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에 가도 다른 것을 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 음식과 와인, 책과 음악에 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취향으로 에디터를 늘 놀라게 하는 배우 김남진이 유럽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가 여러 도시에서 수집해온 아름다운 찰나들 가운데 밀라노 가구 박람회 이야기를 먼저 청해 듣기로 했다.
MILANO
여행자에게 도시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건 아주 사소한 요소들이다. 예를 들면 비행기 지연으로 늦게 도착, 어둡고 낯설었던 밀라노를 활기차게 바꾸어놓은 식당 일 살루마이오(IL Salumaio)처럼.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은 공간에 조용하면서도 은은한 에너지가 맴돌았고, 와인과 음식이 다 만족스러워서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 두 번 방문했다. 밀라노 쇼핑의 중심가인 몬테 나폴레오네에 위치해 있는데, 날씨가 좋고 호텔이 비수기일 때(가구 박람회 기간 중 밀라노 호텔의 숙박비는 평소의 3배를 받는다) 이 식당 야외 자리에서 점심을 다시 즐기고 싶다. 여행 중 혼자서 식사할 때 흘러나오는 음악과는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친구와 식사할 때는 서로의 대화가 음악이 되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음악도 대화도 충분한 청담동의 미 피아체가 더욱 그리워지긴 했지만.
바가티 발세치 미술관(Museo Bagatti Valsecchi)이 바로 이 식당 건물 위층에 있다는 건 레스토랑 카운터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뮤지엄 카드를 보고 알았지만, 야외 중정을 지나 귀엽게 숨어 있는 소품 편집매장 점원의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더 이끌렸다. “위층에서 정말 멋진 전시를 하고 있답니다.” 마치 주문에 홀린 듯 계단을 올라가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순간 동공이 커지고, 온몸은 어디론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끔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만날 때 경험하는 무한의 진공 상태를 나는 좋아한다. 슬로 슬로 탭!탭! 그러다 들어선 문과 문사이, 방과 방,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징검다리를 지나면 무심히 놓여 있는 설치작업이 눈에 들어온다. 디자인이 가미된 조각, 의자, 조명 같기도 하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던 원석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하는 오브제들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며 시니컬하게 미소 짓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과 빛, 색채와 색채, 공기와 공기는 그 공간을 미로처럼 신비롭게 만든다. 어느 순간 두 팔을 정적이 감도는 허공에 휘저어본다. 내가 지금 보고 느낀 것은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지만 내 속에 기억될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부서지고 흘러내리는 아름다움.
SALONE DEL MOBILE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나의 관심사는 가구가 아니었다. 사람이 머무르는 공간을 얼마나 조화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가구의 형태와 배치, 색상의 포인트, 그와 어울리는 다양한 소품과 조명의 위치, 각도, 색상, 밝기…. 안락하고 유니크하며 지루하지 않은 신선함. 이 모든 걸 아우르면 인테리어라고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테리어’라고 이름 붙일 때의 똑떨어지는 공식 같은 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매력적인 분위기를 보고 싶었다. 메인 전시관의 가구 브랜드들은 저마다 매력을 발산하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왠지 그런 활기를 내뿜는 가구들이 귀여운 애완동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 속에 우아하게 일광욕을 즐기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며 다가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처음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커다란 스크린의 형태가 눈에 들어오고 차츰 시야가 밝아지듯이, 가구 박람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시를 볼수록 하나씩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한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크고 작은 부스들이 공연 예술 무대, 소설 속의 장소, 영화 촬영장 같다는 상상을 펼쳐보았다. 역시 비트라(Vitra)관은 가장 있기 있는 전시관이었다. 가구 디자인도 뛰어나지만 그걸 아주 아름답게 보이게 해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었다. 옆 전시관인 폴트로나 프라우(Poltrona Frau)관도 마찬가지로, 낱낱의 가구뿐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를 꽃으로 마무리한 센스가 인상적이었다.
가구 박람회에 모인 세계 여러 나라의 디자인은 한 도시 속에서도 또다시 여행을 하는 독특한 체험을 하게 한다. 특히 반가웠던 건 독일 디자이너 콘스탄틴 그리치치(Konstantin Grcic)의 가구들. 평상시 그의 디자인을 좋아했는데 대량생산을 하면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같다. 점심 이후의 일정은 조명 전시관. 어두운 전시관에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마치 우주의 수많은 별처럼 반짝인다. 영화 <그랑 블루>에서 무한히 깊은 해저에 잠수해 들어가는 주인공 같기도 했던 경험. 끝없이 펼쳐진 조명관을 연속적으로 보니 영상미까지 느껴졌다. 심지어 어떤 조명들은 조각이나 설치작품 같기도, 로봇 같기도 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건축가 장 누벨의 특별전 <Office for Living> 또한 인상 깊었다. 어둡고 긴 통로를 걸어가면 커다란 원형 기둥에 달려 있는 대형 스크린에 뭔가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이 아주 큼지막하게 등장했다. 그가 다양한 오피스 공간을 제안하며, 그에 따라 각각의 상황에 맞는 소규모 전시관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뉴욕 소호에 있는 아파트 스타일의 오피스는 주거 형태의 공간 전체를 사무실화해서 일과 생활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왠지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속 스티브 매퀸이 된 듯 가구에 앉아보기도 하고 기물을 만져보며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또 다른 제안은 아주 큰 공장의 컨테이너 박스 스타일의 메탈릭 오피스. 언뜻 보면 드러내놓은 배관, 골조, 통일된 색상의 전선들이 차갑고 어수선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안에서 귀신에 홀린 듯 안락함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마지막 전시관은 젊은 디자이너들의 공간이어서 전 세계 각지 디자인과 학생들의 작업,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의 개성 있는 작업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말레바(Marcantonio Raimondi Malerba)라는 아주 긴 이름을 가진 디자이너의 작업을 보는 순간 그 위트와 아름다움에 반해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가구라고도 볼 수도, 가구를 넘어선 멋진 예술 작품 같기도 해서 한 눈에 갖고 싶었을 정도. 피에나 밀라노 전시관을 나와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하는 50여 분 동안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빗방울에 번진 앞차의 브레이크등, 석회석 하늘에 가려진 둥근 빛은 전시회장의 조명으로 보이고, 버스 좌석은 솜털처럼 부드러운 가죽 소파로 느껴지니 이게 가구 박람회의 즐거운 후유증일까?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시내 세 곳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인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 토르노나(Tortona) 지역 메인 전시관 앞 도로는 마치 뉴욕 첼시의 갤러리 밀집 지역을 축소한 듯 아주 소박하고 아담하다. 다국적의 관람객들이 내뿜는 활기찬 기운은 어제의 가구 박람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제가 클래식 공연장 같은 볼륨 있는 느낌이라면 푸오리 살로네는 록 공연장 같은 힘차고 젊은 열기의 인상이랄까?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섞여 있었으니까. 조명 세팅이 되어 있긴 하지만 평범한 얼음 기둥을 정말 신기하다는 듯 만져보는 꼬마들의 눈빛과 손짓은 나 또한 순수하게, 또한 얼음처럼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보게끔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아름다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태도는 뭔가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저런 어린아이의 눈으로 발견해내는 일 아닐까? 여행을 하는 한, 혹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언제나 말이다.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김남진
- 기타
- 글 | 김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