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영혼의 처방전이 될 철학서 8권

전여울

어쩌면 난파된 영혼을 구해줄 철학 신간 여덟 권을 소개한다

플라톤은 철학을 ‘영혼의 약’이라 말했다. 괜스레 생의 불가사의함에 사로잡혔을 때, 문득 거대한 세계에 툭 던져진 존재처럼 느껴질 때, 절대 낡지 않을 처방문으로 가득한 철학서만 한 처방은 없다. 어쩌면 난파된 영혼을 구해줄 철학 신간 여덟 권을 소개한다.

<쇼펜하우어, 행복은 농담이거나 완전무결한 환상>

셀린 벨로크 지음 | 류재화 옮김 | 자음과모음

철학자에게도 ‘MZ스러운’ 별명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최근 서점가의 쇼펜하우어 열풍을 보며 체감하고 있다. 약 200년 전을 산 그는 2024년 한국에서 ‘꼰대 철학자’,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린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극단적인 비관주의를 바탕으로 실존적 인간의 끔찍한 고뇌를 어둡게 그린다. 이를테면 그는 인간을 “본능에 예속된 존재”라 바라봤으며 그에게 인생은 “전체로 보아도, 부분으로 보아도, 계속되는 기만”이다. 플라톤의 말에 따라 철학이 ‘영혼의 약’이라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쓰디쓴 극약 처방인 셈이다. 특히 그는 ‘고독’의 열렬한 찬양자였는데 고독을 통해서만 비로소 “정신적 고요”에 이를 수 있고 “우리의 모든 고통은 사람들 사는 세계로부터” 온다고 바라봤다. SNS 등으로 개인들이 초연결되는 시대에 인간관계에 지친 이들에게 마땅히 그의 철학은 일종의 디톡스로 다가갔을 거다. <쇼펜하우어, 행복은 농담이거나 완전무결한 환상>의 셀린 벨로크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실제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다. 독자가 자신을 직접 진단하고 처방하는 네 단계의 독법 과정을 거쳐 쇼펜하우어의 철학 세계를 보여주고 ‘쇼펜하우어적’ 통찰과 수행을 제안한다. 종종 ‘뼈 때리는’ 처방이 내려질 때도 있지만, 대체로 일단 소매를 걷어붙이게 만드는 실용적 제안으로 가득하다.

처방전 한 줄 “행복은 감각이라기보다는 생각인 것이다.”

<가장 사적인 관계를 위한 다정한 철학책>

이충녕 지음 | 클레이하우스

초합리, 분초 사회 같은 말이 유행인 요즘 사랑만큼 최악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행위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환승연애>, <솔로지옥> 같은 연애 프로그램이 지치지도 않고 시리즈를 이어가는 것은 어쩌면 ‘남’의 연애라서,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해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MBTI가 현대의 점성술이 되면서 알파벳 8글자에 따라 맞춤형 보험, 관광, 투자, 취업 상품이 쏟아졌는데, 여기서 사랑도 단연 빠질 순 없었다. ‘INTJ를 짝사랑한다면?’ 같은 제목에 이끌려 게시물에 들어가 정독하고 나면 마치 명쾌한 해답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초합리의 사회니까 사랑에도 내비게이션이 있을 것만 같고, 그래서 공식과 정답이 있을 거라는 착각. <가장 사적인 관계를 위한 다정한 철학책>의 저자이자 유튜브 채널 ‘충코의 철학’을 운영하는 이충녕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정답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사랑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라고 말한다. 사랑에 ‘확답’을 제시하는 콘텐츠가 검증된 기획 상품인 요즘 시대에 저자는 철학은 물론 심리학, 문학, 예술을 넘나드는 깊이 있는 지적 탐구를 통해 사랑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탐구한다. 어쩌면 <사랑의 기술>, <사랑의 단상>,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잇는 새로운 고전의 탄생이다.’

처방전 한 줄 “오직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랑만이 실제로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솔 지음 | 민음사

‘스크린 타임’이 이미 스크린 밖을 응시하는 시간을 앞질렀을 만큼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매끈한 액정 속에서,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대형 사이니지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이미지는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실시간 목격자로서 이솔은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며 작동하는 ‘이미지’에 관한 철학서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펴냈다. “세계는 우리에게 이미지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저자는 과거 철학자들의 이미지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이미지를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파고든다. 이미지를 실재에 관한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가상으로 간주한 고대 철학부터 이에 맞서 이미지를 불완전한 것이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방식”이라 바라본 사르트르, 이미지는 무언가의 모방이 아닌 “실재를 구성하는 블록”이라 여긴 들뢰즈까지 두루 다루며 이미지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입장을 성실하게 들여다본다.

처방전 한 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미지라는 가상이 아니라, 이미지 배후에 거대하고 공고한 실재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소크라테스>

루이-앙드레 도리옹 지음 | 김유석 옮김 | 소요서가

“당신들 중 누구도 그에 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명심하시오.”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이 말은 루이-앙드레 도리옹이 <소크라테스>로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정확히 포개진다. 철학자들의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알다시피 어떠한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모든 고대 철학이 그러하듯 단지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사후 제자들이 남긴 기록에 기댈 뿐이다. ‘그렇다면 진짜 소크라테스는 누구인가?’ 책은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소크라테스를 둘러싸 서로 교차하고 엇갈리는 증언들의 무덤에서 저자는 네 명의 역사적 증인을 소환한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산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소크라테스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저자는 네 명이 보고하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여러 증언을 소개하는데,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참된 모습을 복원하려고 하기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정확히 재구성될 수 없음에, 소크라테스는 누구에게도 독점될 수 없음에 주목한다. 어쩌면 이 책 <소크라테스>는 그들 각자의 소크라테스를 통해 우리 자신만의 소크라테스를 찾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처방전 한 줄 “좋음에의 열망은 좋음과 관련해 갖게 되는 일종의 결여감 내지는 결핍감으로부터 생겨난다.”

<명상록 수업>

피에르 아도 지음 | 이세진 옮김 | 복복서가

몇 해 전부터 트위터의 창립자 잭 도시를 비롯한 실리콘밸리 기업인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었다. 스토아 철학의 명저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 무려 열여덟 세기 전이니 <명상록>은 시간을 건너 살아남은 기록인 셈이다. 하지만 이천 년의 고대 저작을 현대의 독자가 읽기엔 장애물이 너무 많다. 시대적 간격이 대표적 이유겠지만 그보다 아포리즘이나 짧은 논술이 뚜렷한 상관관계 없이 계속 이어지는 <명상록>은 초심자에겐 수수께끼로만 다가온다. 서양 고대 철학, 특히 스토아주의 정통 연구자로 알려진 피에르 아도는 <명상록>이 “일부 정신적 귀족들의 전유물”로 남는 것에 안타까움을 갖고 이를 정공법으로 이해하되 풍부한 인용과 해설을 더한 친절한 가이드 <명상록 수업>을 쓰기로 했다. <명상록>이 쓰인 2세기 로마 제국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 후, 외부 세계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성체”를 강조했던 스토아적 신념과 근본 삼원 도식을 꼼꼼히 살피고, <명상록> 너머로 바라본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저자의 통찰로 끝을 맺는다. 역사가 르낭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한 복음’인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피에르 아도의 해설을 거치며 영원‘할’ 복음으로 재탄생했다.

처방전 한 줄 “모든 판단, 모든 충동, 모든 욕망 혹은 혐오는 영혼 안에서 생겨나며 바깥에서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의존을 배우다>

에바 페더 키테이 지음 | 김준혁 옮김 | 반비

장애 자녀를 둔 모든 부모는 철학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미 철학자이며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의존을 배우다>의 저자 에바 페더 키테이는 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중증 인지장애를 가진 딸 ‘세샤’의 어머니다. 키테이는 이러한 배경이 자신을 기존 철학의 틀을 허물고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는 “더 겸손한 철학자”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철학은 오랜 시간 “지적 고향”이었지만 정작 사유할 줄 아는 ‘이성’적인 인간을 전제 해온 전통 철학은 인지 능력이 결핍된 그녀의 딸 ‘세샤’의 존엄과 권리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인지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정상성과 좋은 삶, 인격과 존엄성 같은 철학적 개념들을 새로 쓰기로 한다. <의존을 배우다>에서는 ‘일인분의 삶’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세샤’와 같이 의존 속에 존재에 덧씌워진 오명을 벗겨내고 독립을 이상적으로만 그려온 현대 산업사회의 허상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대신 모두가 의존으로 세계를 엮어갈 때, 우리는 그저 생존하는 삶이 아닌 다 함께 피어나는 존엄한 삶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샤’의 초상으로 사유하지만 우리 주변의 세샤‘들’,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다.

처방전 한 줄 “돌봄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나누는 우리의 기량을 인정하고, 기쁨을 향한 인간 능력의 풍부한 다양성을 수용하자.”

<피노키오로 철학하기>

조르조 아감벤 지음 |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은 실은 동화라기보다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 이후 피노키오로 대변되는 ‘신생 이탈리아 시민 모델’을 제시하는 교본에 가까웠다. 나아가 피노키오가 모험을 떠나며 마주하게 되는 요정, 당나귀, 녹색 뱀 등의 등장인물은 켈트 설화, 고대 그리스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 등 신화와 그리스-로마 철학에 기반을 두어 이야기 속 무수한 상징과 은유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생명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렇듯 원작자 콜로디가 남긴 행간의 의미를 철학, 계보학, 언어학, 문헌학을 풍부하게 동원해 새롭게 톺아본다. 특히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꼭두각시 인형이 결코 사람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즉 ‘인간의 조건’이 과연 무엇 인지를 다각도로 살핀다. 어린이 동화로만 여겨진 피노키오 이야기가 실은 인간 존재에 관한 놀라운 함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그는 <피노키오의 모험>이 출간된 지 100여 년을 훌쩍 넘긴 지금,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사뿐히 시대에 올라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시대에 새로이 전한다.

처방전 한 줄 “기준이 들쭉날쭉한 인간과 나무 사이에서 꼭두각시 인형은 어떤 물질도, 사람도, 가면도 아니고,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일 뿐이다.”

<해방하는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 지음, | 오수원 옮김 | 다산북스

‘생각 상실의 시대.’ <해방하는 철학자>의 줄리언 바지니가 지금 시대에 내린 진단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해 철학자들은 늘 자신의 시대가 가장 ‘이성이 실패한’ 시대라고 진단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저자의 진단처럼 ‘도파민 인류’라는 말이 신조어로 나타난 2024년만큼 지적으로 빈곤한 시대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우스갯소리 좀 하자면 도파민 인류는 ‘숏폼 콘텐츠에 중독되지 않는 법’조차 숏폼 영상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니까. 어쩌면 집중력을 ‘도난’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지만 줄리언 바지니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는 ‘사유’만이 혼란한 우리의 삶을 깨울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난 수천 년 동안 ‘사유의 전문가’였던 철학자들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책은 싸구려 지식, 파편적이고 휘발되는 정보에 더는 매몰되는 일 없이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12가지 생각법을 전한다. 그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고대부터 근현대 철학을 유연하게 넘나든다. 또한 1997년 창간한 철학 계간지 <철학자 매거진〉의 발행인으로서 지난 20년간 동시대 철학자 58인을 인터뷰한 내용까지 담았다. 무엇보다 ‘지금’을 통과하고 있는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의 최근 견해까지 직접 들어볼 수 있다.

처방전 한 줄 “확신을 바꾸지 않는 용기란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는 비겁함이다.”

포토그래퍼
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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