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를 돌아보며 K영화에 던진 10개의 질문과 시선들. K영화를 둘러싼 진단 혹은 사담의 줄타기에서 2023년의 삼라만상이 고개를 내밀었다.
1. 당신에게 올해의 작품은?
임수연(<씨네 21> 취재 팀장) 조현철 감독의 첫 장편영화 <너와 나>. 기술적 완성도만 놓고 보면 아쉬운 지점도 많다. 특히 빛을 지나치게 많이 써서 상영관의 기술적 결함을 의심했던 촬영이나 조명은 초반 30여 분이 지나고 나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아이들을 포함해 한국 사회를 떠도는 유령을 위무하고자 한 영화의 진심을 느꼈고, 올해 가장 많이 울면서 본 작품이 됐다. 서투른 지점까지도 이 영화다웠다. 또, 미학적 측면에서 인상적인 작품은 이정홍 감독의 <괴인〉이다. 별거 아닌 듯한 상황들로 파생되는 정동들이 신묘했다. 이 영화가 관객의 감각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파헤치고 싶을 정도로.
정시우(영화 칼럼니스트)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 조현철이 로 백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한 말이다. 그가 감독으로서 <너와 나>를 내놓았다. 이젠 우리 곁에 없지만, 그럼에도 소멸하지 않고 어디에선가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가 흐릿한 시공간 속에서 <너와 나>는 떠난 이가 남겨진 자를 위로한다. 2014년 4월의 그날을 애도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
유선주(드라마 칼럼니스트) 병자호란을 통과하는 사극 MBC <연인>은 시대의 비극을 예정된 운명론으로 푸는 것을 경계하며 비극이 온당한지 되묻고 선택하는 개인들로 전진한다. 임금도 백성도 참혹한 수모를 겪던 시절. 장현(남궁민)은 “왜 어떤 이의 치욕은 슬픔이고, 어떤 자의 치욕은 죽어 마땅한 죄”인지 질문한다. 오랑캐에게 아홉 번절한 임금이 옥체를 보존하는 것은 사직을 지키는 길이면서, 오랑캐에게 잡힌 조선 여자는 죽는 것이 낫다고 내몰리는 시대에서 길채(안은진)는 늘 삶을 선택했고 “살아서 좋았어”라고 말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모욕하는 이에게 다부지게 귀싸대기를 날리는 길채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권은경(<더블유> 피처 디렉터) 어쩔 수 없이, 디즈니+ <무빙>. 극의 재미, 연출, 캐릭터들의 고른 활약과 작품의 존재감 등 여러 면에서 두루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드라마가 <무빙>이기 때문이다.
2. 관객수나 화제성 등에선 다소 아쉬웠지만 훌륭한 지점이 있었던 작품은?
임수연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 추석 한국 영화 세 편 중 가장 만족스럽게 봤지만 관객수는 반대로 갔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같은 김지운 감독의 초기 블랙 코미디가 떠오르면서, 야만의 시대에서만 가능했던 역설적 아름다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고전을 열렬히 사랑하는 이유 아닌가.
정시우 역시, <너와 나>. <너와 나>를 직접 본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상당하다. 문제는 산업인데, 이 영화를 걸어준 극장이 그리 많지 않다. ‘볼 권리’ 측면에서 극장으로부터 저평가된 작품.
유선주 머리를 산발한 악귀(SBS<악귀>)와 역시 머리를 산발하고 타임슬립한 조선시대 고부(TV조선<아씨 두리안>) 사이를 오가던 중, 안정된 발성의 상쾌한 미남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인피니트 출신 김명수였다. OTT 시대에 시청률을 그리 의미 있는 지표로 두지 않지만, 그의 복귀작 MBC <넘버스: 빌딩숲의 감시자들>은 SNS 화제성도 앞 두 드라마에 치여 빛을 보지 못했다. 변호사, 검사, 의사가 넘치는 드라마 판에 최초로 회계사라는 전문직을 다루는 신선함이 장점. 명문대 출신 엘리트 사이에서 겉돌던 고졸 회계사 장호우는 “아군과 적군은 사람이 아니라 타이밍이 결정”한다며 상황과 세력을 이용할 줄 아는 유연한 캐릭터라 썩 마음에 들었다.
권은경 ENA에서 방영된 지니TV 오리지널 <오! 영심이>. 영심이는 <달려라 하니>의 하니와 더불어 만화 원작이자 TV 애니메이션으로 수많은 한국 여자의 기억 속에 각인된 캐릭터다. 애니메이션의 실사 버전인 이 드라마는 ‘그때 그 시절 오영심과 왕경태의 20년 후’라는 기획부터 흥미로웠다. 코찔찔이 소년 경태가 성공한 영앤리치가 되어 나타났으며, 두 남녀가 일로 얽힌다는 설정 등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영심이의 얼굴과 정말 닮은 데가 있는 배우 송하윤을 기용한 선택이 적절했다.
3. 올해의 ‘한 수’라 부를 만한 캐스팅은?
임수연 <거미집>의 정수정과 <리바운드>의 안재홍. 동시대 가장 트렌디한 이미지로 손꼽혔던 f(x)의 크리스탈이 흑백 화면이 잘 어울리는 고전 배우로 활용되는 반전을 지켜보며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심지어 연기를 정말 잘하지 않았는가! 날고 기는 ‘연기신’들이 대거 나오는 <거미집>에서도 가장 빛났던 배우다. <리바운드>는 어딘가 심심한 유머에 묘한 매력이 있어 결국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귀여운 영화인데, 이 공의 팔 할은 안재홍에게 있다. 이상한 리듬으로 사람을 웃기는 재주를 타고났다.
정시우 당신이 <괴인>을 본다면 영화가 끝나자마자 주인공 ‘기홍’을 연기한 배우(박기홍)부터 검색한다, 에 500원 건다. 그래서 그는 누구인가.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비전문 배우다. 그리고 감독의 30년지기 친구다. 감독은 출연을 거절하는 절친을 설득하기 위해 2년간 공을 들였다는데, 신의 한 수가 됐다. 그 어떤 전형성도 피해 가는 박기홍의 연기는 <괴인>에 기이하고도 비상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유선주 사극에 드론으로 찍은 장면이 나오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극 중 드론의 시점은 종종 새의 시야와 겹쳐진다. <연인>에서 병자호란 전후의 조선과 기록되지 못한 백성의 삶을 훑고 다니는 이장현은 드론처럼 편리한 고성능이 이질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지그시 관망하는 깊은 눈빛은 남궁민의 전매특허이고, 그의 이장현은 시야에 감정과 서사를 더하고 이물감을 지운다.
권은경 지니TV 오리지널 <악인전기>의 김영광. 교도소에 수감된 조폭과 다소 어수룩한 인간처럼 앉아 있는 변호사 신하균이 접견실에서 처음 만나는 드라마 초반, 김영광은 그 큰 몸으로 살기를 뿜으며 신을 완벽히 장악한다. 센 역할이라고 해서 무조건 힘만 주지 않고 완급 조절을 능히 하는 그의 면모는 유독 큰 체구를 입고서 더욱 빛난다. 김영광은 어느새 장르와 캐릭터에 얽매이지 않고 연기할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한 느낌이다.
4. 연출자와 작가를 생각할 때, 가장 반가운 귀환과 다소 실망스러운 귀환은?
임수연 반가운 이는 <무빙>의 강풀 작가. 웹툰 <히든>으로 돌아온다고 예고한 그는 돌연 <무빙> 대본을 직접 쓰겠다며 사라졌고, 제작 기간 동안 업계에서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초반엔 신인 배우들 중심인데 이게 괜찮겠느냐’, ‘한국 드라마 역사상 손꼽히는 제작비가 투입됐는데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이야기라 우려가 된다’ 등등. 하지만 잘 만든 이야기는 결국 통하게 되어 있다. 집단 창작으로 뽑아낸 작화의 퀄리티나 기술적인 연출력 이전에 스토리의 완성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 ‘웹툰 시조새’, 강풀의 귀환을 지지한다. 실망스럽기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소 미지근한 귀환은 <1947 보스톤>의 강제규 감독.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올드보이들의 연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나도 모르게 기다릴 때가 있다. 사실 <1947 보스톤>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가 개인적 호기심을 끌어내지 못했지만, 내심 강제규 감독이 ‘대중성 쩌는’ 영화를 만들어 재기하기를 바랐다. 후반 30여 분 관객을 몰입 시키는 구간에선 역시 감독의 노련함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 전까지 빌드업은 지지부진했다.
정시우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내 호기심을 잡아끈 건 이병헌도 아니고 박서준도 아닌 이 사람, 엄태화였다. 2012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그의 단편영화 <숲>을 처음 접했을 때의 황홀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데, 나는 심지어 흥행에서 실패한 그의 첫 상업 영화 <가려진 시간>도 저평가받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래서 늘 품고 있었던 생각은 ‘엄태화 감독이 언제고 한 방을 보여줄 것이야!’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 한 방 이다. 극한의 상황에 직면한 인간 군상의 분열과 광기와 이기 심이 어디로 뻗어나가고, 그 안에서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자멸하는지를 끈적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귀환이라… 한 분만 언급하면 뭔가 형평성에 어긋날 것 같은 시련의 2023년이었다. 사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그래서인지 한국 영화계에서 굵직한 행보를 보여온 중견 감 독들의 귀환에서 아쉬움을 크게 느꼈다. <교섭>의 임순례 감독, <더 문>의 김용화 감독, <1947 보스톤>의 강제규 감독이 그 주인공들. 관객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걸까. 아니면, 감독들이 너무 느리게 걷는 걸까.
유선주 ‘예측할 수 없는 전개’는 극을 호평할 때 동원되는 말이지만, 김순옥 작가의 복귀작에 한해서는 애초 믿지 않았던 사람의 거듭된 배신을 지켜보는 잔잔한 환멸에 가깝다. 한편, 올해 가장 반가워야 했을 정성주 작가의 귀환이 주연 배우 마약 사건으로 가로막힌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권은경 올해 손꼽아 기다린 이들의 드라마가 공개되는 때는 12월호를 마감 중인 시점에선 모두 미래의 일이다. 얄팍한 다수의 드라마들 속에서 거장의 필력을 보여줄 정성주 작가와 김진민 피디의 넷플릭스 시리즈 <종말의 바보>, 그리고 강은경 작가와 <스토브리그>의 정동윤 피디가 손잡은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 <종말의 바보>의 거취가 불투명해져 한탄스러울 뿐이다. 영화 <범죄도시 3>에 대해선 이번 편에서 변곡점이 될 만한 시도나 또 다른 임팩트가 있길 바랐기 때문에 다소 아쉬웠다. 실망했다는 건 이 영화에 애정과 기대를 갖고 있다는 뜻.
5.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속 결정적 한 장면은?
임수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반전이 드러난 이후 플래시백. 아파트를 잃은 영탁 (이병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디스토피아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명화(박보영)는 다소 민폐 같고 오히려 영탁에게 더 이입된다’라는 반응이 많아 놀랐지만,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흔들리던 영탁의 눈빛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강남 아파트로 상징되는 계급 사회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와 가장 닮은 인물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 영탁이 아닐까. 현 구조의 부조리를 외치는 나의 진짜 욕망은 은연중에 그와 닮아 있는 건 아닌가. 자꾸 곱씹게 된다.
정시우 그러니까, 신선한 충격. 봉준호 감독 영화 최초의 크리처물 주인공이 ‘괴물’이 아니라 ‘고릴라’와 ‘고릴라 똥’이었단 사실 말이다. 넷플릭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 리>가 보증해주는 내용이다. 1990년대 시네필 문화를 조명한 이 다큐멘터리에는 봉준호가 대학 시절 만든 23분짜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룩킹 포 파라다이스>가 깜짝 공개된다. 봉준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알려진 단편 <백색인>보다도 앞선 영화다. ‘봉준호 영화의 에센스’가 담긴 애니메이션을 만나는 짜릿함이란.
유선주 <무빙> 4회. 노란색 공룡 우비를 입은 봉석이 재개발 지역 현수막을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희수에게 향하는 장면. 통제하지 못하고 억제하던 봉석의 힘이 잔나비의 음악으로 시동을 걸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쪽으로 방향과 속도를 갖는 움직임, 무빙이 된다.
권은경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 김희애가 저질 합성사진을 만들어 유포한 남학생을 찾아가 협박 내지 참교육을 할 때. 그 3분 정도를 채우는 김희애의 모든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배우의 특성(공기 반, 소리 반식 발성과 말투 등)과 다르지 않은데, 하필 이런 대사를 발화한다. “내가 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서 상기시키고 죄를 물을 거야. 네가 운 좋게 대학을 가면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네가 한 짓을 폭로할 거고, 네가 취업을 하면 회사 인트라넷까지 파고들어서… (중략) 설마 그러겠냐고? 응, 그럴 거야. 내가 이런 걸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거든.” 무릎 꿇고 봤다. 올해의 쾌감, 올해의 타격감!
6. 올해의 신인은?
임수연 <다음 소희>, <너와 나>의 김시은. 각각 칸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상영으로 보면서 ‘2023년 여자신인상은 저 친구에게 다 돌아가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났을 때 상대에게 벽이 없는 태도와 솔직한 감정 표현이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그런 태도가 본인의 연기에도 묻어난다.
정시우 <다음 소희>, <너와 나>의 김시은. 박정민이 말했던가. ‘조용히 나타나 아름답게 피어난 들꽃 같은 배우’라고. 동의한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다른 기운의 얼굴을 보여주는 터라, 캐릭터 운신의 폭도 상당히 넓어 보인다. 차기작이 <오징어 게임 2>라고.
유선주 어떤 분야든 패기 넘치는 신입이 관습에 던지는 질문이 있다. “왜? 그거 꼭 해야해? 다르게 하면 안 돼? ” 송수한 작가의 데뷔작 JTBC <대행사>가 그런 드라마였다. 광고 회사 상무 고아인(이보영) 곁에 일과 사랑을 쟁취(여성 성장담의 전형이다)하는 데 필요한 남성 캐릭터를 세워두더니 천연덕스럽게 방치하는가 하면, 엄마에게 버림받은 상처로 일에 미쳐 살던 아인이 엄마와 재회하는 대목에서도 눈물 바람 한풀이는 없다. 아인은 가정폭력 피해자로 거처를 계속 옮겨 다니던 엄마가 머물 곳으로 경찰서 바로 앞 오피스텔을 마련하는데, 해묵은 미움을 다 풀지 않고도 엄마에게 새겨진 두려움을 여자로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산뜻하고, 말이 된다. 패기일지 치기일지. 다음 드라마가 궁금한 작가다.
권은경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김용훈 감독. 2020년 <지푸 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이름값 묵직한 배우들을 데리고 그 앙상블을 만들어낸 솜씨를 떠올리면 김용훈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뒤져보게 되지만, 그 영화는 감독의 첫 장편영화였고, <마스크걸>은 드라마 데뷔작이 맞다. <마스크걸>을 단숨에 정주행한 이유는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러나’ 싶어서다. 이한별, 나나, 고현정 배우 3인이 주인공 1역을 맡지만 서로 다른 자아처럼 보였고, 그렇기에 더욱 전개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에피소드마다 전면에 나선 인물이 달라지는데 누구 하나 만만한 캐릭터도 없다. 후반으로 갈수록 염혜란 배우를 위한 작품이라고 느꼈다. 어쨌든 이 모든 배우를 탁월하게 활용하며 괴이한 비극을 완성한 건 감독이다. 작품에서 감독의 기개가 보였다.
7. <무빙>은 어떻게 디즈니+의 구원투수가 되었나?
임수연 흥행 공식을 따라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치고 처음 의도를 그대로 밀어붙이겠다는 창작자의 뚝심이 지지받았기에 가능한 작품이었다. 성선설을 믿는 휴머니스트 강풀이 가장 자기다운 것을 밀어붙여서 해낸 결과물. 디즈니+ 한국 진출 초기에 투자 결정이 됐기 때문에 이 같은 모험을 강행할 수 있었고, 분량에 집착하지 않고 작품의 힘을 믿고 전진한 배우들의 참여가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정시우 <무빙>이 나왔을 때 이런 표현을 쓴 적 있다. 부위(장르)별로 즐기는 잘 짜인 코스요리 같다고. 청춘물→첩보 멜로→하드코어한 액션 등으로 회차마다 분위기를 바꿔 이어 달리는데, 장르마다 완성도도 상당해서 음미하는 재미가 있다. 강풀이 직접 대본을 쓴 것도 주효했다는 생각. 다른 작가에 의해 영상화된 강풀의 기존 작품은 캐릭터 서사가 압축되면서 이야기도 납작해지곤 했다.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강풀이 아니었을까. 그는 캐릭터 개개인의 개성을 세심하게 빌드업하며 시청자가 인물들에 더 큰 애정을 품게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마음 줄 캐릭터가 많은 건.
유선주 돈가스를 튀기고 치킨을 배달하며 동네 슈퍼를 운영하는 골목길 자영업자들이 능력자인 세계관. <무빙>은 이들이 생계를 꾸리는 터전을 충실하게 다루고 지역을 구체적으로 호명하며 익숙한 이웃이자 한국형 히어로로 가깝게 다가 앉혔다. 한편,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열을 올리는 악인의 세공에 <무빙>은 관심이 없다. 안기부-국정원 인사들은 ‘로켓단’마냥 단순해도 그저 기능하는 것으로 충분히 몫을 한다. 다만, 대책 없이 순수한 마음과 병치시킨 잔혹하고 집요한 폭력 묘사에는 생각이 깊어진다.
8. 여성 캐릭터 혹은 여배우 활용 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우는?
임수연 영화 <잠>. 한국 사회의 기혼 여성이 공유하는 공포와 원한을 호러 영화 문법에서 풀어낸 흥미로운 데뷔작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종교적 믿음이 필요하다는, 특히 여성에게 더 그러하다는 서글픈 현실을 보여줬다. 정유미는 한국 30대 여성의 표상이 되어가고 있다.
정시우 <잠>의 정유미. 정유미는 사랑스럽다(‘윰블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것 같은 얼굴이기도 하다(<82년생 김지영>). 동시에 일견 만화스럽다(<보건교사 안은영>). <잠>은 정유미가 지닌 다양한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 작품이다. 광기를 향해 서서히 변모하는 정유미의 얼굴이 감탄을 부른다.
유선주 팔자 꼬인 여자의 이야기, 박복한 여성 서사를 가벼운 연민으로 대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여성 연기자들의 파괴력이 <마스크걸>에 응축되어 있다. 김모미의 인생을 나눠 가진 고현정, 나나, 이한별뿐만 아니라, 아들의 문제를 직면하지못하는 모성, 비난당하면 바로 무너질 사람처럼 ‘남 탓’으로 끝장을 보는 김경자의 삶을 끝까지 감당한 염혜란 배우에게 압도당했다.
9.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돌파한 <범죄도시 3>. 이 시리즈가 롱런하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임수연 한때 ‘대중픽’이라고 불리던 가수의 컴백이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풍경을 보며 생각한다. ‘대중성은 있다가도 금방 사라지는 것이구나.’ <범죄도시> 역시 가성비 좋은 검증된 기획이라며 안일해지지 않고, 전편과 다른 무언가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훨씬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봤을 법한 사건을 변주하고, 우리가 알던 배우들의 이미지를 비틀며 매편 다른 악역 캐릭터를 선보이고, 기계적으로 터지는 몇 번의 유머 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 콘텐츠 업계에 안전한 것이란 없지 않은가.
정시우 우리 편에겐 듬직한 ‘무기’인데 상대에겐 살벌한 ‘흉기’인 ‘마동석=마석도’의 몸뚱어리. 그 육체가 나쁜 놈을 아작낼 때 피어오르는 카타르시스는 이 시리즈를 견인해온 재미다. 자연스럽게 마석도가 ‘어떻게’ 나쁜 놈을 혼낼 것인지 못지않게 ‘누구’에게 펀치를 날리느냐가 중요한 상황이 됐다. 상대가 막강할수록 관객이 느낄 대리만족도 상승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입체적인 빌런 캐릭터에 대한 고심이 필요하다. 3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 역시 빌런의 아쉬움이었음을 잊지 말자.
권은경 마동석이라는 친근한 슈퍼히어로가 속 시원히 악을 응징하는 쾌감에 방점을 두는 구조 속에서, 〈범죄도시>는 변주의 키를 ‘배경’에 둔다. 1편의 한국 가리봉동, 2편의 베트남, 3편에서는 일본을 살짝 끌어들인 뒤 4편에서 필리핀을 무대로 삼는다는 점이 그렇다. 마동석의 캐릭터 특징과 서사 구조는 거의 고정값으로 보이는 바, 그렇다면 변수는 악당의 임팩트와 범죄의 속성(배경까지 포함하는)에 있겠다. 그냥 아는 맛이 아니라 ‘별미가 곁들여진 아는 맛’을 제공하면서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 버스를 이어가려면 그 변수를 묘사하는 데 만큼은 과감하게 손대도 좋을 것 같다.
10.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 영화는 11월 초 현재 <옥수역 귀신>, <범죄도시 3>, <밀수>, <잠>, <30일>이다. 여름방학 시즌 극장 관객은 작년보다 240만 명 이상 줄었고, 추석 연휴에 맞붙은 <거미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1947 보스톤>의 관객수를 합하면 300만 명이 좀 넘는 정도다. 이런 수치와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임수연 올해 결과를 두고 ‘올드보이들의 몰락, 세대교체, 일본 애니메이션 강세’와 같은 키워드로 극장가를 요약하기에는 내년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때는 노련한 선배 감독들이 잘 되고, 신인이 씨가 마르고, 일본 영화는 외면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흥행 공식’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판이 짜여지고 있다는 것. 더 이상 극장 관람은 통신사 할인으로 가성비 좋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우위를 가진 여가 활동이 아니다. 수 많은 선택지 대신 영화를 선택할 만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업계는 통렬하게 반성하고 되돌아봐야 한다.
정시우 흥행 부진의 이유로 더는 팬데믹 핑계가 통하지 않으리란 것. 2019년 이전의 극장 분위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영화 부진이 특히 눈에 띄는데, 그동안 원인으로 많이 언급돼온 건 ‘극장 티켓값’ 상승이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자. 높아진 관람료가 한국 영화 위기의 절대적 이유라면 외화도 흥행에서 죽을 쒀야 했는데, 외화들은 팬데믹 이전 상황으로 회복된 걸 수치가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가 외화에 비해 경쟁력이 뒤졌다고 보는게 맞다.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재미없었단 뜻이다. 관객은 더 이상 공식에 찍어낸 고만고만한 영화에 관대하지 않다.
권은경 집에서도 웬만한 걸 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진 탓에 기회비용과 본전을 더욱 따지게 되는 건 이제 ‘시대정신’이다. 누군가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그렇게 극장으로 향하는 ‘감각’을 되찾으려면 어느 잘난 작품 하나가 탄생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듯하다. 극장의 위기와 투자 제작의 위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는 산업을 두고 슬프지만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끌리는 작품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원래 극장에는 어딘가 이상해서 매력적이지만 흥행 성적은 썩 훌륭하지 않을 영화와 킬링타임용으로 좋은 영화가 나란히 걸려 있곤 했다. 전자 같은 작품에 대한 투자 제작 전망이 밝은지를 생각하면 더욱 슬퍼지지만, 관객으로서 ‘재밌는 영화’, ‘나를 극장으로 움직이게 만들 미덕이 있는 영화’가 자꾸 나와줘야 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