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에서 감성을 지닌 모든 작은 존재들에게 부치는 경이롭고도 기이한 편지. 일본의 현대미술가 코헤이 나와가 전시를 통해 서울에 거대한 우주를 들여왔다
2000년대 초반, 코헤이 나와(Kohei Nawa)는 진동하는 세계를 느꼈다. 인간 유전체의 모든 염기 서열을 해석하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열띠게 논의되고, 세계 최초로 체세포 복제를 통해 탄생한 복제 양 ‘돌리’가 연일 TV 뉴스를 장식하던 때였다. 정보 기술이란 파도가 세상을 뒤덮으며 우리를 둘러싼 주변 세계가 모두 데이터화, 디지털화되어 이해되기 시작하던 이 무렵, 조각가인 나와의 머릿속엔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이러한 시대에 생명체의 사고와 감성을 조각으로 표현한다면?’ 이 같은 질문의 끝에서 나와가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를 조각 언어로 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20년 가까이 전개하고 있는 대표 연작이자,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정보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라 말할 수 있는 ‘픽셀(PixCell)’에서도 그는 투명한 유리구슬을 소재로 무한히 증식하는 듯한 세포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한편 2024년 1월 6일까지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진행하는 개인전 에서 그는 인간, 비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우주(Cosmic)라는 세계에서 감성(Sensibility)을 지니며 호흡하는 존재들을 조명한다.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 감각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이야기하는 ‘픽셀’은 물론, 실리콘 오일이 흐르는 캔버스 공간에 무한히 생성되는 세포 패턴을 형상화한 연작 ‘바이오매트릭스(Biomatrix)’, 세포의 운동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만들어낸 현실 속 균열을 고찰하는 신작 ‘스파크(Spark)’ 등을 포함한 전시를 통해 그는 우주의 경이로움으로, 그 기이함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서울에서 오랜만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페이스갤러리 서울이 개관한 이후 최초로 전관을 사용하는 전시라 들었다.
오랜만인데 너무 바빠서 호텔과 갤러리만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웃음). 누가 동묘시장을 추천해줬는데 짬이 나면 한번 들러보고 싶다. 이번 전시에 관해서는 작년부터 얘기가 오갔다. 서울에서 이렇게 큰 규모로 개인전을 여는 건 참 오랜만이라 그간 펼쳐온 연작들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3층 전시장을 둘러보니 왜 전관을 사용해야 했는지 납득이 가더라. 대형 조각 신작 ‘스파크(Spark)’가 전시장 전체를 가로질러 설치됐다.
‘스파크’는 중력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오랜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중력인데, 이전에도 캔버스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디렉션’ 연작이나 공간에 실리콘 오일이 쏟아지는 풍경을 나타낸 ‘포스(Force)’ 연작 등으로 중력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펼친 적이 있다. ‘스파크’는 중력을 다루되 작품이 공간에 보다 다이내믹하게 존재할 수 있는 설치를 고민한 끝에 탄생했다. 검정 벨벳으로 마감한 탄소섬유 막대들이 여러 개 있는데, 한 공간 안에 서로 다른 중력권이 존재하는 풍경을 상상하며 고안한 작품이다. 그 결과 마치 멀티버스 세계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간에 예기치 못한 블랙홀이 생긴 듯한 느낌도 풍긴다. 지금 사는 현실 세계에 갑작스러운 균열이 발생하는 것, 현실과는 전혀 다른 입구가 열리는 것을 상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현실과는 전혀 다른 입구가 열리는 것을 상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전시장 중심에 강렬하고 수수께끼 같은 ‘스파크’가 자리한다면, 벽면을 따라선 최면적 느낌의 ‘리듬(Rhythm)’ 연작이 설치된 풍경이 흥미롭다.
두 작품의 대비를 통해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스파크’가 갑자기 균열이 발생한 비평화적 상태라면 ‘리듬’은 꿈틀거리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정적이고도 유기적인 세계다. ‘리듬’은 회색 벨벳으로 뒤덮인 다양한 크기의 오브제를 2차원 평면 위에 조합한 작업이다. 생명체들이 공생하기도 하고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서로 관계하는 자연 세계의 순환적이고 활동적인 복합성을 탐구한 작품이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벨벳 특유의 촘촘하고 미세한 소재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현미경을 통해 미생물의 세계를 보는 듯한 감각을 일깨우고 싶었다.
당신이 느끼는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어떠한가?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도시나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세상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예술가라면 분명 모더니즘이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시대 흐름에서 새로운 가능성이나 다른 장소로의 입구를 모색하고 창안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베를린에서 몇 달 산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동서를 가로막은 벽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발생한 어떤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예술가에겐 이런 느낌이나 감각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나 또한 타인의 작품에서 어떤 문을 발견했을 때 ‘이 사람은 이런 뚫린 구멍을 통해 드나드는구나’, ‘이런 다른 세계를 보여주려고 하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에너지를 받는다.
이번 전시 의 뜻을 풀이하면 ‘우주적 감성’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미가 담겼나?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주적 관점에서 지구를 다시 바라보고 그로써 새로운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며 준비한 전시다.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인데 이러한 우주에서 세포만이 호흡을 하며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세포라는 새로운 기준을 바탕으로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미생물 등의 존재를 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고찰한다. 오랜 시간 인간 중심주의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온 것에 우리 모두 한계를 느끼지 않나.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감성을 지닌 세포의 생태계가 기적과도 같이 별의 성층권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상황, 즉 이 우주의 고독한 상태를 느끼는 것이 지금으로선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주를 전면으로 내세운 전시다. 당신의 스승이자 2023년 10월 작고한 일본 예술가 히토시 노무라 역시 우주를 향한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문 스코어(Moon Score)’ 등과 같은 대표작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 두 사람의 작품 세계가 공명한다는 인상이 있다.
애초 라는 타이틀도 노무라 선생님의 작품명에서 착안한 거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천체 관측을 취미로 삼을 정도로 우주에 관심이 많았는데, 노무라 선생님은 일찍이 천체를 대상으로 사진 찍는 것을 ‘조각’이라 명명하신 분이다. 선생님을 만나 처음 조각을 시작하게 됐고, 그 영향이 분명 크다고 생각한다. 사실 올해 선생님과 2인전을 올릴 계획이었다. 작년 여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가을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22년 10월 3일 교토에서 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거다. 그 일이 있기 직전까지도 일본의 NASA와도 같은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와 함께 우주정거장에 조각을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한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실에 계셨는데 제자로서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순간에도 계속 작품에 대해 생각하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전시는 스승에 대한 오마주 전시라 할 수 있겠다.
오마주 전시이자 ‘Cosmic Sensibility’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전시 타이틀로 쓰며 선생님의 작업을 이어서 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생전 선생님은 매일 12시에 남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사진으로 담았다. 매일 밤 달이 뜨면 사진을 찍고 그것을 음표로 만들어 음악을 만드는 일을 40년, 50년 넘도록 하신 분이다. 선생님이 2022년 10월 3일 쓰러지고 2023년 10월 3일, 그러니까 딱 1년 만에 돌아가셨다. 나는 이 또한 선생님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마치 같은 시각, 같은 위치에서 1년간 태양의 위치를 촬영해 기록했을 때 8자 모양으로 ‘아날렘마’ 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물론 유가족과 얘기를 나눠야겠지만 2인전은 어떻게든 하고 싶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나?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을 예술에 바칠 것.
‘문 스코어’가 히토시 노무라의 역사라면 ‘픽셀’은 코헤이 나와의 역사라 봐도 되지 않을까? 박제한 물체의 표면을 유리구슬로 뒤덮어 사물의 본질에 관한 현상학적 질문을 던지는 ‘픽셀’ 연작이 어느덧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 신작을 만날 수 있는데, 처음 작품을 전개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 긴 시간 연작이 계속될 거라 예상했나?
글쎄, 대학원 시절 볼펜으로 작은 알갱이 모양의 세포를 그리다 시작한 게 ‘픽셀’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픽셀’ 하면 사슴 형상의 작품을 떠올리지만 웃기게도 그 첫 작품은 귤이었다(웃음). 졸업하고 할머니 댁에 간 어느 날 눈앞에 보인게 귤이었다. 1994년 대학에 입학해 9년간 공부하면서 인간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던 때다. 글로벌리즘, 정보 기술 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인간의 사고와 감성을 형태로서 남길 수 있지 않을까?’란 질문에서 시작한 연작이다. 처음엔 과일, 채소와 같은 식물로 시작해 이후 동물로 작업을 확장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박제된 양을 구매한 기억이 있다.
이번 ‘픽셀’ 신작에서는 사물과 생물의 무작위적 조합이 돋보인다. 고풍스러운 앤티크 의자 위에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닭이 앉아 있는 예상 밖의 장면을 유리구슬로 뒤덮은 작품도 눈에 띈다.
이번 신작들은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마 내가 예술을 마주한 최초의 경험일 텐데, 유치원 시절 초현실주의를 다룬 미술 전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발 딛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문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첫 예술적 체험이었다. 그리고 2024년은 초현실주의 사조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과거 초현실주의 시대의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상상한 것이 지금의 메타버스, 인공지능 세계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또 그들이 100년 전 경고한 것들이 100년 후인 지금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지 않나. 예를 들어 자본주의나 산업혁명이 낳은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지구를 지배하고 환경을 파괴할 거라는 것. 어쩌면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100년 후의 일이다. 100년 전 예술가들의 영감을 오마주하는 것이 곧 100년 후의 일을 그려보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이번 신작 작업을 했다.
2023년 6월, 프랑스 세갱섬에 높이 25m의 조각 신작 ‘에테르(Ether)’를 영구 설치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스파크’도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하는데, 만일 어떠한 한계와 제약이 없다면 어느 장소에 ‘스파크’를 설치해보고 싶나?
그렇지 않아도 제안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 현재 일본 치바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쿠르쿠 필즈(Kurkku Fields)에서 초현실주의 100주년을 기념한 ‘백년 후 예술제’가 열리고 있는데, 이곳의 옥외에 직경 16m 크기의 ‘스파크’를 설치할 계획이다. 무대 미술과 같은 느낌으로 스테이지가 있고 ‘스파크’ 같은 조각 작품은 물론 음악, 현대무용이 한데 어우러진 프로젝트로 완성하고자 한다. 드론 연출도 가능하다고 들어서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최근 당신을 가장 놀라게 했던 뉴스는 무엇인가?
우주에 관한 소식은 항상 챙겨 보는 편이다. 최근엔 ‘카미오칸데’ 관련 뉴스에 푹 빠져 있다. 일본 기후현의 카미오카 광산 지하 600m에 설치한 천문학 관측 장치다. 암반을 파내 만든 거대한 수조에 빛을 감지하는 광전자 증폭관을 깔아 우주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宇宙線)을 관측하는 장비인데 관련 연구가 아주 흥미롭다. 일찍이 양성자 붕괴를 연구하는 ‘슈퍼 카미오칸데’가 건설됐고, 최근 들어 ‘하이퍼 카미오탄데’가 건설 중이라 들었다. 카미오칸데 연구를 통해선 물질이란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사라지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지구 내부에서 우주를 관측하는 장비라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작가로서 무엇을 회의하나?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현실적으로 전부 구현하지 못하는 것. 될 수만 있다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신체를 갖고 싶다(웃음). 지금도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는데, 사실 어린 시절부터 잠을 잘 못 잤다. 머릿속에 작품에 관한 이미지가 끊임없이 떠올라서. 어린 시절만 해도 가족들이 잠든 뒤 산책을 나가 아침까지 걷다 들어오곤 했을 정도다.
- 포토그래퍼
- 최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