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를 사랑해온 더블유는 지난 10년간 그랬듯, 창간 10주년 역시 좀 남다른 방식으로 기념하자고 마음먹었다. 젊고 재능 넘치는 영화감독들, 그리고 빛나는 배우들을 모아 세 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다.
<W Korea> 창간 10주년 기념 단편영화 프로젝트 <여자, 남자>는
3월10일부터 4주간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상영됩니다.
관람 방법은 3월 2일, 더블유 홈페이지 www.wkorea.com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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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 우문기
주연 | 이나영, 안재홍
“감독님… 5 분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무슨 소리야? 시간 없어! 찍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실제 영화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으로 오해할 법한 장면이 극 중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정을 서두르며 배우를 채근하는 감독은 그러니까, 이 영화의 진짜 감독인 우문기가 아니라 감독 역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이서환이다. 그 앞에는 카메라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배우 이나영, 그리고 붐마이크를 들고 굳은 얼굴로 멀찌감치 서 있는 스태프 역의 안재홍이 있다. 연애의 끝을 경험해본 누구에게나 힘든 ‘헤어진 다음 날’은 존재한다. 이별을 다독일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일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런데, 일터에서 헤어진 바로 그 사람과 여전히 부딪쳐야 한다면? 어제 막 헤어졌지만 그걸 내색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의 마음은 지금 온도가 서로 다르다. 아직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배우는 남자와의 관계를 돌이키고 싶지만, 붐맨은 혼자 앞질러 식어버린 마음만큼이나 마이크를 길게 뽑아 그녀에게서 멀어져간다. 자신에게 닥친 실제 상황의 슬픔과 불편함 때문에, 정작 눈물을 흘려야 하는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여배우의 아이러니. 그래서 이 장면은 제목 대로 ‘슬픈 씬’이다.
단편 <슬픈 씬>의 발단에는 지난해 독립영화계의 활기찬 우량아이던 장편 <족구왕>이 있었다. 이 영화의 낙관적인 유머와 건강한 활력을 눈여겨본 더블유는 창간 10주년 기념 맥무비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우문기 감독을 섭외 1순위로 영입했고, 배우 이나영이 작은 규모의 단편 작업임에도 일찌감치 동참 의사를 밝힌 데도 <족구왕>의 에너지에 대한 신뢰가 컸다. 남자 배우는 감독의 장편 파트너였던 주인공 만섭이, 안재홍이 적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꾸려진 드림 팀의 첫 만남이 촬영으로부터 열흘 전 더블유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우문기 감독은 ‘나영 씨 벌써 오셨는데 네가 늦어서 화났어’ 하고 안재홍에게 문자를 보내는 장난기, 그러나 정작 도착한 여배우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숫기 없음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눈도 못 마주치는 건 마찬가지인 안재홍이지만 “이나영을 차버리는 나쁜 남자인 건데, 가능하겠어요?” 하는 에디터의 질문에는 강하게 자신감을 피력했다. 시나리오를 앞에 두고 본격적으로 세 사람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 배우는 어떤 영화를 찍고 있는 걸까요? 시대물? 사극? 개화기 모던걸의 차림일 수도 있고, 한복 차림에 가채를 쓰고 있을 수도….”
이나영이 운을 띄운 극 중 영화의 설정에 대한 토론은 우문기 감독의 맞장구에서 추진력을 얻어, 마치 <노팅힐>의 한 장면처럼 여배우가 우주복을 입고 SF물을 찍고 있는 건 어떠냐는 아이디어까지 멀리 나아갔다가 지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감정이 중심을 이루는 영화인 만큼, 거기 순수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연스러운 설정이 좋겠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면서.
“브래드 피트가 자고 간 방이래요!” 촬영 장소인 콘래드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만난 우문기 감독은 해맑은 표정으로 들떠 있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제작진 모두에게 고마운 건,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환경에서 배우들이 연기에 전념할 수 있다는 점이었지만. 카메라와 조명은 배우들의 위치를 두 겹으로 둘러싸며 촬영장 속에 또 하나의 촬영장을 만들었고, 헤어 메이크업을 일찌감치 마친 안재홍은 이 영화의 실제 녹음 담당인 권현정 음악감독에게서 음향 장비 사용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촬영장 한켠에는 스태프들을 위한 김밥이며 과자, 생수 곁으로 오늘 촬영의 장면을 그려 프린트한 콘티가 쌓여 있고, 우문기 감독이 가져온 조그만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영화 완성 이후 배경 음악으로 덧입힐 리스트의 피아노곡 ‘사랑의 꿈’이 흘러나왔다. 배우들의 감정 몰입을 돕기 위해 미리 틀어놓은 것이다. 호텔 꼭대기 층의 넓은 스위트룸은 구석구석 햇살이 비추는데다 밝은 조명 장비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여기 에어컨 좀 켜 주세요!” 누군가의 외침은 분명 안재홍을 위한 배려였다. 붐마이크가 무거워서인지, 헤드폰이 갑갑해서인지, 연기에 몰두해서인지 모를 땀이 그의 이마에서 송송 배어나올 때 에어컨 액정을 확인하자 실내 온도는 무려 2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선 마이크를 달기 위해 바싹 다가선 두 사람의 사이로 싸늘한 긴장이 흐르고, 여배우의 손을 붐맨이 뿌리치며 외면하는 장면에 접어드니 쾌활하던 촬영장의 분위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족구왕>에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던 안재홍은 남자의 굳게 닫혀버린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고, 그런 남자를 야속해하며 이제 자기가 싫어진 거냐고 묻는 이나영에게서는 자존심보다 사랑에 솔직하던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모습이 겹쳤다.
모니터 앞의 우문기 감독은 연신 흡족한 감탄사를 뱉었다. “나영 씨 웃는 얼굴이 정말 예쁜데, 이 영화에는 활짝 웃는 장면이 없어서 아쉬워요.” 아쉽게도 이나영의 아름다운 웃음은 영화 밖 현장의 스태프들만 누릴 수 있을 뿐, 촬영은 감정에 몰입하기 위해 여배우가 스스로 뺨을 때리기까지 하는 씬으로 흘러갔다. 배우들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집중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스태프들이 시선 밖으로 비켜서고, 몰두한 이나영의 큰 눈에서 그렁대던 눈물이 뺨으로 뚝 흘러내렸다. 펜트하우스 창밖으로는 햇살 대신 퇴근길 차량들의 라이트가 빛나기 시작하고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50번쯤 들어서 외우겠다 싶을 때, 마침내 마지막 컷과 오케이 사인이 났다.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마친 우문기 감독은 어디로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싶더니, 실제 자신의 아내인 음악감독에게로 달려가서 어깨를 동그랗게 끌어안았다. <슬픈 씬>의 마지막은 그랬다.
- 에디터
- 황선우,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 모델
- 이나영, 안재홍
- 스타일링
- 유현정(이나영)
- 헤어
- 김정한
- 메이크업
- 손대식