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후, 새 여정의 시작

전여울

 1922년 대전에 세워진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수탈 기관인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이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재탄생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 헤레디움의 뜻이다. 침탈의 상흔을 간직한 공간은 이제, 동시대의 예술적 영감과 감동 가득한 곳으로 새로운 시간을 새겨갈 예정이다. 

대전시 동구에서 신규 오픈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

내년 1월 31일까지 개최하는 개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곡창 지대와 주요 항구 도시에 총 9개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를 설치하고 토지와 자원, 노동력을 수탈했다. 지금은 대전 과 부산, 목포 세 곳에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남아 있 다. 대전 동구에 위치한 ‘헤레디움’은 그렇게 남아 있던 동양 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을 복원한 복합예술공간이다. 해방 이후 민간인 소유로 넘어가 상업 시설로 활용되다가, 2004 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고, 그 후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 가 지난해 12월 다양한 고증 자료를 통해 복원한 근대 건축 유산이다. 아픔의 장소였던 과거의 건축물이 예술을 통해 다 양한 메시지를 전하는 곳으로 새 여정을 부여받은 것. 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자주 독립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제는 새로 운 이야기를 담아낼 모뉴먼트로 재탄생한 셈이다. 

이곳의 과거와 현재는 건물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100년 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창문, 당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살 려낸 천장 몰딩이 그 흔적이다. 기존 벽돌과 새로운 벽돌이 맞닿아 있는 건물 외벽은 가혹했던 강점기 역사와 현재의 변 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헤레디움이 위치한 장소 또한 다시 살펴볼 만하다. 대전시 중구 인동은 과거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중심지와 본토에서 이주한 일본인 보호를 위한 일제 공 공기관이 자리한 경계 지역이었다. 오늘날에는 주상복합 시 설 등이 들어서면서 역사의 흔적은 아주 일부만 남았다. 그 런 곳에 자리한 헤레디움의 존재는 과거를 잊지 않고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를 뜻하 는 그 이름처럼 역사를 마주하고 새로운 미래를 조형해가고 자 하는 이 공간의 방향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달까. 

전시 포스터

헤레디움의 공식 개관을 알리는 전시는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로 시작한다. 9월 8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리 는 헤레디움의 첫 전시를 안젤름 키퍼의 작품으로 시작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안젤름 키퍼는 세계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꼽히는 독일 출신의 아티스트로 전쟁의 폐허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온 작가다. 그는 압도적인 스케일 과 표현주의적 기법을 통해 ‘폐허와 허무에서 피어나는 새로 운 시작’이라는 철학을 저신의 예술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그의 메시지는 식민지 역사의 상처를 품은 채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헤레디움의 공간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전쟁의 폐허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온 독일 출신 아티스트 안젤름 키퍼.

이번 전시에서는 안젤름 키퍼의 초기 작품 17점이 전시장을 채운다. 이 큐레이션은 키퍼가 사랑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 M. Rilke, 1875~1926)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릴케의 세 편의 시 ‘가을날 (Herbsttag, 1902)’, ‘가을(Herbst, 1906)’, ‘가을의 마지막 (Ende des Herbstes, 1920)’이 전시를 관통한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키퍼의 작품에서는 짙은 실루엣의 나무들과 갈색 의 가을 낙엽들, 그리고 겨울의 계절감이 부패와 쇠퇴 그리 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데, 이 감상은 삶의 변화와 덧 없음, 근원적 불안과 고독을 노래하는 릴케의 시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일련의 정서는 회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2021)에서 잘 드러난다. 릴케의 시구이 기도 한 이 문장을 화면에 새겨 넣으며 릴케에 경의를 표한 작품이다. 화면에서는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건물을 통해 폐허의 쓸쓸함과 자연의 혹독한 불안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 문장을 곱씹어보며 작품을 바라보면 여름이 지나가도 록 안식처를 찾지 못한 사람은 추운 가을이 되어서도 그것을 찾기 어렵다는 잔혹한 현실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에 ‘집’이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안식 처라는 생각이 더해지면 쓸쓸한 기분이 또 한 번 밀려온다.

한편 ‘가을’ 연작은 비회화적인 재료를 사용해 구체성과 추상 을 넘나들며 화면에 은유적 의미를 부여하는 키퍼만의 조형 언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붉은 낙 엽들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것처럼 생생한데, 그 표현의 비밀은 두껍게 바른 물감 사이사이에 진흙, 지푸 라기, 밧줄, 전선, 납, 금박 같은 재료를 사용한 데 있다. 특 히 납과 금박은 파괴와 탄생, 황폐함과 풍성함을 상징하는 재료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져 사라지 지만 봄이 오면 새싹이 자라나는 토대가 되어준다는 재탄생 의 의미로 바라본 작가의 소망이 읽힌다. 즉 가을에 수북하 게 쌓인 낙엽처럼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역사가 만들어지 고, 또 그만큼의 미래가 만들어지는 이 세상 진리에 대한 이 야기다.

전시장 한가운데 버려진 듯 자리한 설치작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2022) 역시 안젤름 키퍼의 대표작이다. 벽돌은 키퍼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 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연관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끝나 가던 1945년에 태어난 키퍼는 무너진 주택가와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장소는 그에게 놀이터처럼 뛰어노는 공간이기도 했다. “폐허 속에서 노는 것이 즐거운 기억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키퍼에게 폐 허는 전쟁의 상흔이라기보다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로 남아 있다. 키퍼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전시장에 흐트러진 벽돌 을 바라보면 폐허의 흔적 같기도, 집이 지어지는 현장 같기 도 하다.

회화 작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2021).

벽돌을 활용한 설치작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2’(022)

‘폐허는 무엇인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 나에 게 중요하다. 폐허야말로 창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파괴 된 후에 재건이 시작되고, 상흔이야말로 회복의 시작이라는 사건의 흐름. 폐허에 대해 이야기하는 키퍼의 말은 어딘가 헤레디움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게 한다. 쓸쓸한 풍경을 마 주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 는 움직임을 표현한 안젤름 키퍼와, 아픈 과거를 그대로 복 원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고자 재탄생한 헤리디움의 장소성이 어딘가 겹쳐 보여서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복원해 개관한 ‘헤레디움’.

에디터
전여울
유다미 (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COURTESY OF HERED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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