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럽 브랜드가 140년 된 패키지를 돈 들여 바꾸자, 열화 같은 반응이 쏟아진 이유!
1883년 1월 1일 우리나라는 고종 20년이었어요. 아직 대한제국은 태어나지도 않았답니다. 인천항이 외국에 개항됐고, 3월 6일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로 지정됐어요. 11월 30일에는 서양식으로 연도를 표시하는 방법이 처음으로 소개됐답니다. 프랑스에서는 럭셔리 브랜드로 유명한 샤넬의 창업자이자 천재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났어요.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의 원흉인 베니토 무솔리니도 태어났네요. 영국에서는 사회주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가 사망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같은 나라에서 달콤한 시럽 패키지도 대중에게 공개됐죠.
갑자기 웬 뜬금포 시럽 패키지 이야기일까 궁금하실 텐데 잠시만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죽고, 사건은 모두 역사책으로 옮겨졌지만 1883년 태어난 이 패키지는 지금도 무려 정정하게 살아있답니다. 140년째 똑같은 모습으로요. 주석으로 만든 틴 케이스에 초록색, 은색, 금색, 검은색으로 단정하게 꾸민 디자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패키지라고 기네스북에서 공인까지 받았어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시럽 브랜드 ‘라일스 골든 시럽’(Lyle’s Golden Syrup)’ 이야기에요. 팬케이크에 찍어 먹고, 부어 먹고, 발라먹느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주방 찬장을 열면 원래부터 있던 것처럼 140년을 굳건히 버틴 존재죠.
고인물 중 최고 등급인 이 패키지가 리뉴얼 후 지금 영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2024년을 맞이해 21세기 고객들과 동시대적으로 만나는 새로운 디자인을 공개했는데요. 140년간 쏟아진 욕보다 아마 더 많은 욕을 먹는 것 같아요. 실시간입니다. 이러다가 불로불사의 꿈을 이루겠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디자인이 구리거든요. 그냥 구린 것도 아니고, 장점은 없고 단점만 남았어요. 아니, 단점을 생산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인지 궁금할 정도인데요. 회사 측에서 계속 대승적인 판단이었다고 말하니까, 사람들의 분노 게이지는 높아만 지고 있어요.
핵심은 사자와 벌꿀, 그리고 문구입니다. 원래 디자인은 제품을 만든 창업자가 성경의 구절에서 감명 받아서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게 특징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삼손은 힘이 장사라서 어린 사자를 맨손으로 때리자 죽어버릴 정도였는데요. 며칠이 지나자 죽은 사자 몸에 꿀벌이 집을 지은 것을 보게 되었어요. 효자 삼손은 벌꿀을 따고 부모님께 드렸죠. 출처는 꺼림칙해서 비밀로 했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식을 치르면서 흥을 내기 위해 손님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습니다. 자, 정답은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창업자는 이 구절에 스르륵 꽂혀버렸어요. 그래서 시럽 브랜드의 슬로건으로 삼습니다. ‘강한 자에게서 달콤함이 나옵니다(Out of the strong came forth sweetness)’ 으아 멋있다, 취한 그는 죽은 사자에서 꿀벌이 빙빙 날아다니는 일러스트레이션도 패키지 중앙에 박았답니다. 근데 이야기가 워낙 초현실적이다 보니 시럽 패키지에 적용해도 내용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어서 늘상 있던 모습 그대로 140년을 ‘존버’했는데요. 이번에 칼퀴 있는 커다란 숫사자 얼굴에 벌꿀 한 마리를 살짝 놓은 이미지로 바꾸고 슬로건을 삭제하니까 영국인들 대다수가 큰 충격을 먹은 거예요.
“내 사자 살려내! 슬로건 살려내!”
원래 사자가 죽어있었든, 사체에 벌이 날아다니든, 그 기이한 이야기는 전통이니까 OK. 슬로건도 다시 봐도 좋으니 OK. 140년 동안 지켜온 거면 그냥 상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억에 남은 역사이자, 공공 예술 작품과도 마찬가지인데, 이 회사가 모든 걸 망치고 있다고 인터넷과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난리가 났어요. 관련 내용을 보도한 기사 댓글마다 성토가 끊이질 않고 우리 사자 살려내라는 말이 넘쳐났죠.(여러분…사실은 처음부터 죽었어요…) 이제는 아예 영국 성공회까지 가세해서, 거룩한 뜻을 담은 문구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아주 좋지 않은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저격했답니다.
디자인과 브랜딩 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이번 리뉴얼은 돈 써서 망하는 케이스가 될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에요. 140년 동안 쌓아온 헤리티지를 한방에 무너뜨리는 건 자해 행위나 마찬가지인 데다, 바꾼 디자인 결과물의 퀄리티가 너무 단조롭고 훌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공예술처럼 잘 보호해도 모자랄 판에, 멀쩡히 서있는 역사적인 랜드마크를 밀어버린 격이죠.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보존했던 디자인을 한 번에 날린 사람부터, 회사에서 빨리 날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에요.
아직 회사 측은 리뉴얼 계획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리지널 디자인은 틴 케이스에 한해서 계속 생산하니까 문제없다는 의견이고요. 근데 대중을 상대하는 소매업체가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면 과연 어떤 일을 겪게 될까요? 기존 사례를 보면 결국 막무가내 리뉴얼의 피해는 모두 브랜드에게 되돌아갔거든요. 이번에는 그 상징성 때문에 대중도 상처를 입고 자기 일처럼 화를 내는 상황이니, 상황은 더욱더 악화될 것 같은데요. 과연 회사의 존버 전략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근데 솔직히, 140년 동안 국민들과 동고동락했으면 그냥 디자인이 아니라 공공예술 아닌가요. 새것이 환영받는 우리나라의 반응은 좀 다르려나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140년 된 패키지를 바꾸고 욕 먹는 회사, 여러분의 생각은?
- 사진
- getty images, Lyle's Golden Syr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