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층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삶에만 행복이 머물진 않는다. 여기 아주 작은 최소의 집부터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이중생활, 그리고 셰어하우스까지, 조금 다르지만 똑같이 행복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일상의 물건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세요!”
건축가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과연 ‘나에게 맞는 적정 공간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라는 의문을 던진 건 몇 해 전이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설계 진행 방식이긴 하나, 늘 고객이 원하는 공간의 규모와 크기가 ‘평수’로 결정되고 나면, 그 평수를 기준으로 가족 구성원에 따른 방의 개수를 결정하고, 그 다음 가구의 수량과 크기에 따라 방의 규모를 결정하곤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처음엔 “우리는 가족 구성원도 단출하고 모두 검약해서 가구도 많지 않으니, 대략 20평 이하의 주택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했던 사람들도 막상 설계가 시작되면 애초에 없던 살림살이가 하나둘 늘어나 심지어 방의 개수까지 모자라는 해프닝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게 맞는 적정 공간에 대한 의문을 가진 이후, 우선 하루에 하나씩 불필요한 물건들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불필요하다 할지라도, 막상 그들과의 인연이 내 삶에 섞여 있는 까닭에 그 관계를 단칼에 끊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물건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사진 한 장의 추억으로 남기며 헤어지고 나자, 이제 남은 건 사계절에도 불구하고 춘하와 추동으로만 묶인 최소의 옷과 신발, 식탁 및 테이블 겸용 가구 하나와 의자 2개, 매트리스 1개, 그리고 최소의 주방용품까지 아주 단출한 살림살이만이 남았고(심지어 책장은 사무실 책장과 동거 중이다), 순수한 의미의 필요한 공간이 그리 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리하여 나의 공간이 크지 않아도 사계절을 보내는데는 물론 앞으로의 여생을 보내는 데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데에 결론이 다다르자, ‘최소’라는 가치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되었다.
최소의 집 – 9X9 실험 주택
우리가 사는 기존의 주택 공간은 대개 가구가 각각의 공간을 점유하여 정의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거실엔 소파와 TV가 있어야 하고, 침실엔 침대와 옷장 그리고 주방엔 식탁과 주방가구가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소파가 있으면 거실이고, 침대가 있으면 침실, 식탁과 주방가구가 있으면 주방이라 불리는 공간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방에서 사라져 모두 벽 안으로 숨어버리게 된다면, 그동안 가구에 의해 제한적으로만 사용되던 공간은 사용자에게 그 선택권이 돌아가 필요에 따라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주택 평면의 가로와 세로 길이가 각각 9미터인 ‘9X9 실험 주택’ 설계는 바로 그러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설계 진행 중에 건축주 부부는 우선 불필요한 가구를 정리했고, 이 주택의 주요 콘셉트 중 하나인 ‘최소 기능의 수납장치(Furniture Corridor)’를 통해 생활에 필요한 최소의 가구를 벽 속에 숨겨(빌트인), 무빙월이나 슬라이딩문을 열고 닫으며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더불어 수납공간을 제외한 공간은 거주자가 필요에 따라 정의하여 사용할 수 있는, 나름 작지만 가변적이고 실용적인 공간으로 설계했다. 또한 대부분의 주택에서 방이란 벽에 의해 공간이 분리되지만, 이 주택은 벽 대신 유리벽에 의해 감싸져있고 그 사이마다 작은 외부 정원이 들어와, 내외부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마치 미로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콘셉트를 실현시키기 위한 건축가의 고민과 노력을 이해해준 건축주 내외는 9X9 주택이 완공된 후에도 최소의 가구와 함께, 내부로 들어와 있는 작은 정원을 본인들의 생활 방식에 맞게 활용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건축가로서도 ‘최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최소의 집’은 작은 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주자 스스로가 공간을 정의하여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건축이 반영된 집, 그것이 바로 최소의 집이다. – 정영한(건축가, 스튜디오 아키홀릭 소장)
혼자가 아닌 나
나는 죽전에 위치한 방 네 칸짜리 64평 아파트에 산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아파트의 방 중 한 개가 나의 집이다. 남은
방 중 가장 큰 방은 친구 부부와 14개월 된 아기가, 또다른 방 2개엔 싱글인 친구 두 명이 각각의 보금자리를 꾸리고 있다. 물론 우리 사이엔 어떠한 혈연 관계도 없다. 어디서 어떻게 사냐고 물으시던 회사 부장님께서 “응? 뭐라고?”라며 이해 못하시던 이 기묘한 동거는 가구, 리빙, 문구를 제작하고 선별해 공간을 꾸리는 브랜드 ‘비아인키노’의 론칭에서 시작됐다. 우선 나를 제외한 친구 넷은 더욱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큰 아파트를 빌려 같이 살면서 거실을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 보증금과 월세 그리고 생활비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수익에서 지불하므로, 사실상 공동으로 부담하는 셈이다. 따로 직장을 다니는 나는 대학 친구의 제안으로 비아인키노의 그래픽, 홈페이지 디자인을 돕게 되면서 동시에 이 집에도 초대받았다. 여의도에 위치한 직장에서 이곳 아파트까지 왕복 3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그 초대에 응하기로 결심한 건 혼자 있는 게 싫어서였다.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로 대학을 온 이후 10년, 그동안 고시원에도 살아보고, 자취도 해보고, 하숙도 해봤지만, 혼자 집에 들어섰을 때 아무도 없는 그 느낌엔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거리가 멀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속엔 지난 10년간의 삶이 남긴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참 좋다. 흔히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에게 혼자 살아도 충분한 멋진 집을 구할 수 있는 비용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대안으로 선택한 30만원짜리 고시원방, 그보다 조금 비싼 하숙방, 그보다 조금 더 비싼 원룸은 삶의 질을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비록 오래된 아파트일지라도 겨울엔 충분히 따뜻하다. 집 앞엔 산과 공원이 있고, 강이 흐른다. 비용의 차이 이상으로 삶의 질이 뛰어오르자, 고된 출퇴근으로 몸은 지칠지언정 마음은 부쩍 여유로워졌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만난 룸메이트가 아니라서일까.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이 집이 나의 보호막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요리를 좋아하면서도 매번 마트에 갈 때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판매하는 식재료 때문에 포기하곤 했는데, 이젠 요리를 해서 같이 먹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살다 보니 빡빡한 규칙이 있으리라 예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규칙이 없는 느슨한 형태가 우리를 묶어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요리를 하면 요리를 잘 못하는 친구가 설거지를 하고, 누가 화장실을 청소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하고, 누군가 빨래를 널어놓으면 또 다른 사람이 개는 정도의 배려. 그건 우리 다섯 명 모두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살아본 경험을 몸으로 체득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각이 부쩍 달라지는 나를 보며 스스로 재미있어 하는 중이다. 사실 집에서 부대끼며 일하다 보면 서로 날카로워질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아기가 다가와 애교를 부리면 얼마나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그럴때면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는 삶도 꽤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불쑥불쑥 하곤 한다. 지금껏 결혼에 관심이라곤 없고 심지어 아기란 귀찮은 존재로만 여기던 나를 바로 이 집이 이렇게 변화시킨 셈이다. 물론 친구 부부가 부부싸움이라도 할 분위기면, 약간 눈치를 보며 알아서 빠지는 기지는 필요하지만! – 이현경(그래픽 디자이너)
그녀의 이중생활
3월 8일. 난 이곳 대관령으로 이주했다. 그렇게 평생 서울에서만 살았고 뉴욕에서 잠시 살아본, 철저한 도시 여자이자 패션 피플인 스타일리스트 임희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마을로 완전히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리고 매일 집 앞 너른 구릉에 펼쳐진 자연의 솜씨에 감탄하며, 야생동물들과도 틈틈이 조우하며, 동네 어른들께 (올해로 결혼한 지 정확히 20년이나 되었건만)‘새댁’ 소리를 들어가며 서서히 강원도 주민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삶을 결정하게 된 건 사실 남들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너무 유행을 좇으며, 너무 멋부리며, 너무 문화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너무 세계적인 것을 따르며 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롤러코스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은 기분이랄까. 정신이 지쳐가니 육체가 따라 곡소리를 내고, 그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슬슬 가치관이 변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흙을 밟으며, 적절한 노동을 하며, 신과 가까이에서 풍요로운 정신으로’ 살고 싶어 이주를 결정했고, 지금은 서울과 강원도를 열흘씩 오가며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진행 중이다.
서울의 일상과 강원도의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서로 완벽하게 다른 두 생활은 그전엔 하나로 뭉뚱그려 있던 내 생활을 마치 수납장에 깔끔하게 정돈한 것처럼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먼저 서울 생활은 철저하게 사무적이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동안은 마치 장기 출장길에 오른 것처럼, 스케줄에 짜여진 대로 일하고, 사람을 만난다. 가끔은 청담동의 꼬르소꼬모 카페에 앉아 강원도에선 만날 수 없는 친구와 강원도에선 누릴 수 없는 문화적 사치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일주일 정도 지속되면, 나의 몸과 마음에서 슬슬 보채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강원도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다. 최근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는 헤어스타일리스트 김정한 역시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서울에서 일주일 넘게 지내면 너무 힘들어!” 우리가 이런 소리를 해대면 주변인들의 반응은 이렇다. “지들이 언제부터 시골 살았다고!”
그러면 이제 나의 강원도 생활을 알려드릴 차례. 아침에 일어나면 부지런히 세수하고 나의 작은 방으로 가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주 피곤하지 않으면 대략 5시에 시작되는데, 늦잠을 잔다고 해도 일정이 바뀌지는 않는다. 기도를 마친 후엔 천천히 아침을 ‘많이’ 먹고, 신문을 정독한다. 그러곤 청소, 빨래, 음식 준비 등 부지런히 집안일을 한다. 그래야 저녁 시간이 오기 전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3시간 정도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면, 이 때 시간이 대략 밤 10시. 이렇게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주일 동안, 모든 업무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하며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힘과 지혜를 비축한다. 적어도 나에겐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는 이중생활이 무척이나 효율적이다. 새롭게 사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에 머물고 있는 나를 보며 너무 ‘천하태평’ 아니냐는 주변인의 질타도, “넌 도대체 왜 강원도에 있는 거니? 당장 서울로 올라와!”라는 친구들의 요구도 나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강원도에서 지내는 이 시간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또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너무 바쁘다. 그렇게 시간에 쫓겨 사느라 정작 중요한 것이 무언지 분별할 수 있는 ‘사고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시간도 기회도 없이 눈앞에 있는 일들에 급급한 것이 모두의 현실이니까. 몸을 움직여 실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강원도에 와서 배웠다. 모든 일을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교만함 역시, 일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인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된 이후 카프리 섬으로 주거를 옮겨 ‘서면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즉 편지로 모든 것을 전달한 것이다. 이런 전례에 힘입어, 나는 오늘도 강원도에서 ‘카톡 경영’을 꿈꾼다. – 임희선(스타일리스트, 향 전문 브랜드 레흐 대표)
따로 또 같이
통의동집을 발견한 건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란 카페에서였다. 지난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직업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야 했지만, 집이 마땅치 않아 샅샅이 뒤지던 중이었다. 당장 연락해 집을 둘러본 후에는, 다른 데는 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했다. 지하 1층의 주방과 부엌, 1층의 책장과 라운지, 그리고 욕실과 세탁실은 함께 사용하지만 방에서만큼은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는 딱 나를 위한 집일 것만 같았다. 혼자 살긴 싫어서 같이 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같이 살고 싶진 않았으니까. 프랑스에서 공부하던 시절 친구와 원룸에서 함께 살다가, 크게 싸우고 헤어진 기억이 떠올랐다. 말로만 셰어하우스였던 예전 집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도 빠른 판단을 부추겼다. 빌라를 꾸며 셰어하우스로 만든 그곳에는 현관문을 여는 열쇠가 딱 하나였다. 입주자들은 문 위에 올려두거나 통에 넣어둔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고 닫았다. 그런데 어느 날 열쇠가 없어졌고, 그 바람에 며칠을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 지내야 했다. 아무리 월세가 저렴해도, 안전을 담보로 할 순 없었다. 처음부터 셰어하우스로 기획된 까닭에 입주자의 지문으로 현관문을 여닫을 수 있는 이곳에서라면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이 함께 만든 덕분에 예쁜 건물과 방 또한 마음을 건드렸다. 친구들은 다른 원룸보다 비싸다고 했지만,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동네, 좋은 집에서 사는 게 중요했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갈 때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았던지라 서촌이란 동네가 마음에 들었고, 안전하고 예쁜 집이 꼭 사치는 아니라 여겼다.
사실은 혼자 살기 싫은 마음이 가장 컸다.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 지내던 4년여, 그리고 3년 반의 유학 시절 동안, 혼자 살 수 있는 기회는 너무 많았다. 누군가 같이 있다는 것, 옆 방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편안해지는 마음을 알까?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건, 운영자들이 열어준 파티에서였다. 요리사를 초대해 손쉽게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배우고 함께 먹으며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아침 일찍 나가 늦게 들어오는 탓에 직접 얼굴 보고 만날 수 있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그 이후 단체 채팅방에선 늘 ‘오늘 몇 시에 부엌에 친구를 데려올 거예요’, ‘주방에 음식 가져다 놓았으니까 맘껏 드세요’, ‘고양이를 데리고 입주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괜찮을까요?’라는 이야기가 오간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요즈음,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분히 포근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물론 내 방이 큰 건 아니다. 있는 가구라곤 침대, 침대에 붙어 있는 책꽂이, 책상, 옷장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렇기에 더 내 집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점점 내 집처럼 꾸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1층 사무실에서 택배를 받아주고, 욕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해주고, 주방에 모든 조리 도구가 준비되어 있고, 냉장고에 넣을 용기 하나까지 ‘1번방’, ‘2번방’ 표시해서 마련해주는 작은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지는 혼자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요즘 같은 때에 선뜻 혼자 살기가 쉽지는 않다. 그런데 누구나 혼자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예전엔 엄마가 잔소리해야 겨우 하던 일을, 혼자 살게 되면 혼자 할 수 있는 힘이 키워지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완전히 혼자 사는 일이 무섭고 두려운 나는 이렇게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에서 진짜 독립을 준비 중이다. – 김지현(셰어하우스 통의동집 입주자)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슬기
- 포토그래퍼
- KIM JAE KYEONG(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 기타
- COURTESY OF STUDIO ARCHIHOLIC(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KIM YONG KWAN, ROOMING, SEOUL SOCIAL STANDARD(따로 또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