생각하거든). 난 완전 빈털터리야. 네가 보고 싶어. 사랑해. 우정을 보내며.
추신 : 알랭 들롱에 대해 쓴 기사 훌륭했어?
_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김계영 옮김, 레모)
만 스무 살이 되기 전 발표한 소설 <슬픔이여 안녕>이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에도, 사강은 친구 베로니크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성공에는 관심 없다는 듯, 아니 오히려 유명세에서 벗어나길 염원하는 소녀의 사소한 조잘거림과 자연스러운 수다가 두 사람이 정말 ‘베프’였음을 보여준다. 말년에는 신경쇠약, 정신병원 입원, 마약 복용 혐의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강. 한 친구에게 쓴 편지만을 모은 서간집에 그녀의 풋풋한 스무 살 시절이 고스란히 담겼다.
From. 다자이 오사무 To. 곤 칸이치
1936년 10월 4일, 치바 후나바시
곤 칸이치에게
자네를 칭찬하지 않는 날이 없네. <만년> 출판기념회 이후, 누구도 나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고 만나려고도 하지 않아. 석 달 동안 딱 여덟 통의 편지밖에 오지 않았어. 세 명이 보낸 세 통의 편지, 내게는 진주처럼 소중했다네. 그중 하나가 자네의 이 엽서였어. ‘내가 자네를 돕게 해주게.’ 11월 말까지 빚과 일을 조금씩 정리한 다음, 만 2년 예정으로 결핵요양원 생활을 시작할 거야. 산 위에서 설교하는 차라투스트라 흉내를 내며 또 피를 토했어. 후나바시 생활도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다. 입원하러 떠나는 전날 밤, 아무래도 자살할 듯해. 그날 밤, 조금이라도 왁자지껄하면 좋을 것 같아서, 사토 선생, 이부세 선생을 비롯해 주변의 가까운 분들을 집으로 불러서 하룻밤 차라도 할 생각이야. 너도 그날 밤 부인과 딸 키리코를 데리고 꼭 와줬으면 좋겠어. (중략) 자네를 믿고 존경하네. 내게 남은 단 한 사람, 자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영광일세.
다자이 오사무.
_<다자이 오사무 서한집>(정수윤 옮김, 읻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신의 출신 성분을 혐오하고, 유일무이한 것을 좇으며, 불멸의 것을 추구한 소설가. 혹은 술과 여자, ‘자살’에 취했던 연약하고 위태로운 남자. 이 편지의 수신인인 칸이치는 그의 고향 친구다. 편지를 쓴 후 오사무는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됐고,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와 또 다른 고향 친구가 불륜을 저질렀다. 사실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에서 제일 인상적인 페이지는 마지막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다. 거기엔 ‘서한집 유행’에 대한 오사무의 생각이 보이는 짧은 글이 있다. 그는 작가와 출판사가 창작은 뒤로하고서 ‘오랜 친구에게 쓰는 편지들이 책으로 출판되었을 때의 효과’나 노리는 세태를 불평하는데, 마치 ‘독자 당신들은 대체 이런 세속적인 생활 기록 을 엿봐서 뭐할 거요?’ 하고 묻는 듯하다.
From. 김유정 To. 안회남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인해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며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보던 것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하여 네게 보내줄 테니,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중략)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오. 요즘 나는 가끔 울면서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일뿐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_<원본 김유정 전집>(출판사 강)
글로써 사귄 벗, ‘문우’. 필승은 <동백꽃>, <봄봄> 등을 쓴 김유정이 작가가 되도록 자극을 준 소설가 안회남의 본명이다. 안회남은 월북 작가가 되어 우리 문학사에서는 잊혔지만, 김유정이 죽기 열흘 전에 남긴 이 편지, 일명 ‘필승전’은 유명하다. 이렇게 애통하고 울컥하게 만드는 편지가 또 있을까? 역시 폐병에 걸렸던 이상이 넌지시 동반 자살을 제안했을 때도 김유정은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는다’며 창작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평생의 친구에게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는 편지를 쓴 후, 답장을 받기 전에 눈을 감았다. 소설가 최인호는 문학도 시절 김유정이 쓴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그는 침샘암으로 투병하던 때 연재소설의 마지막 원고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고 싶다’고 쓰기도 했다.
From. 알베르 카뮈 To. 르네 샤르
(전략) 다름 아니라, 저는 파리에 지쳤고, 이곳에서 만나는 깡패 집단에 지쳤습니다. 제가 마음 깊이 품고 있는 욕망은 제 고향 알제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사람의 고향, 잊을 수 없는 투박한 진짜 고향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프랑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지역은 당신의 고향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뤼베롱 기슭, 뤼르 산, 로리스, 루르마랭 등의 지역입니다.
– 지금까지는 문학이 나를 부유하게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페스트>는 돈을 조금 가져다줄 것 같습니다. 그 지역에 집을 한 채 사고 싶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한테 어떤 집이 맞을지 아마 상상하시겠지요. 아주 소박한 집이면 됩니다. 조금은 컸으면 하고요(애가 둘 있는데다 이따금 제 어머니가 오셔서 묵었으면 합니다). 가능하면 외지고, 가구가 갖춰져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락하기보다는 편리했으면 합니다.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앞에 두고 있으면 좋겠어요. (후략)
_<알베르 카뮈와 르네 샤르의 편지>(백선희 옮김, 마음의숲)
소설 <이방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뮈와 프랑스 현대시를 대표하는 르네 샤르는 긴 시간 편지 를 주고받았다. 서간집을 보면 막역하다기보다 서로를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읽힌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정과 존경심이 깊어지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카뮈는 ‘르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내 안에 깃든 빈자리가, 공허가 오직 당신의 글을 읽을 때 채워집니다’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거장들의 문학적 밀담을 지켜보는 게 즐거운 가운데, 이 편지는 당시 소설 <페스트>가 성공했다는 점과 그 시기 카뮈의 심정, 또 집에 관한 카뮈의 취향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From. 에밀리 디킨슨 To. 어바이아 루트
사랑하는 내 친구 어바이아에게. 너의 반가운 편지를 받아 본 지 너무 – 너무 오래되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용서를 구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네 다정한 마음은 내 사과를 거부하지 않을 거라 확신해. 예상치 못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렇게 늦어지게 되었어. 늦은 봄부터 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여름까지 계속 앓았단다. (중략)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여행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셔서, 나는 두 주 전에 보스턴에 왔단다. 마차를 타는 건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었고, 지금은 차분히 정착한 상태야. 도시에서 그런 상태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모님 가족을 뵈러 와 있는데, 행복해. 행복하다고! 내가 말했니? 아니야, 행복하다기보다는 만족스러워. (후략)
너의 사랑하는 친구
에밀리
_<결핍으로 달콤하게>(박서영 옮김, 민음사)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수식만큼이나 ‘은둔자’라는 캐릭터로도 기억되는 에밀리 디킨슨. 서간집은 디킨슨의 시 세계와 배경을 이해하기 좋은 산문 버전의 힌트로 느껴질 정도다. 어바이아 루트는 디킨슨이 친척 집에서 머무른 1년 동안 애머스트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가까워진 친구다. 성인 시기의 편지글과 달리, 이 친구에게 쓸 때만큼은 시시콜콜한 생활이나 집안 사정을 천진하게 늘어놓느라 분량도 꽤 길다. 하지만 어바이아 루트가 결혼을 앞두고 디킨슨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당시 이미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기 시작했던 디킨슨은 그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From. 에곤 실레 To. 안톤 페슈카
1913년 7월 12일, 필라흐
친애하는 안톤 페슈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을 너도 모르는 채, 이렇게나 심각한 세상의 비난에 짓눌려 있는 것은 너무 괴로워.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 게르티마저 모르고 있어. 누군가는 날 보고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하겠지만, 나는 얼마나 더 큰 정신적 고통과 무게를 감내해야 하는 걸까? 늘상 슬픔에 빠져 있던 고귀한 내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의문이야. 아버지가 살았던 곳, 그러니까, 슬픔을 느낄 때 그 아픔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장소에 찾아가는 이유를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나는 모든 존재가 불멸한다고 믿고, 명예 같은 건 겉모습의 단면일 뿐이라고 생각해. 기억들은 내 안에 뒤얽혀 있어. 나는 어째서 무덤을,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많은 것들을 그렸을까? 내 안에서 그것들이 간절히도 살아 있어서겠지. (중략) 돈은 악마야! 나는 빌려준 돈은 돌려받지 않아. 보증금만 제외하면 말이야. (후략)
진실한 인사를 담아,
에곤 실레.
_<자화상>(김선아 문유림 옮김, 알비)
에곤 실레의 그림을 두루 아는 이라면, 동료 화가인 안톤 페슈카의 초상화를 봤을 것 이다. 페슈카는 실레의 유일하고 진정한 친구이자 실레가 아낀 여동생 게르티의 애인이기도 했다. 실레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에 차가웠다고 한다. 실레는 그런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아기와 엄마’라는 작품이나 성모자상 등에서 성스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아닌, 놀란 듯이 눈을 부릅뜬 아기와 어두운 분위기가 묘사된 이유다. 그림이 곁들여진 깔끔한 서간집 <자화상>에는 페슈카 외에도 실레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한 삼촌, 여동생, 그리고 실레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인 어머니 등에게 쓴 편지가 실렸다.
From. 프란츠 카프카 To. 오스카 폴라크
1904년 1월 27일. 오스카 폴라크에게.
(전략) 내 생각에 사람을 물고 찌르는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할 것 같아.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쳐서 우리 정수리를 일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편지에서 썼듯이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도록 하기 위해서? 사실 책 없이도 우리는 행복할 거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책들을 부득이하다면 우리가 직접 쓸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책들이야. 우리가 뭇 인간들을 떠나 숲으로 쫓겨나기라도 할 때처럼, 우리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과도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좋아한 사람의 죽음과도 같이, 자살과도 같이 작용하는 그런 책들 말이야.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 내 생각은 그렇다네.
_<프란츠 카프카 디 에센셜>(홍성광 옮김, 민음사)
카프카는 많은 편지를 남겼다. 고독과 공동체의 경계에 살았던 그는 편지를 통해 열정적으로 연애하고, 또 우정을 나누는 식으로 인간과 ‘접촉’한 듯하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소심하고 외로운 청년으로 자랐다고 알려진 카프카. 그는 고교 동창인 폴라크에 대해 ‘너는 나에게 창문과 같은 존재’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내다본 걸까? 편지들에서 그는 소수의 친구에게 다정할 뿐 아니라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강경하게, 혹은 조곤조곤 털어놓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 카프카의 문학적 동지이자 유언 집행자가 된 이는 또 다른 친구, 막스 브로트다.
From. 조르주 상드 To. 외젠 들라크루아
1843년 11월 4일, 노앙
친애하는 친구여, 정말로 몸이 불편한 거예요? 너무 과로를 했군요. 운동, 노래 등 내가 일러준 건강 요법도 무시한 것이 틀림없어요.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으면 저녁의 찬 공기도 쐬고, 낮에는 비도 맞고 진창 속을 걷기도 하고, 세찬 폭풍우를 만나기도 하면서 몸이 한결 건강해질 텐데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곳으로 와서 나와 함께 늦가을을 보내자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과 내 주변에는 여러 갈래의 밧줄들이 얽혀 있잖아요. 당신이 내 가까이에만 있다면 당신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서 당신을 힘센 장사처럼 튼튼하게 만들 텐데 말이에요. 아마 당신은 쇼팽보다는 내 말을 좀 더 잘 들을 거예요. 쇼팽은 내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여간해서 어두운 그림자가 가시지 않았어요. (후략)
조르주.
_<편지 3>(이재희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가 조르주 상드는 평생 4만여 통의 편지를 썼고, 그중 1만8,000통이 남아 있다고 한다. 리스트, 발자크, 보들레르, 쇼팽, 마르크스 등등 당대 유럽의 지성인들과 교류한 상드의 서간집은 낭만주의로 물든 19세기 인명 백과사전과 같다. 남장 차림을 즐겼으며, 분방하게 사랑을 하여 스캔들의 여왕으로, 또 살롱의 슈퍼스타로 통한 상드. 방대한 서간집을 보면 그녀가 왜 인기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친절함과 다정함을 기본으로 문학, 예술, 사상, 정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주제로든 유려하게 대화가 가능했던 여자. 이 편지에선 예술적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들라크루아의 건강을 세심하게 걱정해준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발표하고 8년이 지나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상드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2. 연인에게
From. 프리다 칼로 To. 디에고 리베라
(전략) 나의 디에고:
밤의 거울.
당신의 눈이 내뿜는 녹색 칼날이 제 살 속에 박힙니다. 우리의 손은 함께 물결칩니다. 당신은 소리로 – 그늘과 빛으로 – 충만한 우주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조색단입니다. 색깔을 흡수하는 남자. 저는 발색단 – 색깔을 제공하는 여자이지요. 당신은 숫자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조합입니다. 삶이죠. 저는 당신이 제게 준 선을, 형태를, 그림자를, 움직임을 이해하고 싶어요. 당신의 말은 온 우주를 떠돌고, 나의 세포, 나의 별들은 그것으로 인해 빛납니다. 당신을 향해. (후략)
_<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안진옥 옮김, Bmk)
1922년 프리다 칼로가 멕시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한 해, 디에고 리베라를 처음 만났다. 낭랑 18세,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에 의구심을 품던 프리다는 당대 멕시코에서 벽화 작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디에고를 찾아가 훗날 그녀의 공식적인 첫 작품으로 알려진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을 펼쳐 보였다. 둘은 급격히 사랑에 빠졌지만, 디에고의 파란만장한 여성 편력 탓에 한 번의 이혼, 두 번의 결혼을 치러야 하기도 했다. 편지는 재혼 후 4년이 지난 1944년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보낸 것. 자신을 색을 방출하는 원자단인 ‘발색단’, 디에고를 색을 흡수하는 원자단인 ‘조색단’이라 표현한 대목에선 둘이 단순한 사랑을 넘어 ‘예술’로 연결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From. 이중섭 To.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
나의 살뜰한 사람
나 혼자만의 기차게 어여쁜 남덕 군
그 뒤 어떻게 지냈소. 어머님을 비롯한 여러분께 안부 전해주시오. 덕분에 무사히 부산으로 돌아왔소. 이번에 도쿄에서 당신과 함께 보낸 6일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버려서 정말 꿈을 꾸고 온 것만 같소. 당신과 하고 싶었던 가지가지 얘기··· 한 가지도 못하고 돌아온 것만 같아서 한이 되오. 당신은 역시 둘도 없는 귀중한 내 보배요. (중략)나는 지금 당신을 얼마나 격렬하게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과 헤어진 이후 날이면 날마다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소. 다음에 가면 남덕의 모든 것을 두 팔에 꽉 껴안고 내 곁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결코 놓지 않을 결심이오. 대향은 모든 정성을 다해서 남덕 군의 모든 것을 굳세게 사랑하고 있소. (후략)
_<이중섭 편지와 그림들(1916-1956)>(박재삼 옮김, 다빈치)
화가 이중섭이 일본인 아내 ‘남덕’을 그리워하며 부친 100편에 가까운 편지화는 세월이 지나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부부로 함께한 세월은 단 7년 남짓. 1952년 전쟁과 생활고로 인해 이중섭은 가족을 도쿄로 떠나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무연고자로 39년의 생을 마감할수밖에 없었던 이중섭. 부두 막노동자로 일하며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 끼” 먹는 궁핍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그는 사흘에 한 번꼴로 잊지 않고 편지를 부쳤다. 서툰 일본어로 썼지만 무엇보다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와도 같은 문장들. 함께할 수 없었기에, 편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포옹하고 싶다’는 표현은 슬프기만 하다.
From. 비타 색빌웨스트 To. 버지니아 울프
1926년 12월 1일 수요일
세븐오크스, 윌드, 롱반
내 사랑, 이거 당신 거야? 어쨌건 이건 내 둥지 안에 있는 어린 뻐꾸기이고,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빌려온 것 같아. 어젯밤 나는 아주 일찍부터 침대에 누워 <댈러웨이 부인>을 읽었어. 아주 이상한 기분이더라. 당신이 방 안에 있는 느낌이었어. 하지만 방에는 내 누비이불 아래로 굴을 파려는 피핀뿐이었지. 밖에서는 밤이, 방 안에서 듣기에 아주 익숙한 소리를 내고, 집은 전부 고요했지. (중략) “버지니아가 토요일에 온다.” 오늘 밤 나는 놀에 저녁을 먹으러 가서 석유 재벌과 그 아내를 만날 거야. 하지만 성운은 내내 나와 함께 있을 거야. “버지니아가 토요일에 온다”는, 막연한 희망. (후략)
_<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박하연 옮김, 큐큐)
두 여성 문인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의 사랑이 20세기 초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둘의 만남은 그들의 소설만큼이나 혁명적이지 않았나 싶다. 두 사람은 1922년 한 파티장에서 조우해 버지니아가 세상을 떠나는 1941년까지 20년간 연인 관계를 이어갔다.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는 출 판사 ‘호가스’를 공동 운영하던 두 사람이 서로의 원고를 채근하는 사이이다가, 어떻게 서로를 격렬히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며, 문인이었던 두 사람이 어떠한 예술적 교류를 나눴는지를 보여준다. 편지에선 버지니아가 고안한 의식 흐름의 기법적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자 1925년 출판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비타가 읽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From. 오귀스트 로댕 To. 카미유 클로델
1886년 10월 12일 오늘부터 나는 오로지 마드무아젤 카미유 클로델만을 나의 제자로 받아들일 것이고, 내게 가능한 모든 수단과 앞으로는 그녀의 친구들이 될 나의 친구들, 특히 영향력 있는 친구들의 힘으로 오로지 그녀만을 보호할 것이다. 그녀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들을 자주 만나게 되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쩌다 경쟁 관계에 놓일지도 모를 인재가 생겨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다른 제자는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다. (중략) 흔들림 없는 관계를 시작하여 이후 마드무아젤 카미유는 나의 아내가 될 것이다. 마드무아젤 카미유가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준다면 나는 그녀에게 대리석 조각상을 선물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후략)
_<카미유 클로델>(김이선 옮김, 마음산책)
1886년, 조각가 로댕은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에게 각서처럼 보이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 로맨틱한 속삭
임 대신 계약 조항과 같은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둘의 파국적인 관계 때문이다. 1883년, 로댕은 ‘지옥의 문’
제작 조수로 젊은 조각가 카미유를 고용하며 그녀와 처음 만났다. 24살의 나이 차를 극복한 사제지간의 사랑. 하지만 당대 둘의 만남은 희대의 스캔들로 불렸는데, 로댕에겐 2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한 동반자 로즈 뵈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댕의 불륜 상대로 낙인찍히고, ‘연인 로댕의 작품을 베꼈다’는 세간의 시선은 탁월한 조각가였던 카미유를 잠식해갔다. 결국 그녀는 1913년 정신병동에 입원해 생을 마감하는 1943년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편지에서 로댕은 아틀리에에 어떤 여자도 들이지 않을 것이고 카미유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서약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From. 로베르 데스노스 To. 유키 데스노스
사랑하는 당신에게,
(전략) 이 편지가 시간 맞춰 당신 생일에 도착하게 될까? 나는 십만 개비 황금빛 담배와 열두 벌의 고급 드레스, 센 강가의 아파트, 자동차 한 대, 콩피에뉴 숲속의 작은 집, 벨 일에 있는 집 그리고 아주 싼 작은 꽃다발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었는데. 내가 없더라도 매일매일 꽃을 사도록 해요. 나중에 돈으로 갚아줄게. 나머지 선물들은 나중에 준다고 약속하지. (중략) 나는 이 편지가 우리 미래의 삶이길 바래. 내 사랑, 편지 검열에 걸리지 않을 만큼 정중하고 부드럽게 당신에게 키스를 보내요. 천 번의 키스를, 콩피에뉴 호텔에서 당신에게 보냈던 상자는 받았어?
1944년 7월 15일 로베르.
_<스물한 편의 연애편지>(조윤경 편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20년대 프랑스 초현실주의 예술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 1928년, 그는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서 매혹적인 여인 유키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빼어난 미모와 예술에 열정을 가졌던 유키는 당대 파리 지식인들 tk이 인기 스타였고, 유키 역시 로베르의 빛나는 지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첫 만남 이후 몇 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지만, 1944년 로베르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정치범으로 체포돼 나치 수용소에 수감되며 생이별하게 된다. 편지는 그가 투옥 중 유키에게 보낸 것으로, 이로부터 1년 후 그는 장티푸스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From. 김환기 To. 김향안
향안에게
나 지금 들어왔어요. 아까까지 먹었던 것이 금방 또 배가 고파요.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니 (이 아이스박스는 아주 조그만데
참 실속이 있어. 우리 이런 거라도 서울서 하나 가졌더라면)핑크빛 포도 한 송이가 남아 있어요. 참, 포도를 보면 포도를 먹으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1963년 11월 13일
_<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정현주 지음, 예경)
※김환기 편지 중에서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없는 김향안, 김향안 없는 김환기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부부를 넘어 서로를 지성으로 성장시킨, 서로가 서로의 러닝메이트이자 솔메이트였던 두 사람. 편지가 쓰인 당시는 예술의 무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던 때, 김환기는 다시금 무명 화가로 불릴지언정 자신의 예술 세계를 넓히고자 과감히 뉴욕행을 택했다. 아내와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며 3년을 보낸 지난 파리 생활은 그에게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탁자 위 놓인 포도를 보며 김환기는 향안에게 적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편지에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위치한 독립기념탑 엽서가 붙어 있다. 편지가 쓰인 1963년, 김환기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며 회화 부문 명예상을 받았다.
From.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To. 콘수엘로 드 생텍쥐페리
툴루즈, 1931년 7월
(중략) 나의 아내, 나의 동반자, 나의 모든 것, 난 당신에게 충실해. 나는 당신을 세계 곳곳으로 데려갈 거고, 우리는 별들을 길들일 거야. 그래야 더운 밤 우리가 테라스에 나갔을 때 온 하늘이 우리에게 감미롭다는 걸 느낄 수 있지. 건강 잘 챙기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줘. 당신의 앙투안. 화요일에 떠났다가, 수요일에 돌아올 거야.
_<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윤진 옮김, 문학동네)
소설가이자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콘수엘로. 미묘한 이중성을 가졌던 두 사람은 1930년 첫눈에 반해 석 달 동안 짧게 동거하고 이듬해 곧장 결혼식을 올렸다. 생텍쥐페리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연서를 부쳤고 사하라, 마르세유, 툴루즈, 알제 등에서 전송된 편지를 받아 든 아내 콘수엘로는 사랑을 담아 성실히 답신을 보냈다. 서간집에는 생텍쥐페리가 비행 중 실종된 1944년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168통의 편지가 수록됐다. 고된 비행에 시달려 글을 멀리하는 남편에게 “책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야. 글을 써, 절대 피하지 말고”라고 독려했던 콘수엘로, 투명하고 반짝이는 단어들로 “나의 아내야, 나의 여름이고 나의 자유야”라고 말했던 생텍쥐페리의 숨겨졌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From. 기욤 아폴리네르 To.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용
놀라워, 나의 루
(중략) 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루, 당신이 보낸 도발적인 키스가 나를 극도로 흥분시켰어 (…) 내가 루의 주인인 된 것을 이제는 알아, 나는 루를 완전히 지배했어. 루는 병들 만큼 흥분해서 (…) 지배자 기욤을 미친 듯 사랑했지. 루는 내가 쾌락을 얻으려 매질하는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어. (…) 그동안 루는 열망과 사랑에 몸을 떨었어. 루는 버릇없는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어. (…) 나는 소년의 해군복 바지를 벗기고 당신의 커다란 장밋빛 엉덩이를 잘 보려고 했어 (…) 한쪽 팔이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당신의 귀엽고 단단하고 부드러운 아랫배를 세게 눌렀어 (…) 다른 쪽 팔로는 아주 아주 세게 때렸지. 당신의 큼직한 엉덩이가 공중으로 치솟도록 (후략)
_<작가의 편지>(황종민 옮김, 미술문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비행사였던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용에게 부친 연서는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편지 중 하나로 꼽힌다. 1914년 당대 전위적인 시풍으로 이름을 날린 아폴리네르는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다 우연히 드 콜리니를 만난다. 그는 첫눈에 드 콜리니의 마법에 빠졌고 바로 다음 날 “당신의 크고 아름다운 암사슴 같은 눈”의 문장을 담은 연서를 그녀에게 부쳤다. 둘의 만남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1915년 3월, 아폴리네르가 프랑스 서부전선으로 배치되며 둘은 헤어졌는데 총알을 피해 숨어든 참호 속에서도 그는 불꽃 같았던 둘의 만남을, 격렬했던 정사를 회상하며 자주 편지를 부쳤다. 아폴리네르는 ‘장미’란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는 언어 유희로 성교를 가리키기도 한다.
From. 오스카 와일드 To. 앨프리드 더글러스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에게
1897년 1~3월, 레딩 감옥에서
보시에게,
오랫동안 헛된 기다림을 이어온 끝에 나는 당신과 나 모두를 위해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2년이라는 긴 시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당신이 내게 안겨준 고통 말고는 당신에게서 단 한 줄의 편지도, 아니 어떤 소식이나 메시지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참으로 한탄스럽고 불운했던 우리의 우정은 내게 공적인 불명예를 안겨주면서
파멸로 끝나고 말았지. 하지만 아직 서로의 애정에 대한 기억이 종종 떠오르는데, 한때 사랑이 차지했던 내 마음속에 증오와 씁쓸함과 경멸이 영원히 자리할 거라는 생각이 나를 무척 슬프게 해. (후략)
_<심연으로부터>(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출신, 묘하게 매력적인 위험한 이미지. 풋풋한 대학생 앨프리드 더글러스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9번이나 읽었다며 오스카 와일드에게 말을 걸었을 때, 당대 스타 작가였던 와일드의 앞날엔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첫 만남과 동시에 연인 사이로 발전한 두 사람의 만남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더글러스의 괴팍한 성격, 병적 집착은 사랑보다 학대에 가까웠고, 퀸스베리 후작은 그런 자신의 아들을 와일드와 떼어놓기 위해 와일드를 향한 공개적인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오스카 와일드는 ‘다른 남성들과 역겨운 외설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편지는 그가 1987년 레딩 감옥 수감 당시 쓴 것. 더글러스는 와일드의 옥중 편지를 모아 잡지사에 기고하고자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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