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대로부터의 유물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유산이 될 미술, 영화, 문학, 음악 등을 한자리에 소집했다. 유통기한을 정한다면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이상이 될 현 문화계의 결정적 장면들.
Music
마스 볼타
프로그레시브, 메탈, 펑크,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능숙하게 한데 녹여낸 마스 볼타의 2집 앨범. 언뜻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여겨지는 요소들이 이루는 조화가 짜릿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꽤 오랫동안 메탈 밴드들이 지지부진했는데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매너리즘이었다. 즉, 상상력도 새로운 아이디어도 없이 비슷비슷한 음악만 반복되다 보니 도무지 장르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 마스 볼타는 이 같은 교착 상태를 흔들고 헤비메탈의 새로운 생존 가능성을 제시한 팀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는 다양한 취향의 음악 팬들에게 두루 호소할 수 있는 음반이다. 2005년 발매 당시엔 마니아들의 호평을 얻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더 지난 뒤에 사람들이 그 진가를 되짚지 않을까 한다. -이경준(음악 칼럼니스트)
TV
<과학수사대 CSI>
처음에만 반짝하지 않고 오래도록 질을 지키며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거의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번졌다는 점에서 <과학수사대 CSI>(이하 )는 2000년대를 대표하는 드라마로 오래 기억될 거라 생각한다. 1990년대의 수사물이 불확실성과 불신을 주로 다룬 데 반해(대표적인 예가 바로 <엑스파일>이다) 2000년대 TV는를 분기점으로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있다는 일종의 희망(사항)을 보여줬다. 즉 <엑스파일>이 정부의 발표가 무조건적으로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일종의 기반 흔들기를 시도했다면, 는 그 다음의 수순을 그렸다고 할까? 과학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반박할 방법을 제시했다는 뜻이다. 완성도도 뛰어날뿐더러 2000년대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한 드라마인 만큼 두고두고 회자되지 않을까 싶다. -남명희(<미치도록 드라마틱한 세계, 미드> 저자)
Music
<우리는 깨끗하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그 어디서도 듣기 힘든 정서와 사운드로 완성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문제적 데뷔작. 1990년대 이후의 록음악이 공유하고 있는 냉소적이면서도 자기 관조적인 느낌이 이들의 앨범에서도 여지없이 읽히긴 하나, 그러한 코드를 대단히 독창적인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국적이지도, 그렇다고 세계적이지도 않은 음악이라고 할까? 어쩌면 현재보다 나중에 더 높이 평가 받을 법한 강렬한 개성을 지닌 팀이다. –고건혁 (‘붕가붕가 레코드’ 대표)
Movie
<업> 피트 닥터, 밥 피터슨
‘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애니메이션들의 우수함을 한번 더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이미 전작들에서도 기미가 보였지만, 픽사는 그들의2009년 작인 <업>에서 본격적으로 라이브 액션 영화의 미장센을 시도했다. 결과물은 실로 엄청났다. 대사 한마디 없이 BGM과 플래시백으로만 칼과 엘리의 행복했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는 프롤로그만으로도, <업>은100년 영화 역사에서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를 합친 걸작 리스트의 맨 위쪽으로 단숨에 올라섰다. –태상준(국제SF영화제 프로그래머)
Fine Art
안젤름 키퍼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안젤름 키퍼는 역사와 신화, 과거와 현재, 탄생과 죽음, 선과 악, 육체와 정신, 문명과 자연,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물성을 간직하면서 이 세계에 어우러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갈라져 절규하는 흙, 백년의 풍파를 겪은 듯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 깨어진 도자기 파편들, 전쟁의 흔적 같은 납 조각들, 알 수 없는 수많은 기호와 글자들이 얼키설키 거대한 화면을 덮고 있는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다. 1980년대 초부터 키퍼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오브제들은 커다란 집합 안에서 고유의 상징성을 간직한 채 전체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는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의 작품을 실제로 처음 접했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한편 키퍼의 작품은2007년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설치되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이 생존작가에게 영구 설치 작품을 의뢰한 것은1953년 조르주 브라크 이후 5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정혜연(국제갤러리 큐레이터)
Movie
<슬럼독 밀리어네어> 대니 보일
기술적으로도 매끈하게 잘 만든 작품이지만 주인공 자말의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이야말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관객들로 하여금 ‘ 아, 나도 저렇게 순수했을 때가 있었는데’ 라며 예전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다. 특히 천신만고 끝에 라티카와 재회한 자말이 그녀의 상처에 키스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할 만큼 로맨틱한 순간. 진정한 사랑을 뭉클하게 그려내는 영화라면 그 수명이 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껏 사랑하는 많은 고전이 증명하는 바다. -최원섭(<불타는 내 마음> 영화감독)
Stage
<빌리 엘리어트>
영화를 뮤지컬로 번안해 무대에 올리는 이른바 ‘뮤비컬’ 은 이제 공연계에서 하나의 어휘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눈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200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으며, 현재 한국 라이선스 공연이 진행 중인 <빌리 엘리어트>는 단연 특기할 만한 작품이다. (원작 영화를 감독했던) 연출자 스티븐 달드리는 이 뮤지컬이 안이한 재탕이 아닌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무대만의 문법을 충분히 고민한 눈치다. 1부 마지막을 장식하는 빌리의 ‘앵그리 댄스’ 신은 영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스펙터클로 재탄생됐다. 무엇보다도 냉정한 현실과 거의 무모해 보이는 희망을 뭉클하게 교차시키는 드라마는 관객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