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상의 자리를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비롯될까? 패션 브랜드를 넘어 하나의 고유명사로 존재하는 다섯 명의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을 만났다
오랫동안 최전선을 지켜온 이들일지라도 갓 패션계에 입문했을 때를 떠올려본다면 현재 이뤄낸 빛나는 업적들이 불가능한 목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올해로 60세가 된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에게는 1992년, 자신의 첫 직장이었던 페리 엘리스(Perry Ellis)에서 그런지 스타일의 컬렉션을 선보였다가 해고당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루이 비통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디자인 덕분에 그는 새로운 패션의 전형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마음껏 누비는 최고의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는 또 어떤가. 사업 인생 10년 후 1993년에 파산 보호 신청을 해야 했던 그였지만 파리에서는 셀린느를, 도쿄에서는 ICB를 담당하며 결국 자신의 레이블을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의 브랜드는 2011년 상장했고, 현재 64세인 코어스는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이 모든 업적은 자신의 재능과 비전을 믿고,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해낸 디자이너들의 순수하고도 당당한 태도,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Versace
“여성을 권위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베르사체는 여성들이 이끌어가는 기업이에요. 물론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제게 항상 도전 정신을 심어주거든요”.
– 도나텔라 베르사체(Donatella Versace)
“결단력과 강한 의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89세인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는 누구나 떠올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포브스에 따르면 아르마니의 순자산은 12.7억 달러에 달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속 비전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거든요.” 74세의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와 68세인 도나텔라 베르사체(Donatella Versace)는 가족 사업을 거대한 자본력과 영향력을 지닌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킨 여성들.
업계에서 42년의 시간을 보내온 코어스에게는 오랜 기간 꾸준히 디자인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이 놀랍지 않다.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직접 그린 패션 스케치를 판매하던 롱아일랜드 출신의 16살 소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배우 멜라니 그리피스에게 자신은 영화 <워킹 걸> 속 캐릭터 테스 맥길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코어스는 여전히 대도시에서 성공을 꿈꾸는 외곽 지역의 평범한 직장인인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마이클 코어스라는 사람이 매일 출근하고, 여전히 디자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미국 교통보안청(TSA) 직원들이 제 이름을 보고는 묻더군요. “마이클 코어스에서 얼마나 근무하신 거예요?”라고요. 코어스의 말이다.
코어스는 2010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 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가 수여한 공로상의 주인공이다. 공로상 수상자 중에서는 최연소에 속하는,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 50세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이듬해 마크 제이콥스가 48세의 나이에 같은 상을 수상하면서 코어스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보아온 패션업계의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제 코어스가 속한 세대가 기득권 층이 되었으며,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까지 함께 달려온 디자이너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신인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지냈어요. 그래서 언제나 신인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했나 봐요.” 코어스가 설명한다. “마크가 상을 받던 날, 제가 마크에게 이야기했어요. ‘아무래도 이제 우리는 나이를 좀 먹은 신인인가 봐’라고요.”
이들이 그렇게나 오랜 시간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은퇴를 선언한 도나 카란(Donna Karan), 수년간 미니멀리즘 왕국 건립에 몰두해온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지난해 11월 에스티 로더(Estee Lauder)와 2.8억 달러에 계약을 체결한 후 할리우드 영화감독으로 복귀한 톰 포드(Tom Ford)는 또 어떤가. 많은 스타 디자이너들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후 전략적으로 움직여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으며, 대기업에게 브랜드의 경영권을 넘긴 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에게 패션계는 여전히 격전지다. 힘들게 쌓아 올린 커리어가 때로는 무너지고 새로운 수장의 뜻을 위해 의지를 굽히는 대신 보따리를 챙겨 대문 밖을 나서야 하는 곳.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과열된 경쟁에 럭셔리 하우스의 디자이너들조차 그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추세는 디자이너의 영역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는 시대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창의적인 작업과 비즈니스라는 양쪽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시대를 민감하게 읽어내는 일까지, 디자이너들은 치열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삶의 균형을 유지해간다.
“저는 단순히 패션 디자이너만은 아니에요. 미디어 산업에 속한 사람이죠. 디자이너가 ‘콘텐츠’라는 단어를 고려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니, 과거에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에요.” 바이럴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구글이 ‘구글 이미지’ 기능을 개발한 것은 바로 베르사체의 정글 프린트 드레스를 입은 제니퍼 로페즈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언제나 기술과 창의성의 조화에 주목하죠”라고 이야기했다.
Prada
“초기 프라다는 아방가르드 미학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아방가르드하지 못했습니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혼란스러운 브랜드였고요. 사람들은 항상 프라다를 불편해했습니다”.
–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2004년,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한 토리 버치(Tory Burch)는 이커머스와 온라인 콘텐츠 채널을 갖춘 소비자 직접 판매 모델, D2(Direct to Consumer)를 최초로 활용한 디자이너다. 현시점에서는 지극히 일반적이지만, 당시 무척 획기적인 개념이었다고 버치는 회상한다. “다들 미쳤다고 했죠. 최초의 패션 블로그로 손꼽히던 ‘토리 데일리(Tory Daily)’와 더불어 웹사이트에 다른 디자이너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도 크게 환영받지 못했고요.”
오늘날 버치는 4,500명의 직원과 함께 일하고 있으며, 그중 본사 직원의 80%가 여성이다. 브랜드를 론칭한 이후에 자선재단을 설립하는 대부분의 디자이너들과 달리, 버치는 자신의 자선 활동에 힘을 싣기 위해 패션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토리 버치 재단은 미국에 있는 여성 기업가들을 위해 1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저금리로 지원하고 있다. “이게 제가 꿈꾸던 사업이었어요. 말 그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싶었어요.” 버치가 회상에 잠겼다. “18년이 지난 뒤에야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이 조금 부끄럽지만 이제는 긍정적인 변화가 무엇이고,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죠.”
세월의 시험을 이겨낸 이들의 역사를 보면 두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옷과 라이프스타일, 심지어 개인의 외모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독특한 관점과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점이다. 가령 토리 버치는 웨어러블한 럭셔리와 공동체의 힘을 중시해왔으며, 스텔라 매카트니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의류와 비건 가죽과 같은 혁신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운영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레드카펫의 힘을 완벽하게 이해한 최초의 인물이다. 오스카 수상자 중 아르마니를 입지 않은 이가 있나?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도나텔라 베르사체’라는 이유만으로 유명해졌다. 강렬하고 글래머러스한 ‘보디콘(body-con)’ 미학의 전형을 내세우며 전성기를 누린 그녀는 이제 여성 CEO들이 꼽는 대표적인 롤모델이다. 미우치아 프라다의 패션 철학은 젊은 시절에 완성됐다. 그 아이디어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 지에 대한 저항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녀는 여성 해방 시위에 생 로랑을 입고 나섰으며, 지금까지도 역행자의 태도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파티에 참석하는 일과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입고 있는 옷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상황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고 싶지 않아요. 만약 제가 하는 일에 따라 옷차림이 달라야 했다면 매우 불편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에이비에이터 선글라스와 완벽한 태닝 피부로 젯셋족의 이미지를 연출한 코어스는 <프로젝트 런웨이> 시즌 10의 심사위원으로 등장해 만인에게 이름을 알리더니, 재치 있는 입담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당시를 회상하며 코어스는 “이제 오래된 이야기죠. <프로젝트 런웨이>를 모르는 세대의 시대예요. 이들이 알고 있는 건 오직 제 디자인뿐이고요. 하지만 방송 이력이 디자이너의 개성에 도움이 될까요? 스타일리시한 것도 나쁘진 않죠”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공통점은 무엇일까? 파산을 했든 소중한 파트너를 잃었든, 자신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그들은 꿋꿋하게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점이다.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1997년, 비극적인 사건으로 오빠 지아니를 떠나보낸 이후 자신의 브랜드 경영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직면하며 인생의 혹독함을 제대로 배웠다. “제가 베르사체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건지도 몰라요. 확대 해석된 일도 많았고요. 지금의 저는 오빠보다 더 긴 시간 회사를 이끌고 있어요. 새로운 비즈니스 파트너도 성공적으로 영입했죠. 부디 모두가 품었던 의문에 대답 이상의 것을 보여줬기를 바라요.”
Michael Kors
“패션계는 장벽이 많은 세계였어요. 하지만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그 벽이 무너졌음을 느낍니다”.
–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패션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명확한 청사진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노력하고, 노력할 뿐. 실천하는 자세와 재능,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일을 해내는 능력 없이 어떻게 성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는 업계에 입성하기 가장 좋았던 시기로 꼽힌다. 오늘날의 거대한 럭셔리 패션 하우스를 구축하기 위해 경쟁에 뛰어든 재계 거물들의 후원 아래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브랜드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패션계를 화려하게 물들인 시기였으니 말이다.
Stella McCartney
“저에게는 단 하나의 길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지만, 결국 그 철학은 브랜드를 지탱하는 단단한 기반이 되었죠.”
– 스텔라 맥카트니(Stella McCartney)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를 갓 졸업하고 자신이 졸업 컬렉션에서 선보인 빈티지 레이스 드레스를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한 스텔라 매카트니는 끌로에의 최연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된 1997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말 젊고 순진하고 반항적이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바로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던 그 순간을 함께했어요. 패션계에서는 정말 드문 시기라고 볼 수 있죠. 글쎄요, 그 당시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그리고 수월하게 일어나는 시기가 다시 찾아올까 싶어요.”
2001년, 매카트니는 톰 포드와 그의 비즈니스 협력자, 도메니코 드 솔레에게 구찌를 담당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톰이 퍼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서 저는 이렇게 답했죠. ‘그거 잘됐네요. 그런데 전 가죽도 안 쓴답니다.’ 톰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더군요.” 매카트니는 현재 51세다. “당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어요. 저도 아쉬움에 몸서리쳤죠.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거든요. 일주일 뒤, 톰에게 다시 전화가 왔어요. ‘도메니코와 이야기해봤어요. 그럼, 본인의 브랜드를 시작해볼 의향은 있나요? 저희와 같이요!’라고 묻더군요. ‘당연하죠!’라고 답했죠.” (구찌 그룹은 이후 ‘케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2018년 매카트니는 직접 브랜드를 경영하다가 LVMH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Tory Burch
“토리 버치가 어느 때보다 혁신적으로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희는 멋진 발전을 이뤄냈어요. 이제 여성 평등을 위해 그 힘이 필요해요.”
– 토리버치(Tory Burch)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이어온 이들에게 좌절감은 더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그 어떤 어려움조차, 심지어는 시련이라 말할 수 있는 것마저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57세의 토리 버치는 인터뷰 당시 파리에 있었고, 바로 다음 날에 기약 없이 미뤄둔 사파리 허니문을 위해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휴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그녀는 2018년, 전 LVMH 회장이자 토리 버치 CEO인 피에르 이브 루셀과 결혼했다. 루셀이 회사에 합류한 덕분에 그녀는 즐겁게 디자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다른 디자이너들과 마찬가지로 버치의 눈빛은 여전히 미래를 향한 기대로 반짝인다. “전 항상 어떻게 하면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나의 이름에 제한되지 않는 회사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저의 최대 관심사거든요.”
그렇다면 패션계의 노장이자 대선배는 어떤 행보를 걸었을까. 디자이너와 최고책임자의 역할을 오가는 아르마니는 예민하고 날선 감각으로 자신의 왕국을 완벽하게 관리해왔다. 아르마니가 기업가가 된 까닭은 다름 아닌 1985년 세르지오 갈레오티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공동 설립자이자 자신만의 디자인을 개척해보라고 아르마니를 설득한, 그가 무척 사랑한 젊은 건축가였다. 아르마니는 자신의 행운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고인이 된 그의 형 세르지오 아르마니의 딸 로베르타와 실바나 아르마니, 여동생 로잔나의 아들 안드레아 카메라나를 비롯해 많은 가족들이 회사를 위해 한결같이, 헌신적으로 힘을 모아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의 방식이었어요. 나만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지키는 일, 그것만이 가장 멋진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아르마니가 말을 이어간다. “오늘날의 패션계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풍경은 독립의 역설이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저는 막강한 대기업 사이를 유영하는 흑조 같은 사람이고요.” 수년이 지났지만 이러한 디자이너들에게도 미래는 예상치 못한 변곡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삶의 롤러코스터를 신나게 즐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 글
- ERIC WILSON
- 포토그래퍼
- PAMELA HANSON
- 헤어
- ROBERT HARRINGTON
- 메이크업
- BERTA CA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