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웨이와 스트리트를 막론하고 플랫슈즈에 대한 집착은 성별의 경계를 훌쩍 넘어섰다
남성용 발레 플랫은 이번 시즌 가장 화제가 되는 슈즈 트렌드다. 남성용 발레 플랫이 처음 등장한 건2 015년 드리스 반 노튼 컬렉션이었고, 그 이후 패션 화보에 가끔 등장하곤 했다. 그러니까 범용성은 없었다는 얘기. 그 시절 호기롭게 선보인 남성용 발레 플랫이 현실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처럼 SNS가 발달하지 않았고, 현실 감각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런웨이 속 아이템이 현실에 안착하려면 런웨이와 현실의 괴리감을 줄일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 발레 플랫이 8년의 시간을 넘어 2023 S/S 시즌 발렌시아가의 런웨이에 다시 등장했다. 발렌시아가는 영리하게도 런웨이 위에 발레 플랫을 등장시켰을 뿐 아니라 파리 컬렉션 기간에 매장에서 바로 판매하는 ‘전략’을 펼쳤다. 런웨이에 등장한 아이템 몇 가지를 바로 살 수 있도록 매장에 비치했는데, 그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남성용 발레 플랫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는 건 런웨이에서 본 발레 플랫을 구입하러 실제로 파리 생토노레 매장을 찾았고, 그곳에서 거의 모든 사이즈가 동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엄청 큰 사이즈를 제외하고는 모두 품절이라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다음 시즌 맨즈 컬렉션에서 발레 플랫을 신은 ‘남자’를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런웨이에 오른 아이템이 한 시즌도 채 지나지 않아 현실에 나타난 건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편 쇼장에서 본 그 남성과 함께 발레 플랫 사랑에 동참한 이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다. 발렌시아가의 빅 팬이자, 파워 인플루언서인 그의 SNS에는, 그가 발레리노로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나 싶을 정도로 발레 플랫을 신은 사진이 많다. 발렌시아가의 투박한 남성용 발레 플랫은 물론 여성용 로저 비비에 플랫슈즈까지, 온갖 발레 플랫을 섭렵하며 ‘발레 플랫 전도사’로 나선 모습은 생경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그의 영향력 덕분일까, 지금 패션쇼 런웨이와 스트리트 스타일 사진에 이르기까지 발레 플랫에 대한 집착은 성별의 경계를 넘어섰다.
2024 F/W 시즌에는 더 본격적이다. 보데, GCDS, IFM, 디올 옴므까지, 이 요염한 트렌드는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상상해보자면, 2023년 이후 출생자들은 발레 플랫을 여자만 신던 시절을 자료 사진 속에서나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예뻐서일 수도 있지만, 디자이너들의 공통적인 행보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패션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오랜 선입견에 맞서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