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인정을 받아 모던 클래식이라는 영광의 메달을 목에 건 문화 콘텐츠들이 있다. 하지만 피비 파일로가 못생긴 여자였대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폴란드 이민자의 후손이 아니었대도 과연 이만큼 뜰 수 있었을까? ‘내가 인정하기 힘든 모던 클래식’에 관한 다음 글은 세상 모든 과대 평가에 의혹을 제기하며 과연 무엇이 클래식으로 살아남는가 하는 물음표를 진하게 찍는다.
FILM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진정성
‘적잖이 실망했다’라는 평가가 온건하고 미온적이 되는 작품이 있다. 예를 들면, 트란 얀 홍 감독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 같은 작품에 대해 말하자면, 실망을 하기보단 당혹스러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영화는 거대했다. 구원과 속죄에 관한 끝을 알 수 없는 탐구를 위해 감독은 무려 기무라 타쿠야와 이병헌, 조쉬 하트넷이라는 세 나라의 대표 배우를 호기 있게 출연시켰다. 문제는 표현이다. 기무라 다쿠야는 은유적이라고 보기엔 너무 직접적이라 민망한 수준인 십자가투혼연기를 발휘해야 했다. 나머지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영문도 모른 채 배우들은 라디오 헤드의 음악이 입혀진 뮤직비디오를 찍어야했다. 감독의 변을 보았다. “14년 전 연출한 <씨클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뭐라는 건가. <씨클로>는 라디오 헤드의 ‘Creep’이 턱턱 막혀오는 베트남의 공기처럼 차오르고, 양조위의 침울한 마스크가 암울한 베트남 사회를 대변했던 자신의 최고작이란 말이다.이 영화의 ‘망조’를 설명하기 위한 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리자면, <씨클로>보다 앞선 감독의 대표작 <그린 파파야 향기>를 끌어와야만 한다. 베트남 소녀 무이의 성장담. 고된 하녀생활에도 순진하고 순종적으로 자라던 소녀가, 주인의 애정을 얻게 되고 사랑에 눈뜨게 된다는내용. 한 줄로 요약되고도 남는 간단 명료한 시놉시스다. 영화를 채우는 것은 눈을 정화시키는 녹색의 이미지와 고요한 정적, 집 마당에서 들려오는 음향 효과가 전부다. 영화는 시종일관 한 치의 대사를 허용하는 데도 인색했다.
이 영화에 관해서라면 , ‘영화를 본다’라는 표현보다, 차라리 제목의 그린 파파야 향기를 맡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싶다. 94년 개봉 당시,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블루>와 장예모 감독의 <귀주 이야기> 같은 필견작들과 함께 선보였는데, <그린 파파야 향기> 역시 시네필들에게는 반드시 챙겨 보아야 할 아트 영화로 분류되어 마땅했다. 게다 칸영화제 황금 촬영상과 세자르 영화제 신인감독상 수상이라는 타이틀까지도 낯선 베트남 영화를 매혹적이게 하는 촉매제였다. 당시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싱그럽다는 찬사 일색이었지만, 도대체 그 무형화된 이미지를 뛰어넘는 정서가 과연 무엇이었을까는 고민해보아야 한다. 명성은 드높았다만, 따지고 보면 <그린 파파야 향기>는 지금으로 따지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십분 투영한 ‘웰빙영화’쯤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소품이다. 트란 얀 홍 감독은 “설명 없이 이미지만으로 모든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영화를 만든 계기 중 하나는 이야기 자체에 대한 분노였다”라고 그럴듯한 의견을 피력했다. 이미지에 대한 그의 편애로 제시된 증거는 이랬다. 베트남계 프랑스인인 감독은이 영화를 베트남이 아닌 프랑스 자본으로 만들었고, 영화 속 공간 모두를 프랑스에 세트로 짓는 대범함을 발휘했다.
<그린 파파야 향기>의 기괴함은 어쩌면 여기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의 공기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감독이 체화한 공기는이루 말할 수 없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재현된 세트는 베트남의가난하고 열악한 정서를 담을 마음 따위 애초에 없는 듯했다. 말갛고 투명한 CF 속 세상처럼, 영화 속 베트남은 관객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정도로 반질반질 윤기 나게 치장되었다. 그 가벼움이 사뭇거슬렸다. 근 20년의 세월이 지나서 이 이미지만을 향한 탐닉이 불러온 초래의 사태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 고스란히 발견됐다. 비유와 상징의 가벼움은 <그린 파파야 향기> 정도 스케일의 영화라면 감당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런 거창한 주제에서는 삐끗해버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는 많은 작품이 이런 ‘오해’에서 출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켜켜이 쌓인 오해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 풀리거나, 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석될 일말의 여지가 있다. 내겐 거의 희박한 냄새로만 남아 있는, 그린 파파야 향기처럼 말이다.
글: 이화정(<씨네w> 기자)
ART
뻔뻔한 예술가의 텅빈 ‘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예술에 대한 고루한 관념을 단번에 뒤집어버렸다고 일컬어지는 작가. 그런데 예술에 대한 관념을 뒤집었다는 이유로, 그 또한 신화적 존재가 되어 예술이라는 신화의 중요한 구성물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뒤샹은 1917년 4월,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의 전시회에 남성용 소변기를 출품했다. ‘R.Mutt’라는 이름이 적힌 이 변기에는 <샘(Fountain)>이라는 제목까지 붙어 있었다. <샘>은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명명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예술이 된다는 전복적인 관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런 만큼이나이 <샘>을 둘러싸고 뒤샹이 벌인 일도 온통 요지경이었다. 실은 뒤샹은 <샘>을 출품한 전시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짐짓 다른 이름으로 출품해서는 전시회의 구성원들이 이를 물리치도록 꾸몄다. 또 그는 잡지에 글을 기고해서 전시회 주최측의 고루한 처사를 공격했고, 유명한 사진가 스티글리츠에게 부탁하여 <샘>을 촬영하도록 했다. <샘>은 전시기간 내내 칸막이 뒤에 있었고, 나중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미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이 작품을 관객의 입장에서 본 사람은 실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뒤샹은 이 밖에도 ‘병꽂이’나 ‘자전거 바퀴’ 같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품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예술품으로 명명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레디메이드(Readymade)’이다. 뒤샹은 젊었을 때 만들었던 이들 ‘레디메이드’를 작은 크기로 다시 만드는가 하면 나중에는 아예 똑같은 걸 여러 점 만들어서 팔았다. 그는 1964년에 13개의 ‘레디메이드’들을 여덟 점 한정판으로 주문, 판매했다. 이들 ‘레디메이드’ 중에는 <샘>도 들어 있었다. 전복적인 예술의 상징을 이처럼 상업적으로 이용한 데 대한 뒤샹 자신의 대답은 간단했다.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려면 돈이 필요하다”라는 것이었다.
앞서 1950년에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뒤샹의 허락을 받아 다른 변기를 구입했고, 뒤샹이 직접 이 변기에 ‘R. Mutt1917’이라고 서명했다. 그 뒤 1963년, 뒤샹은 스웨덴의 미술평론가 울프 린드가 스톡홀름의 화장실에서 찾아낸 변기 위에 똑같은 서명을 해서는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 미술관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에 출품했다. 요컨대,<샘>은 애초에 그걸 본 관객도 없고, 원본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뒤샹은 <샘>을 찍은 사진과 자신이 예술가로서 얻은 명성에 기대어 <샘>을 한껏 활용했다. 그는예술 창작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은 버렸지만 예술가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권위는 있는 대로 누린 것이다.
뒤샹은 말년에 인터뷰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리저리 꼬리가 잡힐 만한 말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모순적이고 뻔뻔한 예술가를 쉽게 붙잡을 수는 없다. 자신의 석연찮은 행적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혹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난해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을 때, 그는 이렇게 빠져나가곤 했다. “해답이 없는 이유는 제대로 된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글 : 류정화(아라리오 갤러리 큐레이터)
- 에디터
-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