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1 – 우한나

전여울

카니발적 색감의 패브릭을 통해 구현해온 판타지적 세계관

우한나의 손길 아래 패브릭은 신체 장기로 변했다가, 탐스러운 포도알이 되었고, 노인 여성의 젖가슴으로 탈바꿈했다. 패브릭으로 무한한 세계를 그려온 작가는 이제 차가운 금속성의 ‘알루미늄’ 세계에도 돋보기를 대고 있다. 우한나의 다음 페이지, 다른 차원이 지금 펼쳐진다.

재킷과 치마는 웰던, 부츠는 찰스앤키스, 이어커프는 포트레이트 리포트 제품.

올해 국내 아트 신에서 가장 분주히 움직였을 예술가를 한 명 꼽자면, 단연 우한나다. 패브릭을 주요 재료로 통념을 깨는 조각 및 설치의 세계를 전개해온 우한나의 작업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현장에서 발견됐다. 올해 2월 아트스페이스 보안2에서 개최한 개인전 <마른 풀 소용돌이>를 시작으로 3월 생애 첫 유럽 전시이자 프리즈의 첫 번째 상설 전시 공간인 런던 ‘프리즈 넘버 9 코르크 스트리트’에서 열린 <Appearances>, 같은 달 아트선재센터에서 스위스 여성 작가 하이디 부허에 대한 오마주 전시로 진행된 단체전 <즐겁게! 기쁘게!>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숨 가삐 이어온 전시 레이스는 9월 열리는 프리즈 서울에서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지갤러리와 함께 선보이는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 올해 신설된 ‘제1회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 전시가 바로 그것.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흐른 2023년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용케 잘 버텼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진 예술가를 후원하고 페어장에서의 특별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프리즈 서울의 ‘아티스트 어워드’ 제1회 수상자로 우한나가 호명된 것은 순전히 겁 없고 철없는 작가 자신의 ‘객기’ 덕분이었다고 우한나는 말했다. “사실 여태 상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3월 런던에서 <Appearances> 전시를 올리고 ‘프리즈 어워드’의 제안서를 썼는데, 당시엔 심사위원들에게 나를 노출해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보게 만들자는 목표가 전부였어요. 당연히 당선되리라는 기대는 품지 않았고요. 그래서 객기를 부려보기로 한 거죠(웃음). 제안서는 ‘여기에 모인 미술을 사랑하는 너희를 모두 환영한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해요. 작년 제1회 프리즈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야말로 별천지란 인상이 들었거든요. 페어장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이 꼭 무도회장에 온 듯했어요. 그걸 떠올리면서 건배사를 올리기로 했죠. ‘너의 젊음은 나의 늙음을 맞이하기 위해, 너의 늙음은 내가 젊었을 적을 기억하기 위해, 건배.’ 올해의 제시어가 ‘시간’이었는데, 저는 이를 ‘나이 듦(Aging)’으로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신체 장기를 모티프로 전개한 패브릭 조각 시리즈의 ‘Multiple arms’(2022). MULTIPLE ARMS, 2022, FABRIC, COTTON, 140×80×10CM.

프리즈 기간 동안, 페어장인 코엑스 천장에선 폭이 최대 6m 40cm에 이르는 우한나의 대규모 설치 작품 ‘The Great Ballroom’(2023) 아홉 점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프리즈 어워드의 커미션 작업이자 노화에 의해 늘어진 여성 유방을 부드러운 성질의 패브릭으로 형상화한 신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노화와 신체 변화를 거부하고 한탄하는 대신 그 여정의 세계를 따스하게 포용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젊음이 늙음 위에 있거나, 늙음이 젊음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위계에서 벗어나 단지 서로가 서로의 젊음과 나이 듦을 축하하고, 삶의 모든 스테이지를 생생히 경험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높은 천장에 거대한 유방 형상의 작품이 설치될 걸 생각하면 꽤 흥분되기도 해요. 전 때때로 이들을 ‘유방의 떼’라고 부르기도 해요.”

포도알을 패브릭으로 형상화한 ‘Abdomen: Grapes’(2023). 올해 3월 런던 ‘프리즈 넘버 9 코르크 스트리트’에서 열린 에서 선보였다. ABDOMEN: GRAPES, 2023, FABRIC, STRING, COTTON, BOUNCY BALLS, 120×73×74CM.

신작 ‘The Great Ballroom’(2023)과 더불어 지금까지 우한나의 작품 세계는 줄곧 ‘패브릭’을 통해 구현되어왔다. 돌, 금속, 나무 등 전통적 조각에서 쓰이는 단단한 물성의 재료와 대척점에 서서 부드럽고 유연한, 나아가 언제든지 수선이 가능해 강한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는 패브릭은 우한나의 바느질을 거치며 드로잉,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탄생됐다. 심장, 대장, 콩팥 등의 신체 장기를 패브릭으로 구현한 ‘Organ’ (2020) 연작, 솜과 비즈 등을 활용해 여성의 성기 모양을 꽃처럼 표현한 ‘Bleeding’ (2023) 연작, 탐스러운 포도알을 연상시키는 패브릭 설치작 ‘Abdomen: Grapes’ (2023) 등 친숙한 재료인 패브릭은 우한나의 손길을 통해 판타지적 세계를 자유로이 유영해왔다.

“어머니가 인테리어 디자인, 데코레이티브 페인팅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집에 수입 물감이며 예쁜 커튼이 많았어요. 그때부터 워낙 천과 바느질을 좋아했고요. 대학생 시절 자취방에 누더기처럼 더러워진 이불이 있었는데, 어느 날엔가 그게 제 눈에 굉장히 예쁘게 보이더라고요. 부엌 가위로 죽죽 잘라 유니콘 형상을 만들어봤는데 희한하게도 주변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대학교 3학년에 첫 개인전을 했을 땐 왠지 패브릭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죠. 그때 당시엔 돈이 없으니까 학교 게시판에 헌 옷이 있으면 302호 몇 번째 방으로 가져다달라는 글을 올렸는데 친구의 친구들까지 옷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옷의 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했죠(웃음). 그러다 이모에게 재봉틀을 물려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패브릭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프리즈 어워드’ 전시가 지금껏 우한나가 탐색한 패브릭의 세계를 맛볼 기회라면, 지갤러리 부스에서 펼쳐지는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는 ‘패브릭 그다음’의 세계를 엿보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선 여태껏 작가의 세계관에서 볼 수 없었던 차갑고 단단한 금속성의 ‘알루미늄’이 새로이 등장한다.

“그동안 껍질처럼 연약하고 물렁한 천을 재료로 하면서 이것들이 스스로 직립하기 어렵고 항상성이 없음을 자주 느꼈어요. 그게 장점이기도 했지만 단점으로 보일 때가 있어서 언젠가 솔리드한 매체에 시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죠.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지금이 패브릭 이후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는 저를 보여주기에 적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도전의 일환으로 이번 신작들은 나무, 점토 등을 알루미늄 캐스트해 제작하기로 했죠. 패브릭은 단독으로 서지 못하지만 이번 전시장에선 프리스탠딩 피스인 ‘Bough and Twig’(2023)라는 작품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저에게 직립은 독립을 뜻하기도 해요. 스스로 직립하고자 하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작가로서의 욕망이 작품에 투영된 셈이죠.”

‘포커스 아시아’ 전시 출품작 ‘Milk and Honey–4’(2023)로, 노화에 의해 늘어진 여성의 가슴을 형상화했다. MILK AND HONEY – 4, 2023, FABRIC, BEADS, COTTON, 235×163×40CM.

“관객들에게 그동안 못 보던 차원을 보여주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모두가 그 차원을 볼 필요는 없어요.
단 한 명이어도 되죠. 특히 이번 ‘포커스 아시아’ 전시를 통해선 누군가가 누군가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차원을 관객이 느꼈으면 해요.
당신의 모든 행위, 선행이든 잘못된 행동이든 그것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당신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죠.”

한편 우한나는 이렇듯 서늘한 알루미늄 조각들을 통해 상상과 실재, 죽음과 삶, 인간과 비인간 간의 ‘사이 세계’라는 주제를 탐험한다.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마른 협곡 그랜드 쿨리(Grand Coulee), 오늘날 이 말라버린 골짜기에서 새롭게 생명을 틔우는 존재들에 주목한 메인 작품 ‘Grand Coolly’(2023) 등 작가는 낯설고 기이하게 공존하며 모순된 두 개의 상태가 서로를 소생시키는 신비로운 풍경을 상상한다. “사실 인간과 비인간, 종의 구별 등은 인간이 쉽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분류화한 것이잖아요. 저는 그것의 ‘다르게 보기’를 제시하고 싶었어요. 전시를 준비하며 ‘죽었는데 살아 있고, 살아 있는데 죽은 것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둘 사이의 위계가 지워지고 그 사이에서 공명하는 별종들이 그리는 공생, 우정을 그려갔죠. 이번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도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한 번쯤 진지하게 상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 과정을 통해 누군가는 이전까지 열리지 않던, 다른 차원에 비로소 발을 디딜 수 있겠죠.”

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2 – 박론디

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작가 3 – 정수정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최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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